PGR21.com


Date 2005/02/19 02:25:23
Name kama
Subject [연재소설]Romance - 3. 남매
  아줌마, 여기 관심 1인분 추가요~!.......(퍽, 퍼벅!)
  어차피 전문적 소설가도 아닌 이상 자기 만족과 즐거움 때문에 쓰고 있는 것이지만 가끔은 한 숨이 나오기도......뭐,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재밌게 쓰는 것이겠죠^^;;; 아자아자아자!



  3. 남매


  저번 ESWCS에선 파란이라 불릴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작은 대회에서 명성을 쌓아나가기는 했지만 그렇게 대중에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 두 명이 4강에 나란히 올랐던 것이다. 더욱이 그 두 명은 같은 길드 소속. 결국 한 명은 결승에 까지 올라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사람이 한국 태생의 스웨덴 인인 라이센 신, 한국식 이름으로는 신의식. 소속은 K.D길드로 현재 이 길드는 에이스인 그와 같이 4강에 올랐던 나엘 유저 Red_Earth[K.D]를 선두로 S.K와 4Kings의 뒤를 잇는 신세력으로 부상 중인 상황이다.
  ......그러니까 내가 압사를 당했던 것이지. ESWCS 4강의 실력자였다니 말이야. 레벨이 38이라는 것에 현혹되어서 미쳐 그 ID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다른 서버에선 50이 된지 이미 한참~이 지난 인간이었는데. 그나저나 파란 하늘과 붉은 땅이라, 누가 먼저 그렇게 하자고 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하여간 대단한 센스임에는 틀림없다. 좋은 쪽이던 나쁜 쪽이던 간에.

  “사실 녀석은 원래 자기 걸로 한다고 고집을 부렸거든. 그래서 몇 판 이겨줬지. 그러니까 한 숨 쉬면서 결국 그걸로 하더라.”

......의외로 강적일지 모른다, 이 남자.

  “왠지 시적인 느낌이잖아?”

......어쨌든 그런 대단한 남자가 지금 나와 같은 PC방에서, 바로 내 옆 자리에서 같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지금은 게임을 하는 중이 아니라 컵라면 하나 받아와서 엄청나게 행복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거참, 서민적인 모양새로군. 한 분야에서 일류에 속한다는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까 새삼 사람은 접해 봐야 안다는 진리가 떠오른다. 철야하는 것도 아닌데 컵라면을 사 먹다니.
  
  “너도 타지 생활 해봐라. 여기에 있을 때는 컵라면 하면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는데 외국에 나가보니 역시 PC방에서 게임하면서 먹는 컵라면이 제일 맛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단다.”

  역시나 한국에 있었을 때 적잖이 부모 속 썩히면서 폐인 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이건 좀 동질감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그저 사람 좋고 뭔가 어설퍼 보이는 20대의 남자처럼 보인다만 프로는 프로답게 자신의 종목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이 사내는 확실히 워크래프트3로 자신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 또 다시 시작된 나의 연패 이야기. 게임이 일단 시작되면 누가 와서 건드려도 모를 정도로 집중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완전히 게임 속에 몰입되어 유닛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재미난 반응(?)을 보이는 가연과는 달리 이 사람은 평소에 잘 내보이는 그 미소도 사라지고선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한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냉철함마저 느껴진다고 할까나.

  “실력이 좋네.”

  “그래봤자 요즘에는 지기만 하는걸요.”

  “가연이한테 지는 것은 흠되는 일이 아니야. 녀석이 독특한 것이니까. 자신을 가지라고, 자신감이 없으면 이길 시합도 지는 법이야.”

  어느새 컵라면을 맛있게, 정말이지 맛있게 먹고 나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의자를 빙글 돌려 앉는다.

  “20연패 했던 것이 한 달 좀 넘었지?”

  윽, 저렇게 태평한 얼굴로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찔러버리다니. 그 기록은 제 인생에서 지워야 하는 흑역사의 한 편이라고요.

  “한 달 정도 밖에 안 지난 것이지.”

  “네?”

  “이야기 들었다. 지금은 대략 네 번 정도에 한 번 이길 수 있다면서. 한 달 정도 되는 시기 만에 손도 못 대던 상대를 그렇게 따라왔다는 것 자체가 너의 지금까지의 연습량과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길드 같은 것에 든 적도 없다면서?”

