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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6/12/29 21:05:37
Name 신불해
Subject 임칙서, 그리고 신사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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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sea Ballou Morse의 The International Relationships of the Chinese Empire에 따르면, 1800년 경 중국으로 운반된 아편은 4570 상자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 274톤 분량이고, 분명 막대한 분량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편이라는 이 위험한 물건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많아 지기만 했습니다. 1816년에는 32톤이 증가했고, 1824년에는 973만 달러의 아편이 수입되었으며, 1830년에는 1374만 달러의 아편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1838년에는 4만 상자가 넘는 아편이 중국으로 계속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 아편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청나라 황제 도광제에게 올려온 상소가 황작자(黃爵滋)의 글입니다. 황직자는 선남시사(宣南詩社)라는 친목 모임의 회원이었는데, 이 단체에는 청나라 역사에 길이남는 대시인 공자진(龔自珍), 그리고 임칙서(林則徐) 등이 있었습니다. 황작자는 적극적인 대책을 주장하며, 아편문제를 완전히 해결시킬 수 있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이 제안의 핵심은 아편을 피우는 자에게 1년의 재활 기간을 주고, 그 후에도 아편을 피우면 중형으로 처벌하자는 것입니다. 항구를 단속한다 해도 1만리가 넘는 중국의 해안선을 모조리 봉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아편은 이미 금제품이므로, 단순히 통상을 금지한다 하더라도 불법적인 경로로 아편이 들어올 것은 뻔한 일입니다. 


왜 중국의 은이 유출되는가? 아편을 사기 때문입니다. 


왜 아편을 사는가? 피우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피우는 사람이 없어지면 아편을 사는 사람도 없고, 아편을 사는 사람이 없어지면 중국의 은이 유출될 일도 없습니다. 간단한 이야기지만, 핵심이었습니다.



도광제는 이제 황작자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적임자를 물색했습니다. 그렇게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임칙서'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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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는 오랜 지방 근무 생활로 실적이 있었고, 실무에도 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임칙서는 황작자의 의견에 대해, 좀 더 세밀한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단순히 1년간의 유예 기간을 주는것이 아닌, 1년을 4기로 나누어서 감독을 하고, 아편을 피우는 자, 아편굴을 여는 자, 아편을 판매하는 자, 도구를 제조하는 자까지 모두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더 이상 꾸물대며 이를 방관한다면, 수십 년이 지난 중원에서는 적을 막아야할 병사도 없을 것입니다! 또는 군비를 채워 줄 은도 없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실로 두려워 온몸이 떨릴 뿐입니다."



1838년 음력 11월 11일, 임칙서는 도광제의 명령에 따라 무창에서 상경하여 베이징에 도착했고, 건청궁에서 황제를 만나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1시간 동안 황제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틀 정도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고, 15일에 임칙서는 정식으로 황제의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한, 광동으로 떠나 사건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도광제는 광동성의 해군까지 임칙서의 지휘 아래 있게 하였습니다. 


흠차대신 임칙서는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 준비를 위해 7일동안 베이징에 머물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선남시사의 동호인들도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시인 공자진은 자신 역시 임칙서를 따라가 그를 도와주겠다고 하였지만, 임칙서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임칙서 자신의 문집에서는 


"실로 말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 


고 짤막하게 남겼을 뿐입니다. 임칙서는 글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구두로서 그 이유를 설명하게 했습니다. 


황제의 신임을 얻은 임칙서이지만, 현실적으로 보아 아편은 이미 중국의 골수를 병들게 하였고, 광동의 관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서로 뇌물을 듬뿍 먹어가며 아편 밀수에 눈을 감아버리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밀수꾼을 잡을때도, 뇌물을 바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고의 의미를 주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베이징에서조차도 아편이 성행하여, 황족 중에서도 중독자가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아편에 취해 혼탁해져있었습니다. 아편을 금지하려는 생각을 광동의 관리들이 달갑게 여길리 만무합니다. 초강경한 조치에 대해 반발하는 보수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임칙서에 대한 총애를 고깝게 여기는 존재들도 있었습니다. 


중앙에도, 현지에도 모두가 적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실패한다면, 임칙서 본인에게도 재앙이 닥칠 것은 자명했고, 따라서 그가 친구들을 위험에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임칙서는 베이징을 떠나기 전에 동지를 만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생(死生)은 운명에 달려 있고, 성패(成敗)는 하늘에 달려 있다."



임칙서는 그런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무너져가고 세상이 변하는 회색빛 시대, 임칙서는 그 시대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결연한 마음을 먹고 남으로 내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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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서 아편이라는 악마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벌어지고 이에 대안 대책으로 임칙서가 선임될 무렵, 중국을 향한 영국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청은 당시 광저우만을 외국 무역의 창구로 삼고, 외국의 거주를 제한했습니다. 광저우의 무역에 대해서는 따로 국적의 제한은 없었는데, 대다수는 영국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여기에 미국 상인들이 도전하는 형태였습니다. 영국 상인들의 주된 움직임은 물론 동인도 회사의 손에 이루어졌고, 그 동인도 회사의 뒤에는 대영제국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19기 초 무렵, 상황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광저우에 선하(船荷) 감독 및 사무원 20명, 의사 2명, 목사 2명을 상주시켰고, 이는 셀럭트 코미티(Select Committee)라고 불렸습니다. 


고대로부터 강력한 중화 제국이 외국에 대한 교역을 벌일때, 이는 오직 단 한가지의 형태 밖에 없습니다. 중국이 다른 나라와 외교를 맺는 형태는, 정말 드문 몇가지의 이변을 제외하면 오직 조공 밖에 없었고, 모든 공식적인 무역은 조공 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위 '오랑캐' 가 중국에 물품을 가지고 오면,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황제가 "은혜"를 하사하거나, 혹은 장사를 할 수 있게 정해 놓은 구역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물품을 팔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예컨대, 광저우의 무역 창고가 가지는 근본적인 개념은 명나라 같은 나라가 북방 유목민을 상대로 국경에서 마시장을 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무역의 과정에서 청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조치를 취해 통보할 경우, 영국은 이를 그대로 따라야만 했습니다. 아편 무역은 대단한 규모의 '사업' 이었지만, 그 기반 자체는 상당히 불안했던 셈입니다.


