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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6/15 17:22
하긴 이성계가 등장하기 전 고려 말 200년은 한반도에서 최악의 지옥 시기 중 하나죠
대기근 같은 천재지변을 제외하면 1등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요 @_@...
22/06/15 15:51
하긴 하는게 맞다란 결과론적 입장에서 보면 코인보단 주식이 맞는 비유같네요 망했다에만 집중해서 어차피 하면 안될걸 끌여들었네요
감사합니다
22/06/15 15:42
조선시대 상인이나 상단이란 놈들 하는 것만 봐도 유학자들이 사람취급 안할만 하지 싶습니다
말이 장사지 하는 짓은 폭력조직과 다를 바 없거든요 심지어 서양에서 오는 장사치라는 놈들도 군함끌고와서 대포를 쏘는데
22/06/15 16:02
은을 들고 다니고 활용 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교초 발행한겁니다… 처음에는 은 수량에 딱 맞춰서 발행했지만 결국 교초를 남발한거죠.
모든 제국의 화폐가 다 비슷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달러가 금보관증으로 시작했지만 현재 달러 금으로 직접 바꿔주나요? 중간에 1온스당 35달러로 정했지만 어느새 1온스에 2000달러에 육박할만큼 달러를 찍었죠.
22/06/15 16:04
일본도 은광 열심히 캐다가 곧 고갈되서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놈들이 은화 쓸어감) 시간이 갈수록 일본은화의 은 함량을 줄입니다. 스페인은 남미(은으로된 산 이라는 포토시광산)에서 은을 가져와 중국 물건을 사갔고 네덜란드는 동남아 향신료를 가져와 은을 회수하면서 질기게 버텼고 위 두 국가가 망하고나서 들어온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무역으로 은이 고갈되는걸 못버텨서 쓴방법이 [아편]유통입니다. 그 결과가 아편전쟁 아무튼 이 당시 전세계 은들의 절반가까이는 중국으로 흡수되었고 명, 청은 이유도 모른체 인플레이션이 발생해서 망했죠. 조선은 의도적으로 은화사용을 거부했습니다. (은광도 별로 없었고)
22/06/15 16:12
조선도 은광은 꽤 있었는데 일부러 캐는 걸 거부했습니다. 중국이 당시 은을 썼기 때문에, 자칫하면 중국이 은을 바치라할까바 겁을 냈거든요.
22/06/15 15:45
그러게요...원이 교역망 망하면서 나라가 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조선에서 저런 생각을 가지고 방침을 정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근거가 있는 소린지..
22/06/15 15:49
세종의 화폐도입과 신하들의 반대 논거, 그리고 실패 과정을 보면 정말로 조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화폐와 상업을 대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2/06/15 19:25
겉으로야 명분을 내세우니 그렇지 실제로는 이런저런 계산 다 하는 거죠.
조선시대 불교 배격도... 건국공신인 정도전이 쓴 <불씨잡변> 같은 책에서 나온 건데, 그 내용을 보면 정도전이 실제로는 불교 교리에 얼마나 해박했는지, 그러면서도 어떻게 그 해박한 지식을 이용해 불교를 교묘하게 공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2/06/15 15:46
무역이라는게 아 그냥 대충 거래하면 되는거 아님?
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만큼 쉬운게 아닙니다. 고려말,조선초 상황상 주위 국가들이 죄다 개판이어서 더욱 그렇긴 하지만.. 조선입장에서 뭔가 하나 크게 내세울 무역품도 없지요. 비단, 도자기를 육성한다해서 원조인 중국대비 경쟁력이있는게 아니고 지금까지 유명한 고려인삼 정도인데.. 사극에서처럼 엄청난 수요가 있었던것도 아니죠. 저때야 당연히 산업혁명전이니 무역품이랄건 대부분 농산물인데,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무역품들.. 후추, 설탕, 목화(와 면직물), 차 조선에서 상업이 발달하긴 어렵다고 봐야죠. 중국은 명,청 모두 차무역이 중심이었고 일본은 당시 국제통화인 은 자체를 많이 캤습니다.
22/06/15 17:27
하긴 영국도 차이나(도자기류)가 하도 많이 수입되어서 돈 좀 벌어볼려고 면 좀 팔려고 했는데
청에서 그런거 필요없음 해버리자 아편을 팔아서 수입적자를 해소하려고 했었죠 @_@
22/06/15 15:46
그냥 '사농공상' 적혀있으니 그대로 실천했을 뿐, 이런 생각을 하긴 했을까요? 국제 무역망이 붕괴되서 상업을 못하면, 적어도 국내 상업이라도 중시했으면 모르되 조선은 상인을 극도로 천시했죠.
22/06/15 15:50
그렇게 상업을 천시한 나라가 태종때부터 화폐보급하려고 그렇게 노력했을리가 없죠. 농업이 더 중요했을 뿐 상업 자체에 대한 천시는 그냥 고정관념에 가깝습니다.
22/06/15 15:55
화폐 보급 실패 자체가 상업을 천시했다는 적나라한 증거 아닌가요? 상업이 발달했으면 보급하려고 노력 안해도 자연스럽게 성립이 되었을 겁니다. 일부 위정자(세종, 숙종 등등)가 화폐를 만드려는 시도를 했다는게 조선이 상업을 천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안 되죠.
22/06/15 15:57
화폐보급이 안 된건 위정자가 기피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몇몇 왕이 아니리 거의 모든 신료들이 화폐보급에 긍정적이었습니다. 실록만 봐도 관련 기록들이 넘쳐납니다. 문제는 위정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기피했기 때문이에요.