  “아, 네.”

  “그동안 너는 마땅히 네가 가지고 있던 고질적인 문제점이나 약점을 알려줄 만한 상대가 없었던 거야. 그런 것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실력이었으니까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러는 바람에 그런 단점들이 아는 길드에 잠깐 잠깐 놀러가거나 배틀넷에서 몇 번 진 것으로는 깨닫기 힘들며 안다고 해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굳어져 버렸지.”

  그랬다. 그래서 처음에 그녀에게 무지하게 혼났었지. 변화가 없는 체제나 사냥 경로, 운영 등은 상대하는 입장에서 대응하기 편하다고. 그런 것을 고치지 못하면 몇 십 판을 해도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가연이에게 연패하고 배우면서 그런 점들이 서서히 고쳐지는 과정이야. 아마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는 더 실력이 늘 것이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가 살며시 의자를 앞으로 밀면서 얼굴을 내 쪽으로 내민다.

  “우리 길드에 들어와라.”

  당신의 길드라면......K.D길드? 유럽에서 S.K와 4Kings의 뒤를 잇는다는 그 길드로? 내, 내가 정말 그 정도 실력이라는 소리? 이 사람 날 놀라게 하려고 한국에 온 것 같다. 아니 설마. 지금 나 놀리는 거죠?

  “넌 지금까지 너 혼자만의 힘으로 지금까지 실력에 왔어. 만약 주변에 너의 단점을 지적해주고 같이 연습해줄 플레이어들이 있다면 너는 아마 더욱 성장하겠지.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우리 길드는 곧 있으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으로 성장할거야. 다른 프로팀들처럼 협찬을 받기도 할 것이고. 충분히 좋은 조건으로 발전하겠지.”

  “하, 하지만 저는 그렇게 전문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서......”

  “물론 지금 당장 오라는 말은 아니야. 너도 아직은 그저 좋은 휴먼 플레이어에 불과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잖아. 우리 길드는 외국, 그것도 머나먼 스웨덴에 위치하고 있으니 아직은 무리지. 졸업 후를 이야기 하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지금 신경 안 쓰게 됐습니까. 이거야 완전히 길 가던 야구부 고등학생에게 메이저리그 관계자가 와서 스카우트 제의하는 거나, 조기축구회의 일원에게 프리미어 리그 관계자가 온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 길드 입단, 그것도 앞으로 정식 스폰서를 통하여 사실상 프로팀이 될 길드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프로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소리......겠지.
  프로게이머라. 게임을 좋아하고 게임으로 먹고 사는 프로게이머가 된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여러 길드를 돌아다니고 실제로 그 업종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면서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무엇보다 뭔가를 즐기는 일에 열중하는 나로선 그런 ‘일’로서의 게임은 맞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그런 엄청난 경쟁의 세상 속에서 살 만큼 내 실력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지금 실제 그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람이 나의 능력을 높게 사주는 것이다. 괜찮은 것일까?
  아니, 아니다. 의식 형도 지금 내 실력이 아닌 가능성을 보고 한 말일 뿐이다. 실제로 내가 그 정도 레벨에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으며 그럴 노력을 할 만한 인간도 아니지 않는가. 깊게 생각하지 말고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자. 아직은 즐기는 게임을 하고 싶으니까.
  그러고 보니 바로 그의 옆에 나보다 더 잘하는 플레이어가 한 명 있었지. 그녀에게도 이런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거절한 것일까? 원래 남의 눈치 보느라 속으로 끙끙 앓는 성격이 아닌지라 나는 곧바로 물어보았다.

  “가연이는요? 걔는 나보다도 더 잘하잖아요.”

  그는 다시 빙글 의자를 한 바퀴 돌린 다음 그대로 의자에 드러눕는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랬듯이 고개를 눕히고 천장을 바라본다.

  “말 안했어.”

  흠. 짧지만 강렬한 대답. 뭔가 사정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갈 볼까나? 나는 살며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평온한 표정. 어쩌면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입을 열었다.

  “왜요? 설마 제 장래성을 가연이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은 아닐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옛날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옛날 생각?”

  “그래. 그 녀석 그때 진짜 귀여웠다고. 지금은 활기차 보이지? 중학교 때만 해도 엄청 수줍음 잘 타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꼬마였어. 키도 더 작았고.”