이를테면, 1821년 12월, 영국 군함인 토페즈 호의 승무원들이 중국인과 난투를 벌이다가 2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영국 수병은 14명이 다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살인사건에 대해 양광 총독은 범인 인도를 요구했고, 동인도 회사는 자신들은 영국 해군의 군함을 감독하는 권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양광 총독은 곧바로 무역을 중지시켜버렸습니다. 국가간의 무역이, 중앙 정부도 아닌 지방 총독의 견해로 중지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동인도 회사는 무역을 하지 않게 되면, 그 주변에 붙은 중국 상인들도 타격을 입을 것이고, 이는 중국 조정을 흔들 수 있는 무기라고 판단하여 자신들도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양광 총독은 되려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천조는 고작 세은 따위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무역의 기반이 불안정한 원인은 양국의 위치가 불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국은 이전부터 매카트니 등의 사절을 보내 이러한 조공 무역 체제를 정부간의 대등한 통상관계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런 시도를 하려온 사절들 조차 모두 청나라는 조공을 하러온 사절사로 기록했습니다. 애시당초 그 밖의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영국은 동인도 회사 대신 개인 무역의 흐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동인도회사가 있던 시절, 이를 관리하던 회사의 선하 감독은 대반(大班)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대반은 철수 하면서 영국 정부 차원의 대표가 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그 정부의 대표는 이목(夷目)이라고 불리었는데, 영국의 체제와 동인도 회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청나라 입장에선, 왜 대반이 가고 이목이 오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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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부임한 그 '이목'은, 윌리엄 네이피어(William John Napier)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인물은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이전까지, 동인도회사의 대반들은 먼저 마카오에 들린 뒤, 광저우행 허가증을 얻은 뒤에야 광저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네이피어는 마카오에 내리기는 했지만, 출입증을 신청하지 않고 바로 광저우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외무부장관의 지시를 따라 자신의 도착을 양광 총독에게 전하려 했습니다. 한문에 능통했던 인물인 로버트 모리슨이라는 인물이 네이피어가 도착했다는 보고서를 쓰고, 서기관이었던 에스텔이라는 인물이 이를 전하려 했습니다. 네이피어는 외국인에게 허가된 성 밖의 거주지에 들어갔습니다. 총독은 성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규정상 외국인은 허가 없이 성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에스텔은 출입이 막혔고, 대신 편지를 사람에게 보내 전하려고 했지만, 이를 받는것도 규정 위반이라 아무도 상대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양광 총독은 노곤(盧坤)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네이피어가 기존의 '대반' 대신 광저우에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는 보고 받았습니다. 또, 그가 마카오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들어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지금까지 교역 문제에 있어서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대신 허가받은 중국인 상인 ─ 즉 공행(公行) ─ 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노곤이 생각하기에 상대가 회사에서 나라로 바뀌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사정일 뿐이었고, 굳이 청나라가 이에 맞추어줄 필요는 없어보였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허가도 받지 않고 왔습니다.


다만, 노곤은 분쟁이 일어나는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네이피어 출입 허가증도 없이 밀고 들어온 사실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기로 관대하게 결정합니다. 네이피어의 불법적 행위는 눈감아 줄테니, 얌전히 마카오로 떠나면 추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네이피어가 광저우로 돌아오고 싶다면, 그곳에서 다시 출입 허가증을 받고 다시 오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이피어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총독을 기어코 만나려는 네이피어. 그전까지의 관례를 따라, 이를 응하지 않으려는 양광 총독. 그 사이에 곤란해진것은 공행, 즉 허가받은 중국인 상인들이었습니다. 공행의 대표였던 오소영은 네이피어에게 지금까지의 "관례"를 따르면 문제가 생길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지만, 네이피어는 이 역시 따르지 않았습니다. 


장사를 하려면, 이 네이피어라는 외국인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간 장사를 위해 외국인을 감싼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소영은 이에 결심을 하여, 공행은 자발적으로 영국과 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를 줄이려면 네이피어가 뜻을 꺾은 뒤, 공행을 만나 설득을 해야 하겠지만, 네이피어는 '자신은 정부 관리이므로, 민간인인 공행 대표와 만날 수는 없다' 고 거부했습니다. 그는 오직 관 대 관의 대등한 관계만을 요구했고,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공행 측에서 필사적으로 로비를 벌인 끝에 어찌어찌 부지사 급의 청국 관리와 네이피어의 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본래 청나라 정부는 관리가 외국인과 접촉하는 일을 엄금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대략 '외국인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회담' 자리를 만드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고 나자, 별다른 말이 나오기도 전에 네이피어는 회담을 캔슬시켜 버렸습니다. 조사의 형식이므로 청나라 관리가 상좌에 앉게 되지만, 네이피어는 이는 용인할 수 없다면서 거절해버린 겁니다. 이 시점에서 벌써 그는 정부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 나라를 무력으로 압박하는 것이, 말로써 담판 짓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건 영국의 입장입니다. 청나라 쪽의 입장에선 그전까지의 관례가 있는데, '이목이 온다.' 라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상대방이, 허가도 받지 않고 다짜고짜 밀어부치다가 일이 통하지 않자 성질을 부린다고 밖에 여길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네이피어는 강경파였고, 상황을 어색하게 지켜보고 있는 영국 상인들에게 단결하여 대항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지인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견해를 중국어로 번역해 사방에 배포했습니다.


"……대영 무역으로 생계를 꾸리는 수천 명의 중국인은, 물정 모르는 완고한 정부 때문에 파탄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 영국 상인은 호해 평등의 원칙 아래 청국 전체와 거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영국 상인은 영국과 청국, 양국이 평등함을 인정받을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총독은 곧 공행의 정신 나간 결심(무역 중단)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주강(珠江)의 흐름을 막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정부의 허가없이 민간인이 함부로 포고문을 뿌리고 다니는것은 내란의 문제가 있어 당시 청나라에서는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상대가 외국인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노곤은 그전까지는 온건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에 이르자 격분하여 모든 무역을 전부 중지시켜버렸습니다. 이 직전에 앞서 말한대로 공행 대표 오소영이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한 적은 있지만 이는 상인들의 자발적인 결정이었고, 노곤의 결정은 공식적인 정부의 명령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통역, 중개업자, 요리사, 잡역부 등 모든 중국인이 퇴거하였고, 영국 상관에 식료품을 제공하는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자 네이피어는 네이피어 대로, 호문 밖에 있던 안드로마케호, 이모젠호 두 개의 영국 군함에게 당장 광저우로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사태가 순식간에 무력 충돌의 여지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네이피어는 분명한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나는 영국 황제의 이름으로, 총독과 순무가 선언한 전대미문의 포악하고 부당한 행위에 항의한다. 그 권력 남용에 대해 항의한다. 나는 귀하(상업회의소 소장)가 그들(공행)에게 영국 황제가 위대한 군주이고, 청국보다 더 넒고 강한 세계 영토를 통치하고 있으며, 가는 곳마다 정복하지 못하는 곳이 없는 용감한 군대를 이끌고 있고, 청나라의 백성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바다 위를 조용히 항해하는, 120문이나 되는 대포를 갖춘 큰 배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도록 요구한다…… 이 서신에 서술된 사실에 따라, 답변이 15일 월요일까지 도착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온 거리에 널리 알리고, 그 사본을 사람들에게 배포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중 한장은 틀림없이 베이징에 있는 황제의 면전에 다다를 것이다."


네이피어가 전함과 영국의 국토를 말하는 부분에서 보면, 애시당초 그가 사태를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 그다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이피어의 협박에 대해, 양광총독 노곤은 조곤조곤 이에 대한 반박을 했습니다. 물론, 이 역시 관 대 관의 형식이 아닌, '노곤이 공행에 통보하고 공행이 네이피어에게 알리는' 형식을 집요하게 지키면서 말입니다.


"……영국이 바란다면, 물론 동인도회사의 대반 대신, 국가 관리, 즉 이목을 파견하는 것은 그 쪽의 자유 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청국이 공향을 통해서만 이인과 접촉하는 옛 제도를 지속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 아닙니까?"