22/06/15 16:01
그러니까 그게 '상업 천시'라니까요. 몇몇 위정자가 "상업을 진흥시키거라" 라고 하는게 상업 중시입니까? 아니면 실질적인 백성들이 "아 상업은 중요한 거구나" 하고 인식하는게 상업 중시입니까? 그리고 화폐 제도와 상업 중시를 혼동해서 쓰시는데, 진정 중상주의 정책을 쓰려면 도로 건설, 시장 개축 등 조선 후반기에나 간신히 등장하는 일들을 해줘야 상업이 성장하지 않을까요? 무턱대고 화폐 보급하겠다고 (사실 저는 세금 쉽게 거두려는 목적으로 봅니다) 이걸 상업 중시책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22/06/15 16:06
당시 동아시아에서 상업이 이렇게 중요한 거다라고 인식 시킨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말해주셔야겠죠? 당시 동아시아에사 농업보다 상업을 중시해서 백성들에게 상업이 이렇게 중요한 거야. 한 나라가 대체 어디 있나요.
그리고 태종실록만 봐도 왜 세금 목적으로 화폐를 보급했다는 소리를 절대 못할텐데요. 막말로 조정에서 현물을 받는 게 이득일까요. 실질적 가치도 없는 화폐로 세금을 받는 게 이득일까요?
22/06/15 16:11
일본이요. 일본은 태생부터 섬나라라서 훨씬 무역에 대한 반감이 덜했고, 나라에 은광이 많아서 은이 풍부했으며 에도 막부 이후에는 정기적인 다이묘의 수도 방문으로 시장이 발달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중국이야 워낙 덩어리가 크니까 서양인들이 알아서 몰려든 것에 가깝고...
현군이신 세종대왕께서도 화폐 보급에 결국 실패하는데, 상업을 증진시키려는 의지가 모자랐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반감, 그리고 근본적으로 장사가 성립되기 어려운 환경 (사실 백성들의 화폐에 대한 적대시도 포함해서) 을 극복하지 못햇을 뿐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농업 환경이 다 박살나버리는 임진왜란 이후에나 간신히 상업을 위한 싹이 트기 시작하죠.
22/06/15 16:47
일본은 해양국가고 당연히 반도인 조선에 비해 무역업 발전에 대한 압력이 훨씬 강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본조차 나카센도와 같은 도로는 환경적 여건으로 에도시대에 와서야 제대로 정비됩니다.
22/06/15 16:47
상업 중시가 아니면 상업 천시로 생각하시는건가요 그 사이에 경시 도외시 하야시 뭐 많을거 같지 않나요 농업에 비교하면야 화폐를 유통하든 안하려고하든 천시가 맞습니다만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도로건설같은 사회간접자본 건설개념 자체가 있다는것만으로 오버테크놀로지 아닌가요 당장 박정희가 경부고속도로 만든다고 할때도 김대중등 그런거 왜만드냐고 헀던게 우리나라인데 조선시대에 도로 닦아야지 개념을 들고온다는게 너무 현대인 관점에 맞춰서 재단하는거같습니다.
22/06/15 19:14
대놓고 상업을 말업(반대로 농업은 국가의 본이라고 해서 농상을 본말이라고 불렀습니다)이라고 폄하하고 거의 증오하기까지 한 조선 사대부들도 아이큐가 80이 아닌 이상 화폐 유통이 국가 운영에서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폐 발행으로 인한 주조차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폐 발행을 시도한 겁니다. 이 기조는 나중에 화폐가 정착하고 나서도 다르지 않아서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정부의 공조직에서 예산 집행하려고 알아서 화폐 주조하고 그랬습니다.
22/06/15 15:58
당연히 이유가 있고, 화폐 반대하는 유학자들이 이미 다 실록에 적어놨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험하다, 무역할 길이 없다, 백성들은 가난하다, 서로 거래할 특산품이 안 나는 나라다, 모두가 상업에만 종사하면 농사는 누가 짓냐, 농사는 인본지중대사다, 옛 성현께서 사농공상이라고 하셨다." 등등등등...... 이유야 있죠. 다만 우리는 현대인이니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가 많을 뿐.
22/06/15 16:21
신기한 게 다른 댓글에는 다른 나라가 상업이 발달한 이유랑 조선이 상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다 읊으시면서 왜 이 댓글에는 옛날 사람이 생각도 없이 옛날 논리에 얽힌 천치 취급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2/06/15 16:24
성리학이 근본적으로 '옛 성현의 말씀을 익히자' 라는 학문이라, 특별히 깨인 사람이 아니면 성리학자들은 전부 보수적인 성향을 띄기 쉽거든요. 그리고 조선을 내내 지배했던 이 성리학이 점점 교조화되면서, 학문에서조차 비판을 꺼리게 되고, 상대 당파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나라가 철저하게 수구 세력으로 변합니다. 기존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자세로요. 아시다시피 이 자세를 오래 유지하면서 맞은 결말이...
저는 옛날 사람이 어리석다기 보다는 유학자들이 어리석다고 보는 쪽입니다.
22/06/15 16:45
비슷한 것이 서양에도 있었습니다. 크리스트교라고...
말씀하신 성리학에 대한 모든 설명이 크리스트교와도 일치하는데요? 저는 옛날 사람들도, 유학자들도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2/06/15 16:52
성리학은 학문이고, 기독교는 종교인데 서로 대응이 가능한 거 같지도 않고 설명이 일치하는 거 같지도 않습니다. 서양과 우리의 옛날 모습에서는 공학과 상업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물론 환경과 지리적인 영향은 절대적으로 큽니다) 애석하게도 성리학으로는 그 차이를 극복할 수 없는 학문이었던거죠.