  으음......상상하면 안돼. 상상하면 안돼. 그래도 귀여웠을지도......아, 이래서야 완전 아저씨잖아 이거.

  “난 그 때도 폐인이었거든, 스타 폐인. 이제 막 워3가 나와서 열심히 플레이 하고 있었는데 그 조그마한 녀석이 슬금슬금 뒤로 다가오는 거야. 그래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울먹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나도 그거 가르쳐 주세요, 라고 하지 뭐야.”

  ......윽, 생각하고야 말았다.

  “지금은 어느새 다 큰 숙녀가 됐지만 아무래도 녀석과 같이 게임을 하면 그 때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그래도 그 실력이 아깝잖아요.”

  “뭐, 실력 아까운 건 나도 알고 있어. 제대로 된 환경만 도와준다면 아마 가연이는 내 실력을 뛰어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안돼는 것은 안돼. 무엇보다......어머니, 지금은 나와 그런 관계는 아니지만 어쨌든 어머니에게서 그녀를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그런 건 한 번이면 족하니까.”

  어머니......라. 그러고 보니 어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왜 오빠, 동생 사이면서 성이 다르냐고 물었을 때 부모님들이 서로 이혼을 한 상태라고 했지. 그래서 지금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다고. 하긴 그런 상황이라면 그녀를 유럽까지 데려가지는 못하겠지.

  “일단 나도 한 가지만 물어보지.”

  “네?”

  그는 일단 말 대신 앉고 있던 의자를 다시 한 번 빙글 돌렸다. 아무래도 뭔가 생각을 할 때의 습관인 듯싶다. 그리고 한 번의 회전 후, ‘탁’소리와 함께 의자가 멈춘다. 그리고 좀 전처럼 다시 나를 향해 그는 얼굴을 내밀었다. 다시 이어지는 약간의 침묵. 무슨 질문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막 이런 생각을 했을 때 입을 열었다.

  “가연이, 좋아하냐?”

  ......잠깐만요. 잘 못들은 것 같은데요. 아, 귀가 안 들려요. 주변의 소음이 너무 심한 것 같죠? 이어폰을 오래 끼면 귀가 상한다는데 아마 그런 케이스라고 생각되네요......좋아하나고요! 18년의 인생, 짧지만 남 못지않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그 세월동안에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단어가 아련히 귓가에서 메아리친다.
  남자와 여자가 같이 친하게 있으면 당연히 그러한 의문이 생기는 것일까? 설마. 나는 최대한 표정을 숨기면서 문가연이라는 여자를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알고 지낸지는 대략 한 달하고 조금. 첫 만남은 PC방 입구에서의 부딪침. 그리고 그 전부터 배틀넷 상에서 나를 무참히 짓밟았던 paran_hanle이란 ID의 주인. 워3라는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어 말이 잘 통하고 같이 게임하고 이야기를 나누면 즐거운 상대. 그럭저럭 예쁘장한 외모라 보기가 민망하지도 않으며 다행히 키가 작은 쪽에 속하는 나보다도 더욱 작아(물론 남자보다 키 큰 여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나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게 하는 사람. 활기찬 행동으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하며 가끔 삐지는 것이 나름대로 귀여운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여고생......설마. 이런 즐거움 정도는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것이겠지. 좋아한다니. 아직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아니에요. 그저 같이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일 뿐이죠.”

  “흐음.”

  글쎄, 아니라니까요. 뭔 그리 의심에 가득 찬 얼굴로 바라보시나요.

  “그럼 다행이고.”

  “이쁜 여동생에게 집적거리는 남자가 없어서요?”

  “아니, 난 내 연적이 나타났는지 걱정했거든.”

  ......이 아저씨, 정말 위험한 인간이었잖아?! 이 시스터 콤플렉스!!! 하지만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는다.

  “아무리 이혼했다고 해도 동생이잖아요?!”

  “정확히는 동생, 이었지. 가연이가 나보고 그냥 오빠라고 하던?”

  “네. 성이 다른 것은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 때문이라고......”

  “흠, 거기까지 이야기를 했어? 역시 좀 불안한데.”