"(예로부터)예방이나 조공을 위해 건너 온 사절을 제외하고, 우리나라는 외국과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영국 정부는 네이피어의 임명에 대하여, 사전에 아무런 정식 통고를 보내지 않았으며, 그 자신(네이피어) 역시 아무런 신임장도 지참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문제에 대하여, 총독이 베이징에 훈령을 구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당신들은 청국의 법률을 어기고, 상관 안으로 병사와 무기를 들이고 포대에 포격을 가하고, 막무가내로 내하에 쳐들어 왔습니다……"


여기까지가 네이피어의 주장들에 대한 노곤의 반박이었고, 그 개별적인 이야기들 역시 모두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목이 온다는 사실 역시 동인도회사의 대반이 떠나면서 알린 사실이지, 영국 정부 차원에서 알린 적이 없습니다. 네이피어는 마카오에서 출입증도 받지 않고 광저우로 왔고, 중국이 이전까지 다른 절차로 외국과 관계를 맺은 적이 없던 일도 분명한 사실이었으며, 그는 노곤이나, 더 나아가 청나라에 시간 조차 주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일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은 동인도회사가 사라진 후라 자본력이 약한 영국의 군소 무역업자들이 광저우에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역이 재개되지 않고 이렇게 분쟁이 길어질 시, 모두 파산을 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 네이피어가 아무리 힘내라고 독려하며 뭉치라고 권고해도 반응이 미적지근했습니다. 네이피어 한 사람만 돌아가면,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이전처럼 일이 재개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자, 네이피어 역시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 마침,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있어 더 이상 나돌아 다니기도 힘들었습니다.


네이피어는 두 척의 군함에게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은 청나라 보낸 배를 타고 광저우를 떠났습니다. 마카오에 도착한 그를 포르투갈 당국이 힘써 돌봐주었고,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교회의 종소리마저 금지했을 만큼 신경을 써주었지만 한달 쯤 지나 10월 11일, 그는 사망했습니다. 


네이피어는 광저루를 떠나면서 제류하고 있는 영국인에게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청나라 군대의 압박과, 영국 상인에게 가해진 모욕 때문에 지금 이 땅을 물러난다. 총독의 조치는 청나라와 황제와 똑같이 신성한 영국 황제의 위엄을 손상시켰다. 지금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용감한 행동을 해도 좋다. 언젠가 영국 황제가 총독을 벌하는 날이 올 것이다."


노곤이 보았다면, '적반하장' 이라고 분개했을 내용이지만, 그 내용은 섬뜻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튼 도광제는 사건이 마무리 되고 나서, 자신의 상유를 반포했습니다. 외국인이 관례를 모른다는 사실을 굳이 크게 질책할 필요는 없으며, 이를 엄벌할 생각도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굳이 국가 남쪽의 '작은 일' 을 크게 만들어 요란하게 구는것도, 제국의 체면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도광제의 심기를 거느린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보았는데, 각 포대는 허수아비인가? 두 척의 외국 군함을 격퇴하지 못했다니 웃어야 할지, 한탄해야 할지. 무장의 해이함이 한결같으니, 외국인이 무시하는 것도 괴이쩍게 여길 일은 아니다."



도광제가 더 신경을 쓴 부분은 두 척의 소형 구축함이 호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데, 각 포대가 전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항해시대를 거친 전함에 대한 오랜 경험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발달 된 기술 등으로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전함은 대단한 전력이 된 반면에, 청나라는 기술 수준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군대의 질이 형편없어진지 오래였으며, 지휘관들 역시 무능해진 아편 중독자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도광제가 이 문제에 집중한 것은 사태를 직시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임칙서가 부임하기 5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도광 19년, 곧 1839년 1월 25일. 임칙서는 문제의 도시,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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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는 광저우에 도달하기 직전 미리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편 밀수꾼 60여명을 체포하라고 말입니다. 아마도 광저우에서는 아편에 대한 일이 공공연한 비밀이라, 관련자들의 명단이 있어 체포의 의지만 있다면 바로 잡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하간에, 도착하기전부터 60여명을 잡은 임칙서는 광저우에 도착하고나서 9일이 지나자, 공행에 두 개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공행의 대표는 여전히 오소영이었습니다.


당시 60여명을 잡아넣은 일때문에 임칙서에 대한 두려움의 분위기가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공행에 임칙서의 편지가 도착한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본 오소영은 경악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인들에게서 "앞으로는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으며, 만약 들여온 사람은 사형을 당하고 화물은 모조리 몰수된다." 라는 서약서를 한문과 외국어로 한 통씩 받아내어라. 이번에 서약서를 받아 내지 못한다면, 너희들이 평소 간사한 오랑캐와 결탁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가져, 바깥으로 눈을 돌렸음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본 대신은 즉시 왕명을 받들어 너희들을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사실상 아편 무역을 종결시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공행에 도착한 임칙서의 편지는 한 통 더 있었습니다. 이 편지의 수신인은 광저우의 외국인 상인들이었습니다. 외국인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것이 청조의 관례라 공행에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 황제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보아, 평등하게 사랑하시어 너희들에게 무역을 허락하고, 너희들은 그것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 너희들은 은혜를 알고 법을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해 남을 해하여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너희들 나라에서조차 피우지 않는 아편을 우리나라로 들여와, 사람의 재물을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가? 너희들이 이것으로 중화의 백성을 현혹한 지 이미 수십 년에 이른다.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을 해하릴 수가 없다. 백성이 하나같이 분개하고 있으며, 하늘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아편무역의 비인도성을 질책하는 말입니다. 동시에 임칙서는 황제 자신의 결단으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 피우는 장소를 제공하는 사람, 아편을 파는 사람을 모두 죽일 것이며, 보유하고 있는 아편은 모두 관에 제출하고, 아편 무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임칙서가 내건 기한은 3월 21일까지 였습니다. 영국 측은 어물거리다가, 기한을 넘겨 3월 22일에 아편 1037상자를 공출 하겠다고 했습니다. 영국인들이 이것이 일종의 요식행위이고, 아편의 일부만 바치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이미 영국 배에 아편이 2만 상자가 넘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인들의 제안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직 영국인들은 서약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제시한 기한이 지난 상황에서, 영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자 임칙서는 상대의 태도가 불량하다고 여겨 아편무역상인 덴트 상회의 주인 덴트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했습니다. 체포의 형식은 '초대' 였는데, 영국 측은 이런 분위기에서의 '초대' 가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고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청나라 영토 안에서 청나라 법률을 따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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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





당시 영국의 무역 감독관이었던 찰스 엘리엇은 38세의 해군 대령이었고, 그 역시 네이피어 못지 않은 강경주의자였습니다. 일단 감독관인 그에게는 거류민을 보호할 책임도 있어서, 덴트를 잡아간다는 이야기를 듣자 공행에 자신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나는 덴트 씨를 성 안으로 보내는 데 동의한다. 다만, 영국 무역 감독관인 나도 동행할 것, 또한 흠차대신(임칙서)이 날인한 명백한 문서에 의해, 두 사람이 잠시도 격리당하는 일이 없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엘리엇의 주장에는 사실 교묘한 계획이 있었습니다. 일단 덴트를 보호하는 일은 둘째치고, 만약 이 주장대로 된다면 그는 영국 관리로서 최초로 광저우성 안으로 들어가 청국의 관헌가 직접 접촉할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네이피어가 그렇게 난리를 치고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이미 그들이 기한을 넘겼기 때문에 모든 외국인을 추방하라고 공행에 편지를 다시 전했습니다. 당시 외국인은 청나라 영내에서 부동산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13행가라는 곳에서 주인이 중국인인 사무실 등에 묶고 있었습니다. 그 중국인들은 대부분 공행이었으므로, 공행 더러 집에서 영국인들을 내쫒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엇이 순순히 나가주진 않았습니다. 


그러자, 임칙서는 자신이 공연한 위협만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병사 1천여명을 동원하여 13행가를 포위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는 모두 275명의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엘리엇이 '농성' 할 태세를 보이는 사이, 임칙서는 그들이 머무는 건물에 자신의 주장을 적었습니다.


"첫째, 천리(天理)를 논해 보자."


