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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4/02 19:00:55
Name 유리별
Subject 봄비가 옵니다.
봄비 님이 오시네요. 참 봄비란 이름답게도 내렸다 안 내렸다 은근히촉촉하게 오시는걸 보다 보니
비만 오면 상태가 최고조에 오른다며 신나서 떠들 떠들 뭘 해도 하이텐션이던 오라버니가 생각납니다.
오늘 오전에 헤어졌다고 전화 왔던데.

보통 이별하면 비라도 왔으면 좋겠다고들 하던데 그 오라버니는 좀 맑지 그러냐고 미워하려나요. 이러나저러나 하늘은 원망듣겠죠.

햇수로 9년 차 연애를 끝내셨습니다.

우울하면 술은 절대 먹지 않는다 했고…. 과연 무엇으로 슬픔을 달래실까요.
아무 생각도 안 난다고, 마음이 텅 빈 것 같다 고, 네가 이별한 후에, 누굴 사랑할 마음도 가슴도 남아있지 않아. 내가 없어진 것 같아, 라고 했던 게 무슨 뜻인지 이제야 가슴으로 이해가 된다며 메마른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 한 마디 하시더군요.
아무 말도 없이 듣고만 있었더니 짧은 침묵 후에, 원래 이런 거냐? 하고 물어서 네. 원래 그래요. 하고 대답했더니 이런 멋진 녀석, 흥. 한동안 연락 안 할 거다. 하더니 끊으십니다.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기도 했고, 기대려 하거나 위로받고 싶어 전화한 마음 뻔히 알지만 받아주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좀 차갑게 나갔습니다. 이별이 다 그렇죠, 뭐. 전혀 슬프지 않은 것 같은데 엄청나게 슬픈듯한, 묘한 기분. 그 기분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삐쳐서 끊으셨어도 아마 또 곧 연락하시겠죠. 그분은 비만 오면 하이텐션이니 말입니다.

처음 그 커플을 봤을 때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쯤이었던 듯싶습니다. 3월 말, 4월 초쯤, 신입생의 첫 학기는 학교가 진리! 를 외치시는 선배들 말만 믿고 원래 다 그런가 봐 하며 과방에 앉아 누구라도 오면 밥을 얻어먹으러 갈 생각에 방끗거리고 있을 때였죠. (저는 정말로 학고를 맞았고 결국 1학년 성적을 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신입생 시절을 있는 힘껏 즐겼다고 생각하… 기엔 남긴 게 없는 씁쓸한 기억이네요.) 그때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배들이 들어오셔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신입생다운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키가 꽤 커 보이는 남자 선배가 저를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보셨습니다. 글쎄요,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저는 그때 손잡고 함께 들어오신 여자 선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언니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길어 느슨하게 묶고 계셨는데, 정말 왜 사람의 머리카락을 보고 '탐스럽다.'라고 하는 것인지 처음으로 느끼던 중이었거든요. 그렇게 긴 머리카락을, 그렇게 좋은 머릿결로, 그렇게 예쁘고 자연스럽게 묶고 있는 사람은 처음 봐서 반해서 멍하니 쳐다봤습니다. 문득 그 남자 선배가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얜 뭐냐?' 하고 물으십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곁에 있던 누가 '신입생입니다.'하는 게 아, 좀 학번 높은 선밴가 봐 했는데 오, 무려 20세기 학번이셨습니다. 20세기 학번은 그때 처음 봤습니다. 원래 과방에 잘 오지도 않으시는 학번 대이셨는데, 그날 우연히 언니가 과방에 책을 두러 오시면서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CC였습니다. 4살차이 커플이었는데, 당시 과 내 투탑이었습니다. 언니가 언제나 탑을 유지하셨고, 그 언니의 가장 친한 친구와 오라버니가 번갈아가며 2등을 하셨으니까요. 공부도 잘해, 탐스러운 머릿결로 유명하셔, 게다가 그 오라버니가 언니를 공주마마 모시듯 모시고 다녀서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짝이었습니다. 언제나 언니의 가방을 들고 언니의 손을 잡은 채 도서관에 다니셨으니까요. 오라버니가 어찌나 그 언니에게 잘했던지, 과 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커플이면서도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짝입니다. 닮기도 은근 닮았습니다. 제가 지향했던 커플 상이기도 했습니다. 그 커플 결혼하면 커플링은 꼭 내가 받아내야지 했었습니다. 행복하게 연애해서 행복하게 결혼에 성공한 짝의 커플링을 받아 나눠 끼면 행복한 결말을 맺을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믿고 있습니다. 언제나 결혼하시려나 했는데, 결국 이런 결말을 맞이했네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별은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걸 저나 그 오라버니나 둘 다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위로받아 치유하면 좀 덜 아프다거나 빨리 낫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아플 때 진통제 먹는 거랑 별로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결국, 낫던지 안 낫던지, 위에 뭐가 덮이던지 흉이 생기던지, 잊히던지 희미해지던지, 그 아픈 가슴에 익숙해져 무덤덤해지게 되는 건 진통제를 먹건 안 먹건 비슷하게 시간이 흘러야 해결되겠죠. 감기 걸려 병원에 다녀서 2주 만에 낫거나 집에서 따뜻한 모과차 마시며 쉬어서 14일 만에 낫거나 하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같은 시간 걸려 나을 가슴이라면 누군가에게 기대 덜 아파하며 치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느냐 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게 흔들리는 약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새로 만나는 것은 그 누군가를 더 힘들게 만들게 할 뿐이란 걸 배웠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사랑할 자격 없다는 말이 왜 명언으로 남아있는지 얼마 전에 처절하게 배웠거든요.