  사람이 의심이 많으면 크게 못된다는 옛말도 있지요. 앞으로 미래가 창창한 사람이 벌써부터 그렇게 좁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맞아, 나와 가연이는 한때 남매였고, 현재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헤어져있는 상태지. 하지만 우리 집안이 조금 복잡하거든.”

  복잡하다라. 그는 계속 미소 짓는 얼굴로 자신의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와 가연이는 아예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였다고 한다. 즉, 원래 태어난 부모가 달랐고 그 부모들이 각각 사별과 이혼으로 갈라진 후, 서로 만나 재혼을 한 형식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혼 역시 3년 정도 되는 시간 만에 끝이 났다고 한다. 그나마 크게 싸우거나 누가 바람을 피워서 이혼 한 것이 아닌 의식 형의 친부가 스웨덴으로 이민을 가면서 한 이혼이라 상처가 되지는 않았다니 다행......일려나.

  “그러니까 실제로 나와 가연이는 피가 섞이지 않는 상태라는 말이야. 더군다나 호적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그걸 납득 시키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신 건가요?”

  원래대로라면 그 정도로 복잡한 가정사는 숨기려고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더군다나 나는 그와 만난지도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이상해?”

  충분히 이상해요.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쁠 것 없잖아. 우리 가족 중에 누가 큰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이혼 한 것이 요즘 세상에 그렇게 큰 터부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그것은 부모들의 사정, 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문제 아니겠어. 오히려 별거 아닌 것 꼭꼭 숨기려고 하면 이상한 쪽으로 어긋날 수 있으니까. 그것도 더군다나......”

  더군다나?

  “앞으로 종종 자주 볼 사람에게는 더욱. 가연이도 아마 이 이야기를 너에게 한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게다.”

  확실히, 생긴 것처럼 평범한 남자가 아니다.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별 다른 목적의식 없이 살아가는 이런 인간이라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나는 어쨌든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그래서 부모가 이혼을 한다던지 사별을 한다던지 하는 것의 고통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으로 다가올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지금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저렇게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
  
  “워3, 형이 가르쳐 준거라고 했죠?”

  “응? 아, 그렇지.”

  “그렇군요.”

  “뭐가 그렇다는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즐겁게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이겠죠.

  재혼을 한 것이 3년 정도 전. 그리고 워크래프트3의 한국 발매 시기는 2002년 7월. 대충 시기가 겹친다. 그때도 폐인이었다고 했죠? 어차피 그런 성장과정을 겪었으면 주변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겠죠. 혼자 놀 거리를 찾아보는 수밖에. 그리고 문가연. 처음 보는 사람, 이제부터 자기가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낯선 사람이 눈앞에 있을 때 그녀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뭔가 말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게임이 그 역할을 해준 것이다. 자신만의 공간 안에 안주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두 사람이 서로의 공간을 공유하게 해주는 계기. 서로 같이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는 무언가. 난 어떻게든 관심이 없는 척 냉정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의식 형과 그런 그에게 머뭇거리면서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중학교 때의 가연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난 의식 형과 달리 이런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데도.

  ‘도저히 못 따라가는 이유가 있었네.’

  모니터를 바라본다. 거기에는 0과 1이라는 숫자로부터 태어난 피조물들이 일하고 싸우며 움직이고 있다. 나에게 이 게임은 어떤 의미일까. 그저 단순히 놀기 위한 도구일 뿐일까?
  쳇, 그래봤자 머리만 아플 뿐이다. 나는 나답게, 단순하게 사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 목표는 확실하게 있지 않은가. vs가연의 승률을 50%로 끌어올리는 것. 자, 연습! 연습이다.

  “이야기가 길었네요. PC방에서 시간은 돈, 슬슬 다시 한 판 붙을까요?”

  “그렇네. 쓸데없는 말이 많아서 분위기가 나빠졌는데 게임은 어차피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니겠어? 자, 덤벼보라고. 실력을 보여 봐!”

  그렇죠. 게임은 즐기라고 있는 것이죠? 그럼, 즐겁게 플레이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겠죠? 나는 힘차게 마우스를 클릭 했고 곧이어 세계의 벽을 느끼며 좌절했다. 젠장. 당신은 연습상대라 하기에는 너무 세다고요.



  “아자! 시험 끝!”