"집을 떠나 와 수만리, 그 사이는 망망한 대해다. 거기에는 무서운 번개와 사나운 바람에 의한 재앙이 있는가 하면, 상어와 고래에 의한 횡액도 있다. 천벌은 무서워해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 대황제의 위엄은 하늘과 같으며, 지금 그 뜻이 아편을 근절하고자 한다. 즉, 하늘의 뜻이 아편을 근절하려는 것이다. 하늘이 꺼리는 바, 누가 감히 이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일찍이 영국의 대반 로버트가 마카오를 점령하려다(1809년) 마카오에서 죽었다. 도광 14년(1834년)에는 네이피어가 호문을 넘었으나, 귀국해 근심 속에서 죽었다. 그때 암약한 모리슨도 같은 해 죽었다. 아편 상인 매니액은 자살했다. 천조의 뜻을 어김은 이와 같이 무서운 법이다."


"둘째, 국법으로 논해보자."

"우리 대황제는 아편을 몹시 증오하여, 이를 근절하고자 하신다. 앞으로 내국 백성으로서 아편을 판매하는 자뿐만 아니라 흡음하는 자까지 사형에 처해진다. 대청률례에는 외국인이 죄를 범하면 율령에 따라 단죄한다, 라고 되어 있다. 아편을 팔아 재물을 모으고 남의 목숨을 해친다면, 그 폐해는 한 사람, 한 집안에 그치지 않는다. 이 죄, 죽어야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 깊이 생각해 보라."


"셋째, 인정으로 논해 보자."


"너희들은 광도에 와서 통상을 하고 그 이익은 세 배에 이른다. 아편을 팔지 않아도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아편 때문에 무역이 정지된다면, 너희들은 생계를 꾸릴 방도가 사라진다. 너희들 나라에서는 찻잎, 대황은 물론이요, 명주, 백당, 빙당, 계피, 은주, 백반, 장뇌 같은 것이 없어도 살 수 있는가? 반대로 중원은 물산이 풍부하여 외국의 화물을 구태여 구하지 않는다."


"넷째, 일의 추세로 논해 보자."


"너희들은 멀리 대양을 건너 이곳에 와서 무역을 경영하므로, 주민과 화목을 도모하고 분수에 맞게 몸을 지키고 해를 주지 않고 이익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너희들이 아편을 팔기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 불평의 소리가 높다. 백성의 분노 거역하기 어려우니 깊이 우려할 일이다. 해외에 나와 사람이 기댈 곳은 오직 신의뿐이지 않는가. 현재 우리 관리들이 너희들에게 신의를 보이고 있는데도 너희들은 조금도 신의가 없다.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조금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아편은 너희들 나라에서는 흡음하지 않으므로, 싣고 돌아가지도 못할 것이다. 만약 공출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두어다 어디에 쓸 것인가? 공출하면 그 뒤에 무역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거리낌 없이 권하건대, 화와 복, 영과 욕, 그 어느쪽을 취할지 스스로 선택하라."


'팔지 말아야 할 것을 팔지 못하게 하는 것'
 이므로, 조금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편이 독극물이라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편을 팔러 온 자들입니다. 이런 식의 논리가 먹힐 대상들은 애시당초 아니었습니다.


엘리엇은 꼬박 이틀을 버텼지만, 48시간이 지나자 결국 굴복했습니다. 논리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물과 식량이 떨어졌고, 275명이 굶어죽게 만들 권리가 엘리엇에게는 없었습니다. 엘리엇은 울며 겨자먹기로 20284상자의 아편을 임칙서에게 모두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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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칙서는 이 막대한 아편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호문의 광장에 튼튼한 목책을 둘러치고, 옻칠을 한 뚜껑을 덮어서 임시 창고를 만들어 그 안에 보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을 12명의 문관, 장교 10명, 병졸 100명으로 24시간 감시했습니다.


당초 임칙서는 이것을 베이징으로 보내 일의 성과를 알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그대로 쌓으면 100미터도 넘을 이 아편들을 머나먼 베이징까지 보내는것은 공연히 힘만 낭비하는 일로 생각되었습니다. 임칙서는 '다 처분하라' 는 베이징의 지시를 받고, 1425톤의 양에 달하는 대량의 아편을 처분할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처리해야 하나? 먼저 그는 이 악마를 먼저 기름을 넣어 태워보았습니다. 그런데 타고 남은 찌꺼기를 조사해보자 2할에서 3할 가량의 아편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임칙서는 아편의 성분을 여러가지로 조사했는데, 실험 결과 아편은 소금과 석회에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임칙서는 해변가 높은 곳에 연못 두 개를 파게 했습니다. 사방 약 50여미터의 인공 연못이 만들어지자, 다시 아편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사면에는 판자를 대고, 바닥에는 돌을 깔았습니다. 그 후, 바다에 면한 곳에 수문을 만들고, 반대쪽을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팠습니다.


그리고 6월 3일부터 6월 25일까지,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매일 아편 처분을 실시했습니다. 바다에 면한 수문을 닫고, 반대쪽에 있는 도랑으로 물을 인공 연못으로 끌어들여, 거기에 대량의 소금을 투입하고, 상자에서 꺼낸 아편을 네 덩이로 잘라 계속 연못에 던져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나절 가량 아편을 투입하고 난뒤, 대량의 석회를 투입했고, 화학 변화가 일어나 연기를 내며 끓어오르는것처럼 되었습니다. 이를 썰물에 맞추어 바다로 흘려 보내는 겁니다. 일이 끝나고 나면 판자와 바닥을 깨끗이 닦아 아편 찌꺼기 하나 남지 않도록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돈이 바다로 흘러가는 광경으로 여겨졌는지 이를 보러 나오지는 않았고, 다만 미국인 C. W. 킹이라는 인물만이 그 모습을 구경하러 나왔습니다.  


아편은 이미 예전부터 금지된 품목이었습니다. 다만 공공연하게 거래되고 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영국은 금지된 물건을 불법으로 중국에 팔았고, 중국에서는 그 불법적인 제품을 몰수하여 정당하게 처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대로 압수해도 문제는 없었겠지만, 임칙서는 아편 한 상자에 찻잎 5근 씩을 보내주었습니다. 임칙서는 철저한 엄벌주의를 지향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영국 상인들에게 할수 있는 최대한 우호적인 보상 조치를 취해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적반하장인 찰스 엘리엇은 "영국인의 재산" 이 "부당하게 몰수" 되었다고 여기면서, 길길히 날뛰었습니다. 그는 영국인 상인들이 모두 퇴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일종의 항의 표시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광저우에는 영국말고 미국의 상인들도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그들에게 협조하여 같이 퇴거하자고 권했지만, 미국 상인들의 대표자였던 올리펀트라는 인물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올리펀트는 아편같은 비인도적인 제품을 취급한 적이 없었기에 "쫄릴" 것이 없었고, 그가 보기에 영국기 겪고 있는 문제는, 불법 독극물을 함부로 취급하다 영국이 손해를 입는것은 순전히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아편이라는 "마약" 몰수에 "항의" 하는 엉터리같은 일에, 동조를 맞춰줄 이유 따윈 없는 것입니다. (이후 영국 상인들이 모두 퇴거하자 미국 상인들 중 일부가 아편을 취급하긴 합니다)


영국 상인들은 모두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났습니다. 설사 모든 외국인이 떠나더라도 청나라는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지만, 아편을 팔지 않던 미국인들은 모두 멀쩡히 광저우에 남아서 찻잎, 비단, 도자기 등 아편 이외의 물품을 정상적으로 거래하면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또, 임칙서가 말했던 "아편을 취급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에 대해서, 영국인들은 엘리엇의 지시로 아무도 서명하지 못했지만, 미국인들은 모두 서명하여 아무런 문제 없이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엘리엇의 요구에 따르는 다른 영국 상인들만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영국 배는 바다에서 체류하던 중, 페리의 구룡 방면의 어촌에 잠시 내렸는데, 밑도 끝도 없이 현지의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다가 중국인 한명을 이유없이 때려죽였습니다. 당시 살인을 저지른 영국인은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임칙서는 즉시 엘리엇에게 살인자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집단 난투 사건이었던 만큼, 목격자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범인이 확실치 한다.' 는 헛소리를 하며 잡아떼었고, 다음과 같은 통고를 보냈습니다. 


