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6/05/25 00:21:54
Name Bar Sur
Subject [잡담] 봄 새벽春曉
봄 새벽春曉 / 맹호연孟浩然

봄 잠에 새벽을 느끼지 못하는데
여기저기서 새 소리 들려온다
간밤에 비바람 소리 사나웠으니
꽃은 얼마나 떨어졌는지

春眼不覺曉, 處處聞啼鳥, 夜來風雨聲, 花落知多少.

--

어린 시절, 잠을 자다 급작스럽게 어머니 손길에 깨어났었다. 어머니에게 어디선가 전화가 왔던 것이다. 모자母子는 와뜰한 몰골로 그렇게나 요요寥寥한 새벽녁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어린 나의 손을 꼬옥 붙잡고 그렇게 나를 잦추던 어머니야 말로 온몸의 긴장을 감추지 못하셨다.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날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봄날의 새벽녁로 기억한다. 나는 그날 전까지는 비오는 날 새벽의 경찰서가 그렇게 문전성시를 이루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제법 큰 경찰서 넓은 복도, 외따로 떨어진 의자에 앉아, 비장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간 어머니를 그저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쪽의 소음들이 귀를 찌르는 것처럼, 불길한 새소리처럼 들려왔다. 정말로 여기저기서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이. 나는 그 자리에서 멍멍하게 아주 긴 여운처럼 그렇게 새벽 한 가운데 있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을 걸어갈 때는 두 사람이었고, 거진 갓밝이 즈음에 돌아 올때는 세 사람이었다. 우리는 말이 없었고, 어린 시절의 나는 그것이 그렇게 군시러울 수가 없었다. 가족家族이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환하게 날이 밝아온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새벽만이 그렇게 홀로 남겨진 것이다. 당시의 내가 새벽을 느낀다는 것은 그런 식으로 일상과는 분절된 사건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궁금했었다. 도대체 왜 구(區)가 다른, 그 멀리의 경찰서까지 가야만 했던 어머니는 그 어린 나를 일부러 흔들어 깨워 데리고 가야했을까. 새벽의 집 안에는 누나 혼자만을 남겨둔채. 허나 어머니라고 어찌 두렵지 않았을까. 여자 혼자 몸으로 그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단신으로, 비를 맞으며 그 먼 거리를 가야하는 것이, 그 불길한 새 울음 소리로 시끄러운 경찰서를 찾는 일에 어찌 그저 대범하게만 대처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 이 시를 보니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간밤에 비바람 소리 사나웠으니(夜來風雨聲)
꽃은 얼마나 떨어졌는지(花落知多少)

비바람 부는 새벽에 꽃이 지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 떨어진 꽃잎을 걱정하는 마음이란 과연 어떤 것이겠는가.


* 천마도사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5-27 21:0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항즐이
06/05/25 04:40
수정 아이콘
봄 새벽. 잠들기 전에
잔잔히 웃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06/05/25 04:50
수정 아이콘
바숴님 블로그에서 보고 여기서 또 보네요~
읽을수록 글의 분위기가 더 와닿는 느낌이에요 :)
06/05/25 10:14
수정 아이콘
늦은 밤이나 새벽에 받는 전화. 소식. 좋은 기억들만은 아닌데..
이 글에서는 따스함이 느껴지네요.^^
My name is J
06/05/25 11:02
수정 아이콘
왜 나만 우울한거죠...ㅠ.ㅠ
천마도사
06/05/25 19:23
수정 아이콘
글이 살아서 움직이는듯 합니다...
Nada-inPQ
06/05/26 08:03
수정 아이콘
역시 문재文才가 없나봅니다, 저는...

모르겠어요~~
박기용
06/05/29 06:45
수정 아이콘
마치 국어책에 있는 수필의 한 부분을 옮겨 놓은 것 같네요. 슬픈 일인것 같지만 왠지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774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67편(BGM) [39] unipolar6356 06/06/15 6356
773 더 파이팅 pgr 버전 [51] 겜방사장11282 06/06/21 11282
772 [sylent의 B급칼럼] 한동욱의 ‘테란 살리기’ [24] sylent9573 06/06/17 9573
771 나의 영웅들, 나의 테란들. [45] 시퐁8888 06/06/17 8888
770 박용욱의 수비형? [27] 김연우9250 06/06/16 9250
769 월드컵 이모저모 - 프랑크푸르트(1) [23] 종합백과8141 06/06/12 8141
768 옵저버를 한다는 것... [33] 쿠엘세라9875 06/06/09 9875
767 [특별기획] 2006 독일 월드컵 F-H조 최종전망 및 Q&A [18] hobchins7141 06/06/04 7141
766 [특별기획] 2006 독일 월드컵 A-E조 최종전망 [13] hobchins6602 06/05/30 6602
765 맵에서의 저지선, 그리고 백두대간 [48] 김연우8617 06/06/06 8617
764 저에겐 그랬습니다. [15] 가루비7668 06/06/04 7668
763 [잡설]난데없이 클래식과 저그의 만남;;; [20] AhnGoon6853 06/06/01 6853
762 [픽션] 직장선배 스타 가르쳐주기 [13] Lunatic Love6601 06/05/31 6601
761 타국에 잊혀진 고려의 금관 [14] 용용7212 06/05/30 7212
760 PGR유머와 그 대처법 [35] SEIJI9554 06/05/31 9554
759 프로게이머들의 월드컵 시청 방법 [26] SEIJI11968 06/05/30 11968
758 세중게임월드는, 여러분들에게, 어떤 곳입니까? [34] 쿠엘세라8558 06/05/28 8558
757 [잡담] 봄 새벽春曉 [7] Bar Sur5888 06/05/25 5888
756 진 삼국무쌍 + 프로게이머 합성입니다. [16] 악동이™10275 06/05/25 10275
755 개인적으로 뽑아본 스타크래프트 최고의 '어휘'들 [63] 볼텍스10779 06/05/24 10779
754 [연재]Daydreamer - 7. The Benissant [3] kama4519 06/05/24 4519
753 [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66편(BGM) [31] unipolar6516 06/05/19 6516
752 YANG..의 맵 시리즈 (8) - Cross Over [11] Yang6081 06/05/19 608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