22/06/16 02:12
류지나 님// 뭔가 납득할 수 없는 말씀이라 참견합니다. 성리학과 기독교는 매우 유사합니다. 즉 기독교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관, 질서에 대한 학습과정에 가깝습니다. 특히 중세를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인간과 자연을 묶어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하려고 한 측면에서 닮아도 너무 닮은 것이 성리학과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에서 성리학적 세계관이 타격을 입자 많은 이들이 재빠르게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건너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22/06/15 16:51
성리학에게 성현의 말씀은 자기가 깨우친 원리와 이해에 대한 레퍼런스일 뿐입니다. 성리학의 교조화라면 훈구파에서부터 이미 발생하였던 것이고 오히려 이건 선조대 이후 성리학으로 무장한 명신들로 복구를 한 케이스구요. 환국 이후의 교조화를 논해 봐야 조선 500년 역사에서 상업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22/06/15 16:57
역사는 되돌려볼 수가 없는 거니까, 조선의 상업 발달 부진이 성리학 때문이라고 단정짓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학문이었던 성리학이 실제적인 과학, 공학, 상공업과는 인연이 멀었던 학문이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구요. 그나마 세종대왕 정도의 깬 사람이거나, 후기에나 등장하는 일부 실학파를 제외하면 분열과 당파싸움이 잦았다는 것또한 애석할 뿐입니다.
22/06/15 16:28
조선이 정말 상업중시 국가였다면, 이 모든 어려움을 안고서도 상업의 증진에 노력해야 하는데 별로 그렇진 않았습니다. 성종 이후로는 사실 정치가 너무 어지러워서 상업이고 자시고를 따질 환경이 안 되었고.... 의지가 없어서 못했던, 능력이 부족해서 못했던 결국 못 한건 못한거니까요.
22/06/15 17:08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상업 증진에 역량을 쏟는게 당시 상황에 맞는 선택이었는지부터 따져보아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일단 님이 이유는 다 있지요 라고 해놓은것만 봐도 그냥 사농공상이라고 적혀있으니까 생각 없이 상업 천시 했다는 아닌 거 같은데요. 이유가 있잖아요
22/06/15 17:12
덧글이 길어져서 혼란스러우신것 같은데
조선이 상업을 중시했다고 하지않았습니다. 상업을 경시한것에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고 그 이유는 님의 윗댓에 써있는대로인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최초에 [그냥 '사농공상' 적혀있으니 그대로 실천했을 뿐, 이런 생각을 하긴 했을까요] 라고 쓰신건 잊으셨나요?
22/06/15 15:55
이것도 영향이 있고 더 큰건 명이 해적때문에 골이 아파서 해금령을 시행해버리니 민간무역이 막혀버린게 큽니다.
당시 조선 기술로 원양을 건너서 무역할만한 기술력도 없었고 교역의 이득이 크지 않으니 명에서 근해무역 막아서 조선도 어차피 돈 안나오는 산업 답도 없으니 신경쓸 이유가 없었습니다. 교초는 원만 썼던게 아니라 송에서도 썼어서...
22/06/15 15:55
조선의 화폐보급에 대한 노력은 조선 극초기인 태종 때부터 시작됩니다만 전부다 다 실패했죠. 이유가 아무리 국가에서 장려해도 백성이 안 쓴다는 겁니다. 전근대시절치곤 상당히 중앙집권이 잘 됐던 조선에서 화폐 보급만큼음 꾸준히 실패했는데 이유가 고려말 작살난 화폐경제에 백성들이 혀를 내두르고 절대 기피했기 때문이죠.
결국 실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쌀과 옷감이 화폐의 기능을 대신했고 대동법 이후 방납 규모가 줄어들고 규모의 경제가 어느정도 생기니 자연스럽게 화폐보급이 조금씩 이루어졌습니다. 화폐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는데 300년이 넘게 걸린 걸 보면 당시 민간에서 얼마나 화폐 통용을 기피했는지 알 수 있죠.
22/06/15 16:23
한반도 지형의 문제도 있었겠죠. 상업이 발달하려면 유통망의 근간이 되는 교통인프라가 갖춰져야 하는데 한반도는 토목기술이 어느정도 발달한 20세기 들어와서도 경부고속도로 뚫는데 악전고투를 해가면서 뚫었고 영동고속도로는 21세기는 되어서야 '고속도로'의 타이틀에 걸맞는 도로로 만들 정도로 육상교통은 어려움이 많다보니
22/06/15 16:26
애초에 명이랑 청이 은이란 은은 다 빨아가서 귀금속 본위제를 시도할 수조차 없었던거죠
현물 외에는 백성 기피 등으로 화폐도입도 안되고, 땅은 산투성이에 연교차가 커서 길 깔기도 힘들고 강은 하상계수가 커서 운하로 작용하기 힘들고, 세계적으로 특산품이 될만한 작물이나 광물도 없고. 말 그대로 인적자원 원툴인데 인적자원 배양에 가장 필요한건 식량이죠
22/06/15 16:35
청의 은본위제가 결정타이긴 했을 겁니다. 덩치도, 산물도, 자원도 비교가 안되는 옆 나라가 은본위제를 쓰는데, 우리나라가 따라하겠답시고 은을 화폐로 썼다간 그야말로 은을 쪽쪽 빨리며 경제적 속국이 되었겠죠. 이게 아마 최대 고민거리이긴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구리를 쓰자니 당시의 상황으로는 구리 화폐의 가치를 담보할 수가 없고......