"첨사취 주민이 한 사람 살해된 사건에 관련해, 나는 본국 왕의 명령에 따라, 죄를 범한 자의 인도가 허락되지 않고 있다. 본국 법률에 따라 철저하게 조사하고, 공정하게 심판하여, 만일 진범이 판명된다면 사형에 처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삼가 진실을 말하건대, 이 사건의 진범은 찾아낼 수 없었다."


엘리엇은 청나라 관리들이 영국 법 따위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외국에서 자국인이 범죄를 저질렀을 떄, 범인은 인도하지 않는다고 제멋대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임칙서를 너무 우습게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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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청나라 관료라면, 물론 영국의 법 따위에 대해 알 수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하지만, 임칙서는 엘리엇이 상상 할 수 있는 이상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중국 밖 해외 연구에 열의를 보였고, 그 지방에서 발행된 영어 신문인 '차이니즈 리포지토리' 를 번역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 여러 문헌과 국제법까지 요점을 추려 번역하였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임칙서는 이미 국제법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던 스위스 법률학자, 에머리히테 바텔(Emerich de Vattel)의 저서 국제법(Law of Nation)을 입수했고, 이를 미국인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번역 하게 해서, 국제법의 대략적인 추세를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임칙서는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엘리엇에게 반론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어떤 나라로 무역을 하러 가면, 그 나라 법률에 따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을 터이다. 왕이 이번 사건의 범인 인도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나, 영국 여왕은 수만 리 밖에 있다. 사건이 발생 한지 아직 한달도 지나지 않았다. 엘리엇은 어떻게 이 사건에 관해 여왕에게 보고하고, 또 명령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불충한 범죄자를 비호하면서, 그 책임을 여왕에게 돌리고 있으니, 불충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런 그가, '만약 진범이 밝혀지면 사형에 처하겠다.' 라고 해도 누가 믿을 것인가? '이 사건의 진범은 찾아내지 못했다.' 라는 말은 사람을 기만하는 말이다. 엘리엇은 사건이 있고서 두 번이나 스스로 첨사취에 가서 조사를 하였다. 만약 진범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는 멍청이가 아닌가?"


"사실은 범인을 알고, 그를 몰래 배 안에 숨겨 놓고 있는 것이다. 만일 범인을 인도하지 않으면, 죄인을 은닉했다는 이유로 엘리엇에게도 같은 죄를 물어, 본 대신과 본 총독은 법을 집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말이 폐부를 찌르는 말이었고, 핵심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관리들이 모두 임칙서와 같았다면 청의 쇠퇴는 훨씬 늦어졌을 것입니다. 당시 광저우에 머물던 영국인은 대부분 마카오로 이동했는데, 임칙서는 마카오에 머무는 영국인에게 식료품 공급을 중단시켰습니다.


마카오는 사실 소재가 상당히 불분명한 곳으로, 포르투갈 인들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할양' 받은 땅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포르투갈이 적당히 중국에 재물을 바치고 중국 쪽에서 눈 감아주는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영토이므로, 임칙서가 저러한 요구를 하면 포르투갈은 영국인들을 보호 해줄 수 없었습니다. 포르투갈 총독은 8월 24일, 앨리엇에게 다음과 같은 통고를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나가라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마카오에 머물던 영국인들은 여자와 아이까지 모두 떠나게 되었고, 총 50여 가구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엘리엇은 해상을 순찰중인 청나라 병선에 투덜거리는 불평을 제기했습니다.


"여기에 수천 명의 영국 국민에 대한 식량의 정상적인 공급이 차단되었다. 만일 이 상태가 앞으로 계속된다면, 앞으로 분쟁이 자주 발생하리라는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경우, 귀관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것은 평화와 정의의 말이다."



임칙서 역시 대꾸했습니다.


"오랫동안 배에 머무르며 굶주리고 있는 것은, 그 쪽이 멋대로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청나라는 영국 배의 광저우 입항을 금지시킨 적이 한번도 없다."


임칙서가 금지시킨것은 지극히 비인도적이고, 또한 불법 제품인 아편의 매매를 금지시킨 것일 뿐입니다. 아편이 불법 제품인 만큼, 이를 압수하고 단속하는 일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그런 불법 제품을 매매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외국 상인은 광저우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미국만 해도, 아편을 취급하지 않기에 아무런 문제없이 광저우에서 상인들이 거주했습니다. 청나라는 영국이 광저우에서 떠나라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다만 마약을 팔아 먹던 엘리엇이 스스로 화가 나서 나갔을 뿐입니다.


또한, 임칙서는 현재 중국인과 영국인이 거래를 하는 일에 대해, 서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금지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해상에서 굶주리고 있는 영국인들에게 중국인 어선들이 식량을 팔고 있었고, 청나라 군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채 했습니다. 이는 임칙서의 묵인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엘리엇은 '평와와 정의의 말' 을 언급했지만, 임칙서 쪽이 훨씬 인도적이었습니다.


엘리엇의 배가 해상에서 정처없이 둥둥 떠있을 무렵, 폼페이에서 온 영국 배 한 척이 10월 11일 마카오 부근에 등장한 일이 있습니다. 이 배는 상선 토머스 카우츠호였고, 정기적으로 면화를 취급하던, 아편과는 관련이 없던 성실한 무역선이었습니다.


당연히 토머스 카우츠호는 아편을 취급하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사인을 했고, 아무런 문제없이 장사를 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자바에서 쌀을 가지고 온 영국 배 로열 색슨호도 나타나서 서약서를 사인하여 광저우에 입항하려 했습니다.


여기서 영국이 취한 태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엘리엇은 자국 함선인 로열 색슨호를 추격하여, 자국 군함 두 척으로 이를 위협하여 돌아가게 했습니다. 아편을 취급하지 않고 정직하게 무역을 하려는 국내의 상선을, 이를 보호해야 할 영국 군함이 협박하여 쫒아낸 것입니다. 정신나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엇은 이렇게 되자, 최후의 수단까지 쓰기로 했습니다. 그는 우선 영국인이 육지에서 안전하게 머무려면, 청나라가 적대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청나라 입장에선, "서약서에 사인만 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엇은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성의 있는 답변을 받지 못했다."