  의식 형은 나와 며칠 정도 계속 같이 연습하다가 WEGL 준비 차 숙소와 같이 온 길드원들과의 연습을 시작했다. 곧이어 리그가 시작되니 더 이상 나와 놀아줄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배틀넷 상에 만나서 한두 판 정도는 상대를 해주었다. 자신의 스타일이 가연의 스타일이니 많이 도움이 될 거라면서. 더불어 나 정도의 휴먼 유저는 찾기 힘들다면서 칭찬을 하기도.(아마 내 단순한 성격이 읽힌 것 같다) 그 외에는 주로 아는 길드원들을 찾아다니거나 배틀넷에 가끔 식 보이는 고렙 들에게 대결 신청하는 식으로 연습을 해왔다. 목적이 있어서 일까. 내가 생각해도 그녀와 만나기 전보다 더 실력이 는 것 같은 자부심이 생겨난다.
  뭐, 그런 자부심을 산산조각 박살내는 인간들도 있기는 했지만. 특히 의식 형과 같이 한국에 온-WEGL에는 나오지 못하지만 대신 한 달 정도 후에 있을 클라임 리그(Climb League)의 예선을 볼 예정으로-Red_Earth[K.D], 로이 앤더슨의 실력은 과연 예전 팀플에서 한 것이 슬슬 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세상에는 정말 저런 놈들이 많은 것이겠지. 하, 새삼 한 숨이 나온다. 이래서야 마치 무슨 격투 만화 같군. 난 열혈 넘치거나 강한 의지로 일어서는 주인공 타입이 아니라고.(아, 아니 벌써 주인공인가)
  어쨌든 그러면서 어느덧 2주라는 세월이 지난 것이다. 그리고 시험 끝. 그런 생활을 하면서 시험은 어떻게 봤냐고 물어보면,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했던가.(이 말 맞나?) 물론 인간이 할 일을 다 한 게 아니라서 하늘이 도와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쓰기는 다 썼으니까 적어도,

  “어, 이게 마지막 시험이었어? 아싸!”

  저러는 녀석보다는 좋게 본 것 같다. 하, 어디 ‘악연으로 맺어진 친구와 헤어지는 방법’ 같은 책은 없나.  

  “아무리 공부를 안 해도 그런 건 계산하고 있어라.”

  “아아, 시험이었지.”
  
  “어이.”

  “야야, 장난이야, 장.난. 아무리 나라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이봐, 자네가 그런 말을 해봤자 솔직히 신빙성이 없거든. 가끔은 자기가 남에게 어떤 이미지로 비쳐지는지 살펴보는 것도 인생 설계에 도움이 될 거라네.

  “그건 그렇고, 이제 뭐 할 거냐?”

  “뭐하긴. 못 다한 승부를 내야지. 훗, 놀라지 마라.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Blue_Sky[K.D], 라이센 신이 내 연습 상대를 해줬다고!”
  
  뭐, 며칠 정도이기는 했지만. 그런데 어째 녀석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그게 누군데?”

  “몰라? 저번 ESWC 준우승자!”

  “몰라. 잘하는 사람인가 보네. 프로게이머야?”
  
  맞다. 녀석은 스타와 MMORPG만 하는 인간이었지. 망할 녀석. 이럴 때는 친구를 생각해서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는 거다.

  “하여간 그러면 이제 자신 있는 거야? 그 여자애를 이기는 거.”

  “......솔직히 아직 없어.”

  “흐음, 정말 잘하긴 잘하는 모양이구나. 요즘처럼 네가 게임에 열중한 것도 오랜만인데도 그 정도라면. 뭐, 어쨌든 그럼 그 여자애와 함께 PC방으로 갈 계획인가. 좋은 시간 보내시게나. 나는 이제 놀러 간다!”

  그러고 보니 가연이와는 PC방에서만 같이 놀았지 학교에서도 제대로 말을 걸어 본 적이 없었군. 그 때 이후로 항상 방과 후에 가면 거기서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항상 그런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녀도 친구들이 있을 때고 시험이 끝났으니 같이 놀러 갈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피곤하기도 할 테니 집에 가서 쉴 수도 있지. 음, 막상 생각해 보니 핸드폰도, 집 전화번호도 모르네.(안다고 걸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끝나고 만나자는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옆반......이지? 한 번 찾아가볼까? 쫌 부끄럽기는 한데......