22/06/15 16:34
무역에 대한 환상이 있으신분이 있는거같은데 무역하려면 잉여생산물이 있어야 무역을하던지하죠
애초에 삼남지방 말고는 잉여생산물이 있기힘든 지형구조에서 무슨 무역을해요.. 조선초는 고러말 황폐화매꾸는것도 힘들었고 중기는 왜란 호란 경신대기근으로 끝이고요
22/06/15 16:51
지금도 그렇지만, 전근대 한반도는 농업 생산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있어서는 똥땅 그 자체라 애초에 상업 발전이 힘든 환경이죠.
역사적으로 상업은 잉여생산물이 펌핑되어 잘 나오든, 아니면 농사를 짓기에는 파멸적으로 안 좋은 땅이든 둘 중 하나여야 사회적으로 부각이 좀 됩니다. 그런데 전근대 한반도는 둘 중 그 어느 쪽도 아니었죠. 그러니 농업에 올인하는 수밖에요.
22/06/15 16:52
임용한 박사님이 조선에 대한 안타까움을 이야기 하면서도 그렇다고 조선의 관료들이, 정확히는 우리 조상님들이 바보였던 것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꼭 덧붙이죠. 이것만 보면 썩은 것 같고 이것만 보면 무능한 것 같고 하지만 이러이러한 이유가 있었다는 설명을 하시면서요. 전반적인 이야기를 수박겉핥기 정도라도 알게 되면 과거 역사 다 아는 슈퍼 전생자가 조선 바꾸기 이런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죠.
22/06/15 16:59
일본과 교역은 활발했었나요? 이성계가 대마도 정벌한 걸로 기억하는데요. 일본과 교역하는데, 원나라는 별 문제가 아닐 것 같고요.
몽골군, 고려 무신정권, 왜구. 이것이 조선의 맥락인 것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유교가 들어오고 '무'는 낮춰지고, '문'이 높여진 거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상업은 '무'와 관련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교역을 하는 방법이 무력이니까요.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교역을 유리하게 강제하기 위해서도 그렇고요. 오늘날 동맹국인 미국의 무력 덕분에 한국이 교역을 활발히 할 수 있는 것처럼요. 제국주의도 생각을 해보면, 상업과 군사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곳을 발견했을 때, 무력으로 점거할 수 없으면, 일단 상업으로 교역하면서 정보를 얻고 기반을 만들고, 그러다가 약하다 싶으면 이제 침략을 하는 패턴이 있었던 걸로 이해하고요. 그러면 공격이든 방어든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상업을 억압하고, 설령 부가 줄어들더라도 안정을 꾀하는게 좋은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역에 의한 이득이 매우 컸다면야 달리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딱히 교역할만한 특별한게 없었다면 걸어잠그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지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이런 면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조선이 숲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그리고 나무를 어디에 사용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나무로 배를 만들어서 교역을 하고, 나무로 숯을 만들어서 도자기를 만들고, 나무로 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등을 했다면 상업 위주인 것이고, 그냥 불태워버리고 농지로 썼다면 농업 위주가 되는 것 아닐까 싶고요. 삼림파괴가 광범위하게 일어나면, 처음에는 농지가 늘어서 인구가 늘어나다가, 삼림파괴로 물공급이나 영양분, 토양침식 등에 있어 문제가 생기니 농사가 안 되어 많은 인구를 먹여살리지 못하니 내전이나 기근 등으로 망하는 패턴이 있는 걸로 알고요. 그러니 조선의 상업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면 조선의 숲에 대해 살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숲에서는 아마 특산품도 나올 수 있을 테니 더욱 그렇고요. 구글링을 조금 해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민심을 추스리고, 고려 말의 사점폐단(私占弊端)을 개혁하고자 산림을 개인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백성이 이용해야 할 산림을 권세가가 지배하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 https://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8692&sitePage=1-2-1 권세가가 상선도 만들 수 있고, 교역할 물품을 구매하거나 제조할 자금도 만들 수 있고, 무력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 백성은 외국과 그런 걸 하기 곤란할 것입니다. 이건 숲을 기업이 아니라, 국가가 가져간다는 얘기로 이해를 해봤습니다. 그러면 상인과 관료간 이해관계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문관들일 텐데 관료는 상업이 흥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농업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용이한데, 상업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역사적 맥락도 있고, 유교라면 더욱 그렇게 되기 쉬울 것 같고요. 관료는 '양반'을 뜻할 것이고요. 뭐 아는게 없어서, 티끌만한 정보를 가지고 추론한 것이지만, '상업하기에 불리한 국제 환경에 있었다' 이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유교와 상업 억압이 관련이 적다는 얘기는 과도한 것으로 이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 같습니다.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는 유교의 특징이고, 이는 상업과 친밀하지 않은 거라 생각합니다.
22/06/15 17:08
조선과 일본과 교역은 나름 대마도를 통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는데 임진왜란이후로 그 규모가 작아졌고 그 뒤로 일본이 조선을 통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이 직무역을 하는 방향으로 변해가면서 조선의 중계무역이 골로가는바람에 유명무실해졌습니다.
조선초기엔 조선 면포를 일본이 수입해가는식이었는데 그 품질이 점차 일본에게 역전당하는등 무역에서의 경쟁력을 잃어간걸로 압니다.
22/06/15 18:19
진위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위키백과에 이런 말도 있네요.