이를 구실로, 영국의 군함들이 불을 뿜었습니다. 청나라의 병선은 29척이 출동했지만, '전투'가 끝난 후, 29척 중에 고작 3척만이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군함은 포탄이 바닥나자 물러났지만, 임칙서는 일단 이것을 '승리' 라고 도광제에게 보고했습니다. 도광제는 임칙서가 마음대로 일을 벌여도 좋으며, 다만 움츠리지만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이제 서약서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먼저 포문을 연것은 영국이었고, 여기에 대해 모든 영국 배를 국외로 쫒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에 대한 임칙서의 태도는 실로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가장 강경하게 아편 무역을 금지하고 통제한 사람이 임칙서 입니다. 그러나 임칙서는 단순히 감정적인 쇄국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아편을 금지하면 되는 일이고, 건전한 무역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고 자신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임칙서는 서약서에 사인을 한 다른 나라 상인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청에서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임칙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측근들에게 영자지와 외국의 지리지를 번역하게 했으며, 완전한 쇄국은 세계의 조류를 역행하는 행위라고 여겼으며, 따로 영국 배 케임브리지 호를 하나 구입하여 이를 연습선 삼아 해군의 근대화를 꿰하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만약 임칙서가 50년을 늦게 태어났다고 해도, 그는 중국에서 가장 근대적인 인물 중에 하나였음에 분명했을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1839년 케임브리지대학 신학교수인 텔웰이라는 인물이 '대중국 아편무역 죄악론 '이라는 저서를 집필하였고, 여기에서 아편 무역이 영국 국기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임칙서는 광저우에서 이 논문을 재빨리 입수하여, 번역을 하게 의뢰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임칙서는 해상에서 조난당한 영국인들도 매우 인도적으로 구조하여 보호했고, 아편 무역에 관여하지만 않았으면 다른 배가 와서 그 신병을 인수하러 갈 수 있게 조치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엇은 런던에 '이런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야만인 무리들에게는 강경책이 가장 좋은 해결책' 이라는 요지의 내용을 계속 전달했고, 같은 시기 런던에서도 강경론이 활발하게 일어났습니다.


엘리엇의 보고 뿐만 아니라, 광저우에서 아편을 팔아먹던 영국 상인들도 런던에 와서 청나라를 응징해야 한다는 정치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임칙서의 활약으로 아편이 근절되면, 더이상 짭짤한 아편 장사는 해먹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외무부 장관이 된 파머스턴에게 압력을 주었는데, 파머스턴 역시 확장론자라 강경책에 솔깃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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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2월, 자유당 내각은 마침내 청나라 원정을 결의했습니다. 다만, 의회에서 전쟁 비용 지출이 승인되어야만이 파병이 가능했고, 4월에 의회가 열려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제국주의적 감상이 의회를 휩쓸었고, 의원들 자체도 제국주의적 인물들이 태반이었습니다. 왕년의 전쟁 영웅, 아서 웰링턴은 이렇게 발언했습니다.


"50년 공직 생활에서 영국 국기가 광동에서 당한 것과 같은 모욕을 본 일이 없습니다."



또한,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엘리엇은 포위된 상관 발코니에 드높게 영국 국기를 게양하라고 명령했다……그 국기를 보면,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의 마음도 굳게 되살아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에게 패배도, 항복도, 굴욕도 모르는 나라에 자신들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플라시의 들판(1757년)에서 블랙홀 희생자(1756년 6월)의 원수를 값은 나라다. 위대한 섭정이 영국인의 이름을 일찍이 로마 시민이 그러했던 것 이상으로 존경받게 하겠다고 맹세한 이래, 퇴보를 모르는 나라다. 적에게 둘러싸여 대양과 대륙에 의해 모든 구원의 손길이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머리카락 한 올 이라도 위협하는 자는 처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기서 말하는, 영국 국기를 자랑스럽게 발코니에 드높게 게양한 일의 실상은 임칙서가 마약인 아편을 내놓으라고 하자 엘리엇이 버티면서 이를 내놓지 않던 일 을 말합니다. 


바햐으로 세계제국이 마약을 팔아먹기 위한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양심을 버리지 않는 드문 몇명 중에 일부인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아직 젊었지만,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의 의견을 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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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원인이 이다지도 부정한 전쟁, 이다지도 영속적인 불명예가 될 전쟁을 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고, 읽은 적도 없습니다. 지금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신사는 광저우에서 영광에 가득 차 휘날렸던 영국 국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 국기야말로, 악명 높은 금제품의 밀수를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것입니다. 현재 중국 연안에 게양되어 있는 것처럼만 그 깃발이 휘날린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그것을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고 전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목적이 인도적인 차원에서건, 백인 우월주의로서 '야만적인' 중국인들에게 아편을 팔아먹는 일에 대한 부끄러움에서건, 어찌되었건 간에 자신들의 양심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연설은 크게 작용하여, 당초의 압도적인 전쟁 분위기와는 달리 찬반 투표 결과는 271대 262, 9표 차이로 전쟁을 치룰 것이 결의되었습니다. 영국의 양심이 262표였습니다.


패배도, 항복도, 굴욕도 모르는 위대한 나라의 군대가 마약을 팔아먹기 위한 전쟁에 동원되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인도 총독인 오클랜드는 실론에 주둔중인 아일랜드 제 18연대, 켈커타에 주둔 중인 카메로니언즈, 보병 제 26연대, 벵골 공병 2개 중대, 의용병 몇몇 중대, 마드라스 포병 2개 중대 등 4천여 병력의 동원령을 내렸습니다. 군대의 사령관은 엘리엇의 사촌형이었던 조지 엘리엇이 임명되었습니다.


마침내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임칙서는 런던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직접 서한을 작성해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서한이 도착했을때는 이미 의회에서 전쟁이 결의된 후였고, 설사 그 전이라고 해도 전쟁 결의에 대한 영향은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양심에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저는 여왕의 나라가 저의 나라에서 6~7만리나 떨어져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배가 무역을 하기 위해 이곳에 오는 것은, 큰 이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의 부는 막대한 이득을 약속하는 것이며, 여왕께서 가져가신 부는 중국인들의 정당한 몫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왕께서는 무슨 권리로 그렇게 이득을 안겨준 중국인들을 해치는 약을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묻겠습니다. 여왕이시여, 당신의 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당신의 나라에서는 아편의 흡연이 금지되었다고 들었습니다(이것은 임칙서의 오해). 만일 다른 나라의 아편상인이 영국에 아편을 판다면 여왕께서는 필시 증오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편으로 생기는 해악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자신의 나라에 해악이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 어찌하여 그 해악을 타국에 전가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여왕의 나라에 막대한 이득을 약속하는 이 나라에게 말입니다."


“여왕의 상인들은 폐하의 나라에서는 불법인 독극물인 아편을 우리나라에 들여와 막대한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왕께서 이를 허락하셨을 리 없다고 보며, 만약에 허락하셨다면 군주로서 취하실 행동이 아니라 봅니다."


"우리는 귀국과의 정상적인 무역을 그만둘 뜻이 전혀 없으며, 아편만 취급하지 않는다면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외무부의 공식적인 성명에 따르면 '영국 국민의 생명이 위험하고, 영국 국민의 재산이 위험에 처해졌기 때문' 에 말입니다.


 그 이후의 전개에 대해서는 굳이 더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려져 있을듯 합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영국 함대는 그나마 방비가 잘된 임칙서의 광동을 지나쳐 방비가 허술한 지역을 대번에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수도 근처까지 진군했고, 놀란 청나라 조정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기겁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였다." 는 이유로 현장에서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던 임칙서를 파면했습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영국의 비위를 맞춰주던 청나라 조정의 관리들은 협상에 따라 영국이 다시 광동 지역으로 내려가서 당장 적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분하고 한스럽다. 싸워야 한다." 며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따라 바로 태도를 전환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앞서 임칙서 등 그나마 능력 있는 현장 관료들은 "협상에 방해가 된다." 라며 파면시켰고, 현지의 방어 시설과 방어 병력도 "협상에 방해가 된다." 라며 숫자를 축소하거나 모조리 해체 시킨 상황이었습니다.


