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역사는 1896년 일본인에 의해 인천에 미두취인소가 세워지면서 시작됩니다. 미두취인소는 일제가 우리나라의 쌀값 안정과 품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목으로 설립했지만, 실제로는 쌀 수탈을 위한 합법적 통로 역할을 했죠.
1910년 한일합병이후 조선의 미곡과 대두의 수출이 급증하자 거래량도 늘면서 인천미두취인소는 조선과 일본을 통틀어 도쿄와 오사카 다음가는 미두거래시장으로 컸어요.
미두취인소의 특징은 쌀과 돈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반대매매로 차익을 실현하는 청산거래 방식이라는 점이었는데요. 증거금은 거래금의 10%만 있으면 돼 투기가 쉽게 일어났죠.
게다가 세계 1차대전 전쟁특수로 축적된 일본의 잉여자본이 인천미두취인소에까지 들어와 쌀값이 폭등했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8년에는 국내에서 스페인독감으로 14만 명이 사망했죠. 이에 일제 항거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고, 경성 시내 전차 파업 등이 일어났고, 3.1운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죠. 3.1운동으로 인해 1919년 3~4월 인천미두취인소는 일시 폐장을 하게 돼요.
2. 천억을 번 1910년대 전설의 투자자 '반복창'
1910~20년대에도 투자로 부자가 된 한국인이 있었는데요. 바로 반복창이라는 사람이죠. 그는 인천에서 가장 큰 정미소인 역무정미소에서 일을 했어요.
당시 정미소는 쌀 투기를 했었는데요. 당일 최종시세는 오사카에 있는 당도취인소에서결정되는 가격을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오사카 시세를 누가 먼저 아느냐에 따라 이익과 손실이 결정되었죠. 반복창의 역할은 바로 이 정보를 전보로 받아 사장에게 전달하는 일이었어요.
이후 반복창은 중개점에서 일했었는데요. 그가 조언하는 데로 투자한 사람들의 수익이 높아 인기가 높아졌죠. 이윽고 그는 직접 쌀 거래에 참여해 큰 수익을 올렸고, 1920년 80만 원(현재 가치로 천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을 모았어요.
그가 시장의 큰손이 된 것을 못마땅해하던 일본인들은 그를 몰락시킬 기회를 엿봤는데요. 반복창이 쌀을 대량매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인들이 담합해서 반복창과 반대로 매도를 시작했죠. 마침 일본의 벼농사가 풍작이라 조선에서 쌀수입을 중단한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었지만, 반복창은 그 정보를 알지 못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반복창은 전 재산으로 매수했는데, 결국 쌀 시세는 급락해 반복창은 전 재산을 날렸죠. 끝내 재기에 실패한 그는 1938년 세상을 떴고, 그 해 미두시장도 사라졌어요.
3. 충무로 분점에서 시작된 주식 거래
한국최초의 주식회사인 일제강점기 조선은행 ⓒ조종안
인천미두취인소는 미곡과 대두를 거래하는 선물 거래소였고, 주식 거래는 1908년 다나카라는 일본 상인이 충무로에 '유가증권 현물 문옥'을 세우면서 시작돼요. 이곳은 오사카 증권시장의 서울 지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본 자본이 국내로 대거 들어오고, 일본주식을 현금으로 환전하기 위한 수요를 파악하고 설립한 것이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주식회사가 급증하였고, 이에 따라 '유가증권 현물문옥'도 크게 늘어 1911년에는 '경성 유가증권 현물문옥 조합'이 결성되었어요. 이때부터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주식거래가 이루어졌죠. 시세는 오사카거래소를 기준으로 삼았고, 처음으로 주식시세표를 작성해 배포했어요.
3.1 운동 후 일제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하는데요. 이 과정에서 1920년 '경성유가증권현물문옥조합'은 공식허가된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으로 대체되었죠.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에는 일본의 인기주와 국내회사 30여 개 종목이 상장되어 있었어요.
193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법적 근거를 갖는 증권거래소인 조선취인소가 개설되어 인천미두취인소는 문을 닫게 돼요.
4. 6.25와 함께 요동치는 국채와 지가증권
지가증권 ⓒ 여주시
해방 후 미군정을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국가 경영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건국국채를 발행했어요. 동시에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실시하는데요. 소작인에게는 농지를 주고, 지주에게는 토지보상금으로 지가증권을 주었죠. 하지만 건국국채를 발행한 지 5개월, 농지개혁법이 시행된 지 3개월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어요.
당장 내일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쟁통에 채권은 액면가의 10%까지 떨어졌고, 일부에서는 벽지나 창호지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국채를 반강제적으로 팔았는데요. 무역업체들이 수출입 통관을 할 때 일정량의 국채를 의무적으로 사도록 했어요. 지가증권도 당장의 생계가 급한 지주들에 의해 헐값에 팔렸고, 가격은 폭락했죠.
전쟁이 끝날 무렵 지가증권은 일본인 귀속재산 매각대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가격이 4~5배로 폭등했는데요. 이때 지가증권으로 일본인 재산을 사들인 기업 중에는 SK, 두산, 한화가 있죠.
국채도 전쟁이 끝나고 정부에서 액면가 그대로 정부 기관 입찰 보증금이나 통관 보증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자 가격이 상승하고 거래량도 많아졌어요.
5. 국채 변동성이 250%..?건국국채 ⓒ 대한민국 역사박물관1957년 정부는 국회에 180억 환 규모의 국채 계획과 예상 세수익이 153억 환에 이르는 외환특별세 법안을 제출했어요.
시장에서는 두 법안 모두 정부 세수입을 늘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둘 중 하나만 통과하리라 예측했는데요. 외환특별세법만 통과할거라 예측한 사람은 국채를 매수했고, 국채 발행만 통과할거라 예측한 사람은 국채를 매도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1957년 12월 국회에서 국채삭감안을 발표했고, 국채 가격이 250% 급등했어요. 그런데 12월 말에 국채발행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국채가격은 50% 가까이 폭락했죠. 폭락에 당황한 매수측은 하락세를 멈추려고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대량으로 매수해 가격을 밀어 올렸어요. 이 과정에서 매도측과 매수측 모두 청산 자금과 매매증거금 납부로 심한 어려움을 겪었죠.
결국 거래소는 17일 오전장을 중단하고 16일 건옥(매매하기로 약속은 되어 있으나 결제는 되지 않은 증권)에 대해 약정대금의 50%에 해당하는 매매 증거금을 납입하도록 조치했어요. 그러나 대부분의 증권회사가 추가증거금을 납부하지 못했죠.
이렇게 되자 결국 정부는 1월 16일에 거래된 국채 매매분을 전부 무효화시켰어요. 매수 세력을 주도했던 4개 증권회사에 대해 증권업 면허를 취소하고, 거래소에도 책임을 물어 초대 이사장이 물러나고 전체 임원이 경질되었죠.
<참고문헌>
윤재수. (2021). 돈이 보이는 주식의 역사. 길벗.
황은주. (연도미상). 국가기록원. 개장에서 전면개방까지, 선직국 대열에 오르다. URL :
https://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stockMarket.do임경오. (2005). 한국증시 110년 그 파동의 역사. 프라임경제 URL :
http://www.newsprime.co.kr/news/article/?no=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