'조선 도공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된다. 유럽 귀족들에겐 일본 도자기는 귀한 사치품였고, 이 때문에 일본은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타국으로 납치된 도공들은 대부분 조선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조선 포로들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에도, 조선 도공들은 쇄환을 거부하거나 쇄환하기 싫어서 칼로 자기 팔을 찌르는 자해 행위도 했다. 왜냐하면 [조선은 사농공상이라는 논리로 기술자를 천시하는 풍조가 있어, 조선 도공들은] 조선으로 돌아가 봤자, 일본에서 포로생활한 것까지 포함해 불이익을 볼 우려가 있었다. 그런 반면, 일본에 정착한 천시받던 도공들은 사무라이와 같은 계급으로 우대 받았고 몇 년 만에 재산도 크게 모았다. 이들은 에도 시대 일본이 부를 축적하고 서양과 교류하며 일본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 https://ko.wikipedia.org/wiki/조선초기전성기론 만약 맞는 말이라면, 안타까운 일인 것 같습니다.
22/06/15 17:52
관련하여 보면 좋을만한 자료가 있어서 덧붙입니다. 조선의 삼림을 연구한 논문인데, 간단히 요약하자면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렇습니다. 조선의 삼림을 권세가가 지배하고 있던 것을, 농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개방해줬고, 농민들은 숲을 농지로 개간합니다. 농지가 늘자 인구가 증가합니다. 삼림은 화전으로 불태워져서 나무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늘어난 인구의 목재 사용에 의해서도 나무가 사라집니다. 그 결과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농본 정책을 표방한 조선]은 국초부터 농지개간을 통한 경작지의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개간될 토지는 이전에 산림천택으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조선은 이곳에 대해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로 불리는 [조선의 산림 개방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의 인구는 15세기 초 570여 만이던 조선의 인구가 19세기 최 말기 에 1700만을 넘어섰다.] [19세기 말~20 세기 초의 한반도는 초원에 가까울 정도로 숲이 훼손되고 고갈되었다.']
최근 <총, 균, 쇠>란 책으로 유명하신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후속작 <문명의 붕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던군요. ' 삼림 파괴는 이 책에서 다룬 과거 사회들이 붕괴된 주된 원인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유일한 주된 원인이었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
22/06/15 17:54
https://www.dbpia.co.kr/pdf/pdfView.do?nodeId=NODE07129823&mark=0&useDate=&ipRange=N&accessgl=Y&language=ko_KR&hasTopBanner=true
농본 정책을 표방한 조선은 국초부터 농지개간을 통한 경작지의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개간될 토지는 이전에 산림천택으로 불리던 곳이었는데, 조선은 이곳에 대해 ‘산림천택 여민공지(山林川澤 與民共之)’로 불리는 조선의 산림 개방 정책을 시행했다. 농지개간의 장려와 산림의 개방은 이전까지 유지되었던 원시적 산림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한반도는 15~19세기를 경과하면서 10% 이내였던 경작지가 25%가량으로 늘어났고, 이에 조응하여 미개발의 산림천택은 줄어 들었다. 특히 인구와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가용산림에서 숲의 이용이 늘어 났고, 이는 임목축적의 감소로 이어졌다. 특히 임목축적의 감소는 극적으로 진행되었는데 ... 특히 임목축적의 감소는 극적으로 진행되었는데 15세기 중엽 600m3/ha, 총 124억m3로 원시림에 가까웠던 한반도의 숲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43m3/ha, 7억m3(혹은 1.2m3/ha, 1,880만m3) 이하가 되었다. 19세기 말~20 세기 초의 한반도는 초원에 가까울 정도로 숲이 훼손되고 고갈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15~19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이처럼 숲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고갈된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규모 건축과 배의 건 조, 자염, 온돌, 철의제련, 도자기와옹기의제조등은모두나무를땔감이 나 목재 등의 원료로 사용하기에 산림훼손의 핵심적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17세기 이래 화전 개발로 인한 산지개간의 확대 역시 산림훼손의 중요한 요인으로 주목했다. ... 조선의 인구는 15세기 초 570여 만이던 조선의 인구가 19세기 최 말기 에 1700만을 넘어섰다. 인구는 약 3배 늘었다. ... 15~19세기 전통적인 생활방식에 따른 목재와 땔감의 수요량을 20세기 초 한반도의 숲이 초원 수준으로 고갈된 원인으로 단언할 수 없다. 그렇지만 20세기 초 한반도의 숲은 심각한 수준으로 고갈되었기에 이를 수량화하여 추산할 수 없지만, 역사적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연성있는 설명은 제시할 수 있다. 우선 늘어난 경작지는 숲의 면적을 영구적으로 축소하였고, 늘어난 인구 는 숲의 사이사이에 촌락을 만들어 거주하면서 많은 양의 목재와 땔감을 지속적으로 소비했다. 그 결과 인구가 집결된 지역 주변을 중심으로 영구 적으로 고갈된 숲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고갈된 숲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늘어났다.
22/06/15 18:25
<문명의 파괴>에서는 일본의 삼림파괴 위기 극복 사례가 소개되는데요. 우리의 경우에는 어땠을지 궁금했는데, 아마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님이 조선을 연구하신다면, 조선도 삼림파괴가 조선이 망한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말씀하실 가능성이 큰 듯합니다.