영국군이 강력한 신무기로 무장하여 우세한 상태에서 전쟁에 나서는 태도도 이 따위니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었고, 처참한 패배를 경험하고 맙니다. 



HK-12.JPG

중국이 청나라에 굴복한 난징조약(南京條約). 이 조약에서 영국은 정당한 전쟁 배상금 뿐만 아니라, 청나라가 감히 아편을 몰수했다며 양은 600만 달러를 추가로 얻어냈다.




재미있는것은, 정전협정이 벌어질 떄의 일입니다. 청나라는 호들갑을 떨며 임칙서를 파면한 뒤 영국군과 만나 "우리가 임칙서를 파면했다. 양국의 우의를 해치는 무능한 관리를 파면했으니 우리 잘해보자." 라는 의사를 표시하며 경하할 일이라고 축하를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함대의 제독 브레머 준장은 고개를 젓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니, 임칙서는 훌륭한 재능과 용기를 지닌 대단한 총독이었소. 애석하게도 외국 사정을 몰랐을 뿐이오."


말도 안되는 이유와 억지를 들어 밀고 들어온 영국군이었지만, 그 영국인들조차도 임칙서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대단한 인물이었다는 평을 내렸을 정도입니다. 


적국의 인물들마저도 감탄했지만 자국은 "나라를 병들게 한 간신" 이라고 평가했던 임칙서는 이후 머나먼 신장 위구르 지역으로 유배나 다름없는 좌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계속해서 독자적인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임칙서는 자신을 버린 중국의 미래에 대해 염려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기울여 외국을 연구했고, 특히 이리(伊梨) 지역을 경계로 하고 있는, 눈 앞의 거대 제국 러시아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한 태도로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임칙서는 3년간 사색을 거듭하여 아라사국기요(俄羅斯國紀要)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임칙서는 영국과 싸우면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원도(李元度) 등 외국의 정세에 그나마 관심 있는 후학들이 영국을 두려워 하며 대책을 묻자, 의외로 임칙서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임칙서는 영국이 전쟁을 원했던 것은 오직 '통상이익' 때문이었으며, 당장의 땅을 탐내는 게 아니기에 그렇게까지 염려할 상대는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진정한 문제는 중국의 영토를 노릴 '러시아' 라고 말했습니다.


 "서양(영국)은 대수로울 것이 못 된다. 중국에 최종적으로 우환이 되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일 것이다. 나는 늙어서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들은 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임칙서 사후 러시아는 지속적인 팽창 정책을 중국을 향해 전개하여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상당한 영토를 할양해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말한대로 되었던 셈입니다.






해국도지의 유럽지도, 세계지도, 증기선 설명.




덧 :


임칙서는 자신이 평생에 걸쳐 알아내고 공부한 정보를 동지인 위원에게 전했고, 위원은 임칙서의 초기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보충하여 '해국도지' 를 저술했습니다. 1842년 발간된 이 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물건너 바다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막부 말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까지의 일본 지식인들 중, 이 해국도지를 읽지 않았던 인물이 없다시피 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일본 연구계에서도 해국도지의 영향력을 인정합니다. 또한, 박규수 등의 조선 극초기 개화론자들도 김옥균, 박영효, 홍역식, 유길준를 가르치며 해국도지를 적극 이용했습니다. 보통 '아편전쟁' 정도로 기억될 임칙서지만, 이렇게 보면 임칙서야 말로 동양 3국의 근대화 도입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선지자였다고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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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물리
16/12/29 21:15
수정 아이콘
..뭐 이런 먼치킨이 있나요.

외교적으로, 또 무역에 있어서 중도를 잘 지키면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했고
자국에뿐만 아니라 적국에게도 정의로웠고
또한 인도주의적이었으며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설명충등판
16/12/29 21:28
수정 아이콘
아편전쟁의 영국은 진짜 양아치 중의 생양아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듯..

아니, 가만 생각해보면 저 시기의 서구 열강들 자체가..
펠릭스
16/12/29 21:47
수정 아이콘
그래서 2차대전이 인류의 도덕성에 중대한 전환점이었지요. 히틀러가 살인마라고 하지만 사실 그런 짓거리들은 제국주의 시대의 '문명국'들이 항시 행해 오던 행동들이지요. 자기들이 직접 겪어 보고나서야 거기에 경악한 유럽인들이 조금더 사람같이 변했지요.
웨인루구니
16/12/29 21:33
수정 아이콘
좋은 글써주셔서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지느
16/12/29 21:35
수정 아이콘
엄청긴데도 재밌게 잘봤습니다
klemens2
16/12/29 21:37
수정 아이콘
일본에 가려서 그렇지 영국에 대해서도 일본 못지 않게 칼을 갈 것 같은데, 과연 중국이 복수 할 수 있을런지....
aurelius
16/12/29 22:13
수정 아이콘
일반적으로는 역사가 이미 복수했다고 생각하는 거 같더군요. 영국은 이미 따돌렸고 옛일에 대한 댓가는 이미 치렀다는 인식? 일단 라이벌로 인식되어야 감정이 남는데, 영국은 이미 라이벌로 취급 안하는 느낌입니다
언어물리
16/12/29 22:17
수정 아이콘
음.. 일본은 아직 못 따돌린 건가요?
담배상품권
16/12/29 22:25
수정 아이콘
경제적으로 이미 추월해서... 그리고 아편 전쟁과 중일전쟁을 따지면 중국인들이 더 열받는건 아무래도 중일전쟁이죠.
언어물리
16/12/29 22:28
수정 아이콘
경제적으로라도 1인당.. 수치는 못 따라잡지 않았나요? 전체 규모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담배상품권
16/12/29 22:32
수정 아이콘
1인당으로 일본을 추월하면 그 중국은 미국을 초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전체 규모 말하는거죠.
언어물리
16/12/29 22:35
수정 아이콘
답변 감사합니다!
16/12/29 22:33
수정 아이콘
중일전쟁,, 이른바 일본에 대한 감정은 아직 영국처럼 해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제정세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물리쳤다?라고 하기엔 그 격차가 영국과는 급이 다르죠.
만일 그랬다면 얼마전 자국 내 일본기업 사옥들을 불태우는 일은 없었을겁니다. 국민정서가 아직 그 선을 못 넘었다는 반증이겠지요.
언어물리
16/12/29 22:36
수정 아이콘
답변 고맙습니다!

만약 중국이 일본보다 훨씬 더 앞서게 되면 감정이 좀 덜해질까요?
16/12/29 22:39
수정 아이콘
그 선을 넘는다면, 마치 우리나라가 중국을 생각하듯, 중국이 일본을 대할 것입니다.
비단 지금의 희토류 제제가 아닌, 산업 전반 모든 면에서 일본을 압박할 것이며,
일본 본토 부동산에 대한 투자, 일본 기업에 대한 자본 인수 등,
경제적인 진출 역시 활발하겠지요.

