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04/06 05:09:43
Name Toyc
Subject 돈과 시간
#1
돈의 가치는 몰랐다.
전자오락기가 50원 하던 6살 어린 시절, 세뱃돈으로 받았던 할아버지의 100원을 원망했었다.
만원을 받는 친구들과 비교하며 할아버지를 원망하고 원망했다.  

열 살의 어느 여름 날, 고생만 하시던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 처음 봤던 동갑내기 이종사촌에게 아버지께서 용돈으로 쓰라며 5천원을 주셨다.
5만원으로 알고 감사히 받겠다는 말 한마디는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모두가 잠이 든 그날 밤, 아버지를 통해 듣는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 이야기 때문에 그 날은 인생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날이 되었다.

행여나 잃어버릴까 쌈지에 꼭꼭 숨겨두었던 100원..
사랑하는 손자의 행복을 바라며 중풍 때문에 편치 않은 몸을 일으켜 직접 건네 주었던 100원..
전쟁으로 다친 다리를 이끌며 힘들게 모은 재산과 소를 팔아가며 자식들의 이촌향도를 도왔던 할아버지의 100원이었다.

중풍이 할아버지의 시간을 1970년에 머물게 했던 것을 몰랐고,
1988년에 받았던 100원이 1970년의 100원임을 나는 몰랐다.
돌아가신 후에야 사랑을 알게 되었고, 돈의 가치를 눈물로 알게 되었다.

흐르기만 하는 것이 시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은 가끔 그곳에 멈춰서 있었다.
나는 열 살에 철이 조금 들었던 것 같다.


#2
시간의 가치는 알고 있었다.
재수를 하면서 1년을 보냈고, 휴학으로 다시 군대를 1년 늦어버린 지각 인생이었다.
하지만 전역을 하고 사회로 나와 복학을 앞두고 내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 방황을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만나게 된 친구가 한명 있었다.
고졸이었지만 당당한 자신감을 무기로 하여, SKY출신도 떨어진 기업에 취직해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장애인이신 아버지와 몸이 편치 않은 어머니를 위해 포기한 대학이었다.

두 가지 직업을 병행하면서도 고된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으며, 누구보다 시간을 잘 관리한 친구였다.
어려운 환경에서 밝게 웃을 수 있는 것이 능력이라면, 친구는 천재였을 것이다.

난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자연히 해결 해 줄 것만 같았다.
내가 대학이라는 시절을 고민할 때, 친구는 대학이라는 시절을 갖고 싶어했다.
낭비하고 있었던 나의 대학 시절이 누군가에겐 꿈이었던 것이다.
친구가 미래를 살 때, 과거에 살며 후회했던 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야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친구의 말에 술한잔 기울이며
인생에서 가장 많이 웃었던 하루는 이제 추억이 되었다.
친구의 시간은 스물 다섯에 멈춰 흐르지 않게 되었고,
나는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어만 해야하는 것이 얼마나 슬픈 것인지 알게 되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하길 바랬던 내 자신을 한탄했다.
결국 나는 시간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30대가 되었다.
멈춰버린 몇 개의 시간들이 가끔씩 걷거나 쉬고싶을 때 내게 더 열심히 뛰라고 채찍질 해준다.
난 지금 시간이란 채찍으로 살아간다.

--------------------------------------------------------------------------------------------------------

pgr 눈팅은 몇 년이 되었는데 글은 처음 써보네요..
취업준비하다 갑작스레 할아버지 생각이 떠올라서 글을 끄적이다 보니 길어졌네요..
부족한 글솜씨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29 22:29)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Nothing on you
11/04/06 05:39
수정 아이콘
저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군요. 잘 읽고 갑니다. 추천!
담배피는씨
11/04/06 09:47
수정 아이콘
부모님의 사랑을 금전적으로 계산 할 수 없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이런 걸 사달라고 졸랐고..
부모님은 그걸 들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집에 전화라도 한통 넣어야 겠습니다..
기습의 샤아
11/04/06 09:49
수정 아이콘
가슴이 짠해지네요...
저도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에 잠시 울컥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1/04/06 10:09
수정 아이콘
아침에 매우 좋은글 읽고 갑니다..
댓글수와 추천수가 같이 이 대단함..^^
11/04/06 13:33
수정 아이콘
저도 할아버지 생각에 울컥하네요.
감사합니다
쌀이없어요
11/04/06 16:30
수정 아이콘
아.. 눈물이 울컥 ㅠㅡㅠ
좋은 글 잘 보고 가요
11/04/06 18:07
수정 아이콘
2번 글에서 좀 울컥했네요,,,
보고싶다'라는 감정은 참 묘한 것 같아요.
11/04/06 18:24
수정 아이콘
이렇게 글을 잘 쓰시면서 눈팅만 하시다니. 나쁩니다 ^^;;;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651 중복과 피드백 그리고 봇 [63] 김치찌개5136 11/12/08 5136
1650 커피메뉴 가이드라인 [87] nickyo9708 11/12/07 9708
1649 Scars into Stars [15] 삭제됨5267 11/12/06 5267
1648 [해외축구] 첼시에게 불어닥친 대격변의 돌풍…과연 그 결과는? [38] 클로로 루실루플6723 11/12/06 6723
1647 오늘 프로리그를 보면서 드는 여러 생각들 [36] noknow9312 11/11/26 9312
1646 이공계의 길을 가려는 후배님들에게..11 미국 대학원 지원시 팁. [25] OrBef8081 11/12/05 8081
1645 윤관의 여진 정벌, 그리고 척준경 - (3) 9성 완성, 그리고 반환 [10] 눈시BBver.26263 11/12/04 6263
1644 교차로 '불'완전 정복 - 2 : 회전교차로 [10] Lilliput4640 11/12/03 4640
1643 나는 차였다. [24] 리신OP7225 11/12/02 7225
1642 올해 레지던트 지원율 - 우리나라 의료계의 문제 - [98] Timeless7522 11/12/02 7522
1641 개인 미디어의 시대 [15] 몽키.D.루피5292 11/12/01 5292
1640 근대사를 다루지 못 하는 이유 (추가 끝) [100] 눈시BBver.26695 11/11/30 6695
1639 다단계 피해 예방 혹은 Anti’를 위한 글(+링크 모음) : 結(결) 편 [11] 르웰린견습생4345 11/11/30 4345
1638 낙태의 왕국이었던 대한민국 [16] 凡人10457 11/11/29 10457
1637 광개토 - 외전. 백제의 요서경략설 [12] 눈시BBver.24588 11/11/29 4588
1636 [이벤트/경품] 주어진 단어로 오행시를 지어주세요~ - 마감 - [63] AraTa_JobsRIP5321 11/11/23 5321
1635 서른둘 즈음에 [26] madtree8238 11/07/05 8238
1634 결혼했더니 "아이고 나 죽네" [112] 삭제됨11495 11/11/28 11495
1633 스타1유저가 스타2를 하지 않는 이유 [83] 김연우14038 11/05/15 14038
1632 '메카닉 vs 퀸드라' - 저그의 마지막 카드인가? (경기 리뷰) [102] 냥이풀13128 11/04/29 13128
1631 DSL 택꼼록 관전평 [25] fd테란9975 11/04/22 9975
1630 돈과 시간 [8] Toyc4822 11/04/06 4822
1629 안 되는 것을 하는 것이 진짜 하는 것이다. + 2차 덧글 [61] Lean Back8920 11/02/09 892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