22/06/15 17:11
조선이 계속해서 농업 중심 사회로 남으며 대내외적으로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지 못한 데에는 본문을 포함하여 여러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근본적으로는 유교적 정신, 질서, 이상을 중시한 영향이 분명히 있지 않나요? 일견 사회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22/06/15 17:17
유학 탓으로 퉁치기에는 유학이 관학이었으면서도 상업이 성행했던 나라들을 설명 못하죠. 유학을 조선의 상업 발전이 부진했던 핵심 팩터로 꼽는건 프로테스탄티즘 정신 타령하면서 유사역사학 펼치던 막스 베버 수준에서 한발짝도 앞으로 더 못나가는 겁니다.
22/06/15 17:32
성리학이더라도 제가 위에 적은 내용은 유효합니다. 명과 청, 그리고 15세기 이후 베트남 왕조도 관학이자 사회적으로 메이저했던 학문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이었지만, 얘네보고 상업 발전이 부진했다고는 안 하니까요.
22/06/15 17:38
상업의 중흥은 지배 학문보다 나라의 크기나 위치, 지형 등의 요소가 더 관련있다고 한다면 맞는 말씀이고, 그렇다고 아주 영향력이 없었다고 하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겠죠.
22/06/15 17:34
온전히 유학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지만 유학에도 분명 책임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큰 틀에서는 똑같이 유교 사회를 표방하고 있다 하더라도 각 사회의 특성에 따라 세부적으로는 각기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듯 유학이 근본적으로 상업과 무역의 발달에 큰 장애 요인으로 작용을 하는 것이 참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고유 요인에 의해 그게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상쇄가 되어 각기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22/06/15 17:43
유학에 상업 부진의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탓하려면 유학이 애초에 그런 이데올로기를 강하게 부르짖고 있었는지, 아니면 조선의 지배층이 유학을 받아들이면서 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해석을 한건지 그것부터 확인해야죠. 근데 유학 원전에서는 사농공상 말고도 사상농공도 있고 뒤죽박죽인데다가, 성리학을 창시한 정씨 형제와 주희가 원전에 단 주석을 봐도 상업을 대놓고 천시했다고 볼만한 흔적도 딱히 없습니다.
22/06/15 18:18
순리라고 하는 자연적 질서를 중시하면서도 극도의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며 궁극적으로 백성의 안녕을 꾀하는 것이 유학의 본질적 특성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상제나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적, 사회적 질서의 중시, 정치와 경제 면에서 민본주의와 농본주의의 채택, 쾌락과 물질 등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크게 경계하며 이를 자극할 수 있는 요인들을 제도적, 관습적으로 가능한 억제 및 제거하려고 했던 모습 등이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나는 특징들이고요. 본디 상업이나 자본주의의 발달은 이익 또는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며,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과 기술의 발달도 더 나은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법인데 바로 이 점에서 유교적 정신, 질서, 이상과는 대립점이 발생하며, 실제로도 조선 같은 경우 이를 타파할 별다른 여건이 마련되지 못해 결국 이에 갇혀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말씀하신 것처럼 유학의 순수한 모습이 아닌 조선식으로 해석 및 변형이 된 유학이거나 아니면 단순히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는 있겠죠.
22/06/15 18:37
'인간의 근원적 욕망'이라 하시니, 관련하여 맬서스의 <인구론>이 떠오릅니다. 사치품이 인구증가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거든요.
'국민의 부와 행복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국민 대다수가 향유하는 사치이지 결코 소수만의 과도한 사치가 아니다. 새 식민지 국가를 제외하고, 모든 사회에서는 반드시 일정한 인구 억제가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편의 및 기호 상품에 대한 수요가 결혼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고찰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사치품에 대한 국민의 욕구는 사회의 행복과 도덕에 어떠한 악영향도 끼치지 않으면서 가장 효과적으로 결혼을 억제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치품의 대중화는 매우 환영할 만하며, 빈곤의 기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은 농지를 늘리는 걸 중시하고, 삼림을 파괴하면서까지 인구를 증가시키다가 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원인이 그것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요. 오늘날 우리나라는 인구증가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인구감소 때문에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는데, 의미심장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22/06/15 19:31
당장 조선 성리학(엄밀히 말하면 조선은 '유학' 중에서도 '성리학'이라고 해야 합니다)의 발원지였던 송나라가 전근대에서 손꼽히는 무역대국이었죠.
22/06/15 19:38
첨언하자면, 그런데 재밌는 건 중국조차도 성리학의 발원지였지만 조선처럼 경직된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억불숭유를 국가시책으로 실천하거나 성리학 외에는 다른 유학의 분파학문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주희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등의 모습은 보기 힘들었죠...
결국 말씀하시는 '유교'의 영향력을 이야기하려면, 정확히는 '조선 유교'나 '조선 성리학'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22/06/15 17:21
조선이 무역하기 힘든 요인중에 왜구 문제도 한몫 했었겠죠
왜구가 그냥 해안가 약탈하는 해적이 아니었더라구요. 고려때는 국가멸망위기까지 갈정도로 탈탈 털렸고… 조선때도 무역하던 왜인들이 난을 일으키는 등 외국인(일본인)에게 많이 곤욕을 치루었었죠 여기에 하이라이트로 20만의 대규모 군사 드랍까지 크크크 이런 상황에서 외국에 항구를 개방하고 적극적으로 국제 무역에 나서긴 힘들지않나싶습니다
22/06/15 17:38
왜구는 단순 조선의 문제만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문제였을 정도였죠... 명도 왜구의 지속된 침입과 내륙으로 까지 침입해
계속해서 내륙을 맴돌았던 게릴라전의 방식으로 싸우다보니 토벌에 크게 고생했기도 했고요. 한편 이러한 왜구는 초기엔 우리가 아는 일본 열도에서 왔던 이들이 다수였지만 명의 암군 중 하나인 가정제 시기 때 주로 활동한 후기 왜구로 갈수록 동남 해안에서 어려운 삶을 이어가던 중국인들이 상당수를 이뤘고 동남아 계통, 조선인 심지어는 포르투갈인들도 섞여 있던 해적의 성격으로 나라와 정치체의 혼란과 붕괴로 인해 사회가 어지러워지며 발생한 도적들이 바다로 나갔던 경우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22/06/15 19:56
명청 교체기에 대만섬을 점령한 정성공이 중일 혼혈에 나가사키 출신이죠. (정성공 세력도 말이 멸만흥한이지 반 해적...) 일본은 공식적으로 쇄국 정책 자주 길게 했습니다만 영토 특성상에도 그렇고 지배체제가 강력중앙집권이 아니라서 중국 동남아쪽 언제나 교류해왔죠.
