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6/10/19 17:43:37
Name 스타슈터
Subject 나중 보다 소중한 지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온지도 어느새 꽤 시간이 흘렀다.

어느날, 일 관계로 어느 대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식당을 쭈욱 둘러보고 느낀 점이 있다면, 학식 가격이 이렇게 착했구나 싶었다. 매점의 음식들이 대략 평소 먹는 점심 가격의 절반 수준인데, 어째 내가 그걸 보고서 처음 한 생각은 "가격이 이런데 맛이 없지는 않을까"였다. 예전에는 이것도 비싸서 못먹었는데, 나도 참 배가 불렀나보다 싶었다. 뭐 어짜피 가격도 싸겠다, 가장 비싸보이는 걸 시켜먹기로 결정했다. 바깥 세상에서 먹는 같은 메뉴와 비교했을때 가격은 싸면서도 맛은 의외로 괜찮았다. 애초에 가격표에 붙은 저 숫자가 맛있게 만들어 주는것도 아닌데,  괜한 선입견을 가진게 아닌가 싶었다.

밥을 먹고 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시켜먹기로 했다. 가게 점원분에게 은근슬쩍 토핑을 좀 더 달라고 해봤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런 류 부탁을 하는 스킬은 자연스럽게 많이 늘은 것 같았다. 결국 토핑도 많이 주시고, 심지어는 하나 더 얹어주셨다. 학생 때 이런 거 좀 잘했으면 돈 많이 아꼈을 텐데, 약간 뒤늦은듯 하여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먹고 살자고 익힌 스킬인데, 오히려 먹고 살 만 하니까 별 생각없이 더 잘하게 된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학식 중 가장 비싼 것을 골라먹는 것도, 아이스크림에 토핑을 하나 더 얹는 것도, 지금의 나에겐 딱히 자랑거리가 된다던가 큰 행복이 될만한 것들은 아닌데, 학생 시절에는 나름 한달에 한두번 큰 맘먹고 행하는 일탈이였다. 애초에 아이스크림 토핑같은건 내가 학생때 말만 조금 더 잘했어도 가능했을 텐데, 그게 뭐라고 돈을 아껴가며 가끔 한번씩 큰맘먹고 사먹었는지 모른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니,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더이상 나에게 큰 행복이 아니게 되어버렸고; 얻고 싶은 걸 얻을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니, 정작 내가 얻고 싶었던 것은 나에게 더이상 특별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새삼스럽지만, 지금 내가 바라는 행복은, 지금이라서 의미가 있는게 아닐까.

-

언제부터인지, 내 마음속에는 늘 불확실한 미래의 대한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장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더 큰 행복을 버리지 말자,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 미래에 후회할 짓을 하지 말자, 늘 이런 생각을 내 자신에게 강요하다시피 주입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느낀 것은,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거리로 남는 것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학생 시절에 없는 돈 짜내서 저렴한 숙박을 순회하며 다녀온 베낭여행이, 직장인에게는 돈이 문제가 아닌 시간의 사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편의점 맥주 몇캔 사서 공원 벤치에서 즐겁게 떠들던 추억이, 이름만 들어도 사치스러운 독일 맥주집에서 먹는 맥주보다 더욱 달달한 즐거움의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다시 그렇게 하면 즐거울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은 그만큼 즐겁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없던 것들은 더 나은 것으로 채울 수 있지만, 그때의 마음가짐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는 것도 생긴다. 그렇게 놓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돌이켜 보니, 지금 내가 놓치기 시작하는 것들도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

최근, 휴가를 내서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다.

원래는 가볍게 혼자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조금은 무리하더라도 일정을 맞춰 함께 가겠다고 했다. 왜냐고 물어보니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쉽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란다.

"에이 무리하지 마, 나중에도 기회 많은데"
예전 같다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요새 들어 "나중"이란 단어가 예전만큼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중에 하자"고 했던 일들 중에서, 내가 진짜로 하게 된 일이 어림잡아 20%정도만 되어도 대단히 많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하지 못하는 일을, 나중에 하게 될 확률은 더욱 적다는 것을 점점 실감하고 있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난 지금 얼마나 많은 일들을, 다음에 더 좋은걸로 하겠다며 미루고 있을까? 지금의 행복은, 지금이라서 행복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자신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그리고 지금 당연해 보이는 순간들 하나하나가, 전부 다 수많은 이들의 소소한 노력이 결실맺은 된 작은 기적들이라는 것을 요새들어 다시 한번 깨닫고 있다. :)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2-15 20:2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wish buRn
16/10/19 18:30
수정 아이콘
먹고산다고 한달에 2번쉬면서 10시~22시 일하고 있는데.. 요즘들어 심란합니다.
아예 정말 열심히해서 파트쓰면서 개인시간을 늘리는게 좋을텐데, 쉽지 않고..
이걸 접다니 그나마 들어오는 소개팅도 더이상 안들어올텐데..
스타슈터
16/10/19 18:52
수정 아이콘
사실 저도 저렇게 적었지만 현실을 직시하면 정말 내려놓기 어려운 것들 뿐이더라고요... 그래도 최소한 지금 할수 있는게 있다면 나중이 아니라 지금 반드시 하려고 마음을 먹는 중입니다.. 흐흐