  “야.”

  응? 너 놀라간다고 하지 않았냐. 혹시 책가방이라도 놓고 간 거야? 그러게 놀러 간다고 정신 쏙 빼놓는 것이 아니다.

  “정신없는 게 누군데?”

  그야 너지. 나는 지금 다른 일로 고민하느라 바쁘니 그만 사라져다오. 그런데 너 살이 많이 빠졌다. 목소리도 가늘어지고, 머리도 기르고......어라, 교복은 또 그게 뭐냐, 마치 여자 교복 같......잖.......아?!

  “문가연?”

  “그럼 누구로 알았냐.”

  아, 놀래라.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이 여자는 부끄럽지도 않나. 의식 씨, 그때만 해도 부끄럼 잘 타는 소극적인 아이였다고요? 혹시 그거 당신 이상형일 뿐 아니야?

  “어째서 여기에?”

  “너 보러.”

  헉.

  “......마침 잘 됐네. 나도 용건이 있었는데.”

  “보나마나 뻔하네요. 시험 끝났으니 워3 한 판 붙자는 거지?”

  “왜? 싫어?”

  “아니,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긴 나와는 달리 열심히 시험을 봤으니 피곤하기도 하겠네. 오늘은 그냥 쉬던가.”

  암암, 나쁜 컨디션의 가연을 이겨봤자 별로 기분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그래. 너야 아무런 생각과 고민 없이 봤겠지만.”

  ......좀 걱정해주면 얌전히 받아들이라고.

  “좋아. 이번 일요일 시간 있어?”

  “일요일이면 내일? 응. 뭐 항상 시간이야 남아돌지.”

  “그래? 그럼 내일 12시에 보자. 장소는 요 앞 공원 분수대 앞. ok?"

  “응......응?”

  “매일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가서 컴퓨터만 하는 것보다는 가끔은 바람 쐬는 것도 좋잖아. 게다가 보고 싶었던 영화가 개봉하기도 하고.”

  “아, 그래.”

  “좋았어. 그럼 내일 봐. 장소 잊지 말고.”

  말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책가방을 돌려 메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교실 밖을 나선다. 저렇게 모범생 생활을 하는 것 아마 꽤나 힘들었겠지. 그렇게 좋아하던 것을 일정 기간이나마 완전히 끊는다는 것은. 어쩌면 나와 같이 모범생이라는 단어와는 안드로메다만큼 먼 인간보다도 저런 모범생들이 시험이 끝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에게 시험은 귀찮고 성적표 나오면 매우 골치 아픈 물건에 불과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일 테니까.
  뭐, 자연 바람 쐬는 것도 나쁘지 않지. PC방에서 게임만 하고 있으면 확실히 건강에도 좋지 않고. 보고 싶다는 영화는 뭘 까나? 요즘 개봉하는 영화를 한 번 살펴봐야겠네. 난 액션이나 스케일 큰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어떨까나. 여자니까 역시 멜로 선호? 아니다, 그녀는 보통 여고생이 아니니 취향도 특이할지 모른다......
  잠, 잠깐. 예감이 이상하다. 이거, 혹시, 설마,
  .
  .
  .
  .
  .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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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19 02:42
수정 아이콘
정말 재밌습니다..........^^;;;;
잘 보고 있구요~ 연재 부탁드려요.. (__)
05/02/19 02:42
수정 아이콘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2화에선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나서 염장이 좀 덜해 덧글을 안달았더니.... 음 이번엔 다시 분위기가 애매하게~
다음글도 빨리 올려주세요^^; (클라임 리그의 압박이;;;;)
아케미
05/02/19 09:07
수정 아이콘
관심 1인분으로 부족할 만큼 재미있습니다. ^^ 열심히 읽고 있어요. 이번 편은 마지막에서 제대로 염장을 지르는데… 다음 편 기대합니다!
05/02/19 13:09
수정 아이콘
데이트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니까 염장성 글은 맞아야됩니다.
~Checky입니다욧~
05/02/19 14:04
수정 아이콘
퍽퍽
Always[Mystyle]
05/02/20 00:26
수정 아이콘
데이트...
데...
이..
트.

(털썩)
LikeCoffee
05/02/20 04:02
수정 아이콘
아하하, 갈수록 흥미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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