물론 그 상황이라면, 우리나라가 일본을 걱정할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언어물리
16/12/29 22:41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가..ㅠㅠ
그쯤되면 다른 나라 걱정할 처지가 아니되겠군요 ㅠㅠ

친절한 답변 정말 고맙습니다!
16/12/29 22:46
수정 아이콘
언어물리 님// 네넵 지금 미국이 일본 뒤를 봐주고 있고 일본이 이를 기반으로 대 중국 전선을 펼치고 있는데,
중국이 저것들을 맘대로 펼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상 그 동맹(??)이 약화된 것과 다를 바 없기에,
멀지않아 동아시아의 지배구도에 대해서는 중국에 중심을 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국이 발 빼면 끝이죠 뭐..
언어물리
16/12/29 22:55
수정 아이콘
시간 님// 아, 또 미국과도 연결해서 생각해야 하겠군요. 우리나라도, 일본도 미국의 발을 꼭 잡고 있어야 할 듯 해요 흐흐

알림이 안 와서 댓글이 늦었습니다;;
후배를바란다
16/12/29 23:16
수정 아이콘
하긴 미국 말곤 상대로 안보일테니까요.
16/12/29 21:4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루크레티아
16/12/29 21:50
수정 아이콘
그냥 추천.

우리에게도 임칙서가 나타나겠죠. 약에 취한 윗선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뇌물로 덮는 짐승만도 못한 물건들이 나왔으니 임칙서도 나올 차례죠.
하심군
16/12/29 21:56
수정 아이콘
세상에 온갖 흉한 것은 영국이 만든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뻐꾸기둘
16/12/29 22:09
수정 아이콘
시대를 잘못 태어난 사람이네요. 후대에 훌륭한 명신으로 기억될 재능인 것 같은데.
16/12/29 22:12
수정 아이콘
임칙서-이홍장 두 먼치킨이 동시대에 활동했더라면... 이라는 가정을 해봤지만, 이미 한두명의 명대신으로는 대세를 돌릴 수 없을만큼 청나라가 기울어져있는 상황이었겠죠.
클린사제
16/12/29 22:12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보통블빠
16/12/29 22:30
수정 아이콘
하다 못해 21세기에도 여긴 외국이야하고 암약하는 밀수 범죄조직이 득실거리는데 참 임칙서의 자세는 21세기에도 본받을게 많다고 봅니다.
임칙서가 형이 아편중독으로 사망해서 이 사건에 열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형 이야기는확실한 사실인가요?
16/12/29 22:31
수정 아이콘
아편전쟁건은 그 무엇을 보더라도 임칙서는 명재상(?)이자 뛰어난 지휘관이죠.
다만 그 시대가 지극히 불리한 시대였을 뿐..
그가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그에 유리한대로 행동했다면, 아마 대영제국의 이토히로부미가 될 수 밖에 없었을겁니다.
Jace T MndSclptr
16/12/29 22:33
수정 아이콘
크 신불해님 요새 농구글만 쓰시더니 ㅜ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동네형
16/12/29 22:41
수정 아이콘
정말 잘봤습니다 추천추천
16/12/29 22:41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임칙서를 그냥 청조의 유능한 관리정도로 알고있었는데 진짜 대단한 사람이네요
aDayInTheLife
16/12/29 22:4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6/12/29 22:50
수정 아이콘
인간의 생리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바로 그 인간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추가로 고려해보자면,
우리나라로서는 현재의 패권국인 미국에 의존하느냐? 떠오르는 패권국인 중국에 의존하느냐?의 기로에 서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은 그 지리적 특성 상, 요충지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할 수도 없는 판국인지라,
정리적 주도면밀함이 그 누구보다 주요한 마당에, 해결 논리조차 허접한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네요..
16/12/29 23:06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치죠 호타루
16/12/29 23:19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편 전쟁은 여러 모로 양국에게 있어서 참으로 치욕스러운 전쟁이었다는 평가가 문득 떠오르네요.
홍승식
16/12/29 23: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진짜 서구 열강들은 지금의 전 지구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들이 지금 잘사는게 다 다른 나라의 피땀을 빨아먹고 이룬건데 말이죠.
-안군-
16/12/29 23:33
수정 아이콘
세상 모든 흉악한것은 다 영국X들이 만들었다더니...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영국과 일본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뭐랄까... 영국은 경제적 피해와 콧대높던 중국의 자존심을 짓밟은 정도라면,
중일전쟁 당시 학살당한 중국인은 2~3천만에 달하는걸로....;; 아편전쟁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중일전쟁때 사망한 일반인 수는, 당시 조선 인구 전체에 맞먹는다는 얘기죠.
sen vastaan
16/12/29 23:41
수정 아이콘
시대 최강의 무력이 마약 카르텔에게 있다니 이 무슨 디스토피아
오만과 편견
16/12/30 00:08
수정 아이콘
실리와 관계로서 결정되는 체계는 개선되야 하죠.
개인의 신념과 양심으로서 결정되는 사회를 생각해봅니다.
Kings'speech
16/12/30 00:50
수정 아이콘
깐깐하고 청렴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 하는 유학자 1로 알았는데 당시 청나라 누구보다 시대를 정확히 읽고 있던 사람이었네요.
자유의영혼
16/12/30 03:48
수정 아이콘
정말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Cazorla 19
16/12/30 04:29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
아점화한틱
16/12/30 08:25
수정 아이콘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글을 몰입감있게 잘쓰시는군요. 긴 글 읽는 내내 뭔가 임칙서라는 사람은 참된 공무원의 표본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꽃보다할배
16/12/30 09:00
수정 아이콘
이맛에 피지알 옵니다 임칙서가 마약 뺏고 보는 눈이 없어서 열강 침략의 교두보를 만든 전형적 훈장님 꼰대 공무원으로 알았는데 엄청난 지식인에 개화파인 것은 몰랐습니다 임칙서 3명만 저 시기 20년전에 있었어도 청이 저렇게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네요
작은기린
16/12/30 09:00
수정 아이콘
순식간에 빨려느는 느낌으로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글이네요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Jon Snow
16/12/30 09:14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강동원
16/12/30 09:55
수정 아이콘
회사에서 몰컴하는데 정신 놓고 읽다가 걸릴뻔 했습니다;;;
이거 완전 충무공 아니냐 싶을 정도의 먼치킨이네요. 임칙서가 대비한 곳으로 영국이 쳐들어 왔다면...
스테비아
16/12/30 09:59
수정 아이콘
대원군대신 임칙서였으면....ㅠㅠ(눈*님 소환댓글)
쿠크다스멘탈
16/12/30 10:0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정의로운 도둑이 되었어요!
16/12/30 10:1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아케르나르
16/12/30 11:20
수정 아이콘
상상외로 임칙서란 사람이 대단하긴 했는데, 또 상상외로 영국이 뻔뻔했네요.
16/12/30 11:39
수정 아이콘
이때 영국은 신사 아니죠 인도에서 실짜던 방직공 손 날리는 거부터 섬찟합니다
카랑카
16/12/30 14:00
수정 아이콘
임칙서는 참 대단한 인물이네요.
17/03/14 01:30
수정 아이콘
오 이런 글을 놓쳤다니.. 잘 읽고 갑니다. 저때의 영국은 양아치 그 자체였네요 하하...
17/03/15 02:09
수정 아이콘
뭐... 이런 싸가지없는 행위를 한 영국은 나중에 문화대혁명때에 홍위병에 의해서 영국 대사관이 습격당해서 방화 폭력에... 아마도 '성폭력' 까지 폭도들이 영국 외교관이나 직원들, 여직원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걸 당한 바 있죠.

시대는 다르지만, 잘못된 어떤 인과응보가 꼬여 꼬여서 그 나라 그 사람들에게 간 건지도 모르지요.
아지다하카
17/03/19 10:04
수정 아이콘
와 이런 좋은글을 이제서야 읽었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7/03/20 16:21
수정 아이콘
임칙서가 청 제국의 마지막 희망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구르미네
17/03/24 05:3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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