지금도 할 수 없는건 정말 어쩔수 없겠지만요...
16/10/19 18:41
수정 아이콘
알음알음 알던 25살 젊은 친구가 내출혈로 고인이 되는거 보면서 나중보다 현재를 더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드는 요즘입니다.
스타슈터
16/10/19 18:54
수정 아이콘
제 친구가 최근 큰 병으로 입원했는데 남 이야기 같지가 않네요.. 힘내세요!
16/10/19 19:03
수정 아이콘
네 감사합니다. 같이 힘내야죠
아린사랑
16/10/19 18:46
수정 아이콘
고... 고시생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할까요 ㅜ...
유스티스
16/10/19 19:03
수정 아이콘
고시같은거만이 압축적 행복의 유보를 도모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병행이 가능하지만 그만큼 유보의 기간이 장기화되니까요.(경험담.)
답이머얌
16/10/19 19:00
수정 아이콘
살아보니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젊을땐 시간은 되는데 돈이 없고,
직장가면 돈은 되는데, 시간이 없고,
더 늙으면 돈도 시간도 없고.

결국 그 순간에서 최선을 다해 자기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조화하는 수 밖에.
그렇게 사는 인생이 열심히 열정적으로 사는 것이겠죠.

요즘 젊은이들에게 열정이니 노력이니 하는거 보면 타인에게 또는 외부 환경에게 강요된 그 무엇이라 생각되어 그런 삶이 행복하기는 커녕 괴로움과 불안만을 안겨주는듯 합니다.
스타슈터
16/10/19 19:15
수정 아이콘
노력도 노력이지만 현재의 행복을 전부 포기하는 노력은 결국 보상받지 못할 경우 그 좌절감이 엄청나더라고요...

그래서 하고싶고 할수 있는것은 미루지 말고 하되, 해야만 하는 것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게 정말 열심히 사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요.... 흐흐;;
유스티스
16/10/19 19:02
수정 아이콘
이거시다...
창조신
16/10/19 19:08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한조하러갑니다
스타슈터
16/10/19 19:12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크크 이렇게도 인용될수 있었군요!
gallon water
16/12/16 18:47
수정 아이콘
아니다 이 악마야
Supervenience
16/12/16 10:09
수정 아이콘
내일의 소개팅을 위해 오늘의 치맥을 참지 말라
16/12/16 10:46
수정 아이콘
이거네요.
지구사랑
16/12/17 07:59
수정 아이콘
지나가고 나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면 살수록 절실하게 느낍니다.
잉크부스
16/12/20 01:19
수정 아이콘
미래 준비라는 목적으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내일과 나의 오늘은 똑같은 가치로 존재합니다.
16/12/20 18:4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히토미꺼라
16/12/23 01:51
수정 아이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한조를 픽할수 없다..
송파사랑
16/12/23 09:23
수정 아이콘
동감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817 아 참 또 등 돌리고 누웠네 [33] 마치강물처럼21179 17/01/13 21179
2816 스물 아홉 마지막 날, 남극으로 떠난 이야기(스압/데이터) [111] 살려야한다22656 16/12/31 22656
2815 임칙서, 그리고 신사의 나라. [57] 신불해17363 16/12/29 17363
2814 한 유난스러운 아르바이트생 이야기 [40] Jace T MndSclptr24359 16/12/23 24359
2813 [리뷰] 개인적인 올해의 한국 영화 배우 Top 20 [39] 리콜한방19028 16/12/19 19028
2812 올해 하반기에 시승해 본 차량들 소감 [103] 리듬파워근성46252 16/12/18 46252
2811 세상의 양면성에 대한 난잡한 생각. [36] 와인하우스21302 16/12/05 21302
2810 우리 집에 어느날 누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황제다. [32] 신불해26971 16/12/04 26971
2809 세면대에서 발좀 씻지 마세요. [87] Secundo27931 16/11/30 27931
2808 술먹고 얼굴이 빨개지면 금주해야하는 이유 [105] paauer53094 16/11/07 53094
2807 1%의 미학 [18] AspenShaker19852 16/11/01 19852
2806 TV를 끄지 못했던 마음 [16] Eternity14523 16/10/23 14523
2805 나중 보다 소중한 지금 [20] 스타슈터16597 16/10/19 16597
2803 같이 살자 [28] Eternity17685 16/10/10 17685
2802 판다와 비만 [37] 모모스201324347 16/10/07 24347
2801 [번역] 빠던의 미학 [65] becker38590 16/10/06 38590
2800 산모들의 죽음을 막아라 [23] 토다에18172 16/10/02 18172
2799 야구사상 최악의 은퇴식 - 후지카와 큐지가 쏘아올린 작은 공 [67] 사장28755 16/09/30 28755
2798 고지방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의 원리 및 가이드 [142] nerrd33621 16/09/30 33621
2797 데이트를 합시다. [18] sealed20196 16/09/29 20196
2796 [영어 기사] 트럼프에 열광하는 저소득/저학력 백인층 다르게 보기 [94] OrBef33047 16/09/29 33047
2795 메이저 가구 저렴하게 구매하는 팁 [48] papaGom39877 16/09/28 39877
2794 휴식을 취할 때 듣기 좋은 소리들 [9] 전기공학도20234 16/09/24 2023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