봄비 보며 게시판에 처음으로 남기는 글이라 떨리는 손으로 같은 문장 열 번씩 읽어가며 글을 쓰다 보니 요즈음 한번 입에 붙이면 뗄 줄 모르는 커피가 떨어졌습니다. 매번 핸드드립해 먹기도 귀찮아 카누에 손을 대보았는데 이 녀석 생각보다 사랑스러운 맛을 내주네요. 연한 커피가 좋아 작은 보온병 하나에 카누 하나, 끟인물 한가득해서 넣어두고 물처럼 마시고 있습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 마시기엔 너무 훤한 낮이라 딱히 뭔가에 기대고 싶은데 기댈 것이 없을 때 커피만큼 좋은 녀석도 없는 듯합니다. 가서 물 좀 올려놔야겠네요.

첫 글입니다. 글쓰기 버튼이 무거운 건 알아서 아이고야 무섭긴 무섭습니다. 맘에 안 드실 수도 있고…. 얜 뭐임 싶기도 하시겠지만 _ 이별 4주차 들어서니 여러 생각이 교차하기도 하고 뜬금없이 갑자기 써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_ 봄이라 마음 일렁일렁하기도 해서요…. 늘 보기만 해왔지만 봄도 왔으니 종종, 글을 써볼까… 합니다. 반갑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유리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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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말이
12/04/02 19:18
수정 아이콘
대학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는게 글쓰고 싶어지는 글이네요. 일기같으면서도 소설같이 좋네요.
ⓘⓡⓘⓢ
12/04/02 19:23
수정 아이콘
아 슬프네요ㅡ 저도 만6년의 연애를 끝낸지 이제 3달되었는데 아직도
힘드네요
저도 필력이 좋다면 비록 눈팅만 몇년째이지만 피지알에 글을 쓰고 위로를 받고 싶었는데
그건 능력밖이고 비슷한 상황의 이 글에 이리 댓글이라도 달아봅니다
다시 슬픔에 빠지게 하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12/04/02 19:3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역시 피지알에는 필력 좋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기소개 문구도 인상깊네요.