22/06/15 17:24
제가 우연히 유투브에서 필리핀 이민을 간 분이 말씀하시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요, 필리핀이 발전 못하는 이유 중에서 (물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필리핀은 외국인이 자국에 투자하는 걸 엄청 싫어하고 제도적으로 견제도 빡세다는 걸 봤습니다. 필리핀 땅에 자원이 많이 있는데 그걸 개발할 돈이 없으면 외국기업이 자본 넣고 개발해서 이익을 나눠 갖는 게 아니고 그냥 묻어둔다는 겁니다. 전 이게 국부를 빼간다는 관점에서 싫어한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싫어하는 게 아닙니다. 외국에서 필리핀에서 투자해서 기업 세우고 직원들한테 월급 주면 아무래도 필리핀 현지 기업들보단 선진국에서 온 기업이 많이 줄 것이고 필리핀이라는 국가의 기득권들은 지금도 충분히 잘사는데 괜히 외국애들이 들어와서 들쑤시면서 필리핀 국민들 물 흐리는걸(?) 엄청 싫어한다는 거에요. 상업이 발전해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부를 쌓으면 좋긴 하겠죠. 근데 조선을 움직이는 왕이나 사대부같은 위정자들한테도 그정도로 중요한 걸까요? 조선은 중국 주도 질서에 순응하면서 그다지 국부를 쌓지 않고 중국이랑 좋은 관계를 유지만 하면 정권이 안전하잖아요. 오히려 국부를 쌓으려 나대는게 괜히 중국대륙정권의 의심(한반도 정권이 공세적인 전쟁을 준비한다는)을 사진 않을까요? 중국은 그렇다 쳐도 상업이 발달하면 국내에서도 새로운 권력층이 형성되는데 기존 권력층한테 그것도 좋진 않겠죠.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이 상업이 아니면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가 아닌 이상 상업이 도태되는건 당연한 귀결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2/06/15 17:38
필리핀은 또 다른게, 소위 말하는 10대가문이 스페인 식민지 시절때부터 쭉 귀족가문이었거든요.
그리고 독립과정에서 우리나라처럼 개박살 나버린것도 아니라 그냥 순탄하게 독립했기 때문에 기득권과 토지가 그대로 유지되었고요. 필리핀 대가문들은 사실상 지방호족입니다. 대 토지를 가지고 각자 동네에서 왕노릇 하면서 살고 있어요. 마르코스도 그 중 하나고요. 사실 이번에 마르코스의 아들이 대통령 되고, 두테르테 딸이 부통령 된것도, 두테르테가 마르코스 가문에 숟가락 얹고 싶었던거라 볼 수 있습니다. 그냥 우리나라의 재벌 정도로 생각하면 안되죠. "찐" 귀족입니다.
22/06/15 17:35
원말명초랑 여말선초가 대략 겹치죠. 그리고 중국이나 우리나라나 둘다 극심한 혼란기였고요.
나라는 서로 달라도 군신관계인데다가 경제권도 같았으니 저 당시엔 고려나 조선의 힘 만으로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을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서양이나 아라비아랑 직접 무역을 하던 시기도 아니었고요. 그냥 답이 없었어요. 나라가 개판인데 무슨 수로 장사를 하겠습니까? 물건을 구하지도 못하고, 구한다 해도 팔 곳이 없는데.
22/06/15 17:38
사실 강대국이라고 불린 나라 상당수는 국민들을 갈아먹었습니다. 세계 1위 강국이던 대영제국만 해도 자국민들을 식민지와 똑같이 수탈해먹었으니까요. 나라만 부유하고 강했던거죠.
조선이 뭐 백성들 신경썼냐는 반박이 있겠지만, 당시 국가들 기준으로 보면 예, 상위권입니다. 다들 뒤로 진격하니 가만히 있던 조선 연전연승 크크
22/06/15 17:50
이게 조선이 법률 정비가 잘 된 나라고 유학의 기본이 '선정'이다보니 왕들도 입으로는 백성을 구휼하라고 이야긴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법률을 회피해가며 (환곡이 대표적 예시;;) 온갖 수단으로 헤쳐먹었다 보니 공식 세금이 낮았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뭔 차이가 있었느냐는 느낌입니다. 일본? 애초에 그 나라는 왜 적게먹는 식습관이 되었을지를 생각해보면...
22/06/15 19:42
조선이 그시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백성들이 먹고살기 편한 나라인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어디서 봤는데 관리들의 수탈도 청빈이 유학 사상 중 하나라 관리들 임금을 매우 짜게 주어서 어지간히 청빈하지 않은 한 먹고 살려면 수탈을 해야 먹고살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아마 아전같은 하위 관리들 이야기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선에 다른 나라같은 대형 건축물들이 별로 없는 것도 그런거 지을려면 백성들이 고생하고 세금이 많이 들기에 별로 없다고 합니다.