저도 요새 임용 준비중인데 카누와 함께 하고있습니다. 제가 친구들에게 카누 전도사 역할을 하지요.
카누 정말 좋습니다 크크크
4월3일
12/04/02 19:46
수정 아이콘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데에는 다 제각기 이유가 있겠으나, 그 이유가 9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을 지울 수도 있다는데에 새삼스레 놀랐습니다. 이제 2년이 된 꼬꼬마 커플은 항상 영원히 함께하자고 합니다만, 사실 두렵고, 걱정이 되네요. 괜시리 비도 오고 생각이 많아 지는 저녁이네요.
12/04/02 19:46
수정 아이콘
야아...글 잘쓰신다...잘읽고갑니다!
12/04/02 20:0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Love&Hate
12/04/02 20:12
수정 아이콘
사랑이라는 것이 원래 빠지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힘든 법이지요.
9년동안 지켜오신 누군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더 오래도록 지키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도 2년된 꼬꼬마 커플인데 더 분발해야겠습니다.
12/04/02 20:22
수정 아이콘
따뜻한 커피한잔 앞에 놓고,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 들으면서 읽으면 좋았을 멋진 글이네요.
현실은 지하2층 밀폐된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눈치보며 읽고있는...ㅠ_ㅠ
스노우볼
12/04/02 20:41
수정 아이콘
유령회원도 로그인하게 만드는 글이네요.
저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지 이제 3일이 지났습니다. 나이가 먹은 만큼 많은 이별과 헤어짐을 경험하였지만
이별은 항상 힘들고 슬프네요.
양웬리
12/04/02 21:03
수정 아이콘
감수성 돋는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토니토니쵸파
12/04/02 22:25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12/04/03 00:5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별도 그 사람이 남겨준 어떠한 것들 중 하나일테니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설렘들과, 사귀던 시절의 행복들처럼 이 고통들 또한 진솔한 마음으로 부딪혀 아플만큼 아파보려구요. 힘낼게요. 그 오라버니분도, 유리별님도 아무쪼록 힘내주세요.
은하관제
12/04/03 01:45
수정 아이콘
잠들기 전에 유리별 님이 쓰신 글 잘 읽고 갑니다 ^^ 뭔가 아련해... 진다는 느낌이 드네요.
감수성이 한껏 돋아나는 계절이니 몸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
12/04/15 22:50
수정 아이콘
이런 좋은 글을 이제야 봤네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별은 스스로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걸 저나 그 오라버니나 둘 다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위로받아 치유하면 좀 덜 아프다거나 빨리 낫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건 아플 때 진통제 먹는 거랑 별로 다르지 않다 생각합니다. 결국, 낫던지 안 낫던지, 위에 뭐가 덮이던지 흉이 생기던지, 잊히던지 희미해지던지, 그 아픈 가슴에 익숙해져 무덤덤해지게 되는 건 진통제를 먹건 안 먹건 비슷하게 시간이 흘러야 해결되겠죠. 감기 걸려 병원에 다녀서 2주 만에 낫거나 집에서 따뜻한 모과차 마시며 쉬어서 14일 만에 낫거나 하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같은 시간 걸려 나을 가슴이라면 누군가에게 기대 덜 아파하며 치유하는 것도 나쁘지 않느냐 하실 수 있겠지만 그렇게 흔들리는 약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새로 만나는 것은 그 누군가를 더 힘들게 만들게 할 뿐이란 걸 배웠습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 사랑할 자격 없다는 말이 왜 명언으로 남아있는지 얼마 전에 처절하게 배웠거든요.

이 문단이 정말 와닿네요. 제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그녀가 절 떠나갔거나 또는 그녀가 저보다는 자신이 더 중요했기에 떠나간거 같네요.
아직도 아프고 또 제 자신을 사랑하기에 서투르지만 점점 더 사랑해가야겠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자주 부탁드립니다. ^^
유리별
12/04/24 11:35
수정 아이콘
그 문장은 정말 한번도 고치지 않고 한번에 썼답니다. 아마도 그 말이 하고싶어 이 글을 썼는지도 몰라요.
그가 그녀를 사랑해주니까, 그녀는 그녀 자신을 끊임없이 돌보아 더 멋지고 더 예뻐졌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계속 그녀를 사랑해줄 수 있게. 그에게 멋지고 예쁜 그녀가 될 수 있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주기보다, 그녀에게 무언가를 쏟아붓기전에 자기 자신이 넝마가 되고있는건 아닌지
돌아봐야만 했습니다. 그녀가 넝마가 된 자신을 바라보며, '나때문에 점점 넝마가 되어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제가 자신을 사랑해야한다고 했던 건 그런 의미랍니다.

그녀가 고고님보다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떠나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상대가 사랑해주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돌보아야 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 분명 중요한 일이었답니다.

감사합니다 고고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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