22/06/15 18:17
명(청)-조선-일본이 500년 내내 같았을 것이란 전제의 댓글이 많습니다만. 15세기의 동아시아와 16세기의 동아시아는 다른 사회입니다. 15세기에 명을 건국한 주원장은 교초의 남발과 고리대 상인들의 폐해를 경계했고 이갑제와 해금령으로 대표되는 농본주의 자연경제 시스템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조선의 중농억상도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와 관련있습니다. 그런데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통제 경제가 이완되고 생산력이 올라가면서 중국의 요역제가 붕괴되고 쌀 대신 은이 납세 수단이자 교역 수단이 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각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상업이 성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도 16세기 후반이 되면 은을 국제교역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불법사례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일본에서는 조선으로부터 받아들인 연은분리법을 이용해 대대적인 은 생산이 이루어집니다. 당시 조공 또는 감합 무역으로는 이러한 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왜구로 대표되는 밀무역이 활개친 거구요. 이러한 16세기의 분위기는 임란, 명청교체, 유럽세력의 유입을 거치며 17세기에는 또 달라집니다. 즉, 원대 세계경제 붕괴의 충격에 동아시아는 자연경제체제로 돌아가지만 16세기 이르러 이러한 체제가 시장의 흐름에 의해 붕괴되고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22/06/15 19:42
예전 대학에서 배울 땐 고려말이 하도 막장이어서 조선 유학이 그토록 경직된 형태로 출발했고, 하필 조선도 너무 왕조가 오래 가는 바람에 시대흐름에 못맞추고 막장이 되었다.. 느낌입니다.
22/06/15 19:55
개인적으로는 이슬람, 성리학, 크리스트교의 사상적 수준차이는 없다고 보고, 아래와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1. 대륙 동편(위치상 대륙성 기후, 여름 겨울 기온차가 심함, )+사실상 중국 일본에게 둘러 싸여 있는 위치 2. 벼농사는 상대적으로 유리 3. 치트 작물 벼로 인해 인구는 증가 4. 주변 국가도 쌀농사를 짓고 나름 행정시스템들이 있는 국가들이므로 인구 유출이 안 됨 5. 죽을 수는 없으니 벼농사에 올인 6. 잉여생산물 및 기타 작물의 품종개량 부족 7. 상업 발달 어려움 결국 이걸 풀려면 일본은 바다를 건너야 하니 힘들고 중국 쪽으로 확장해야 하는데, 송나라 이래로 요, 금, 원, 명, 청 전부 수도 위치가 조선에서 가까웠던 게 치명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명의 스타팅이 남경이었는데 정난지변 때 주체가 북경으로 옮겨버리죠. 그냥 대역 시점으로 볼 때 정난지변 없이 명 조정이 남경에 있는 상황에 토목지변 터지기 전후로 조선이 여진을 빠르게 흡수하는 정도 아니면 상업 발달 원찬스 기회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22/06/15 20:47
전근대 사회에서 대부분의 인력들은 식량생산활동에 투입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앞가림 하기도 급급했습니다. 상업이나 공업에 인력을 투입한다면 그만큼의 농업노동력이 감소하는것이고, 잉여농산물이 없다면 누군가가 굶어 죽어야합니다. 만성적인 멜서스 트랩에 걸려 빈번하게 기근으로 굶어죽던 나라에서 어떻게 상업이 발달할까요?? 조선만 그런게 아닙니다. 청, 일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공산품을 해외에 수출하고 농산물을 수입한다는 선택지 따위 존재하지않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해야 할까요
22/06/15 22:31
1. 인구억제한다.— 이를테면 종교의 힘으로.
2. 삼림을 보존한다. — 이를테면 국가 정책으로. 인구가 적당할 때에는 평균적인 농지의 비옥도가 높음. 거친 땅, 영양분이 적은 땅, 물이 부족한 땅은 경작하지 않기 때문. 따라서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되는 잉여노동이 비율적으로 많이 생김. 그러나 인구가 너무 많으면, 생산성 떨어지는 농지까지 돌려야 하니 그러기 곤란함. 또한 삼림을 보존하면 숲의 유기물로 인해 토양의 비옥도가 높아지고, 나무가 물을 잡아줘서 물이 보다 안정적으로 공급됨. 기후변화에 보다 안정성을 갖게 됨. 농지가 망가지는 걸 방지할 수 있음. 그 결과 또한 잉여노동이 많이 생김. 1번은 맬서스의 <인구론>의 솔루션, 2번은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의 솔루션. 남은 잉여로 유럽과 교역함. 기술개발에 투자. 이를테면 도자기 개발에 투자. 유럽에 내다 팜. 선박에 투자. 선박 및 항해 기술개발. 유럽에서 책 사옴. 번역에 투자. 양반들 공부시킴. 일본보다 먼저 산업화. 뭐 이래야 하지 않을까요. 2번은 작심하면 가능한 일이고, 1번의 현실 가능성이 문제지만요. 결혼 시기를 늦춰야 하고, 가난하면 결혼하지 않게 하는게 가능해야 하니까요. 유교 사상으로 그게 과연 될지는 의문이죠.
22/06/15 22:33
과학의 발달 이전에 어느 지역의 인종, 문화, 제도등 모든것을 결정하는건 환경이죠.
교역을 할수 있는데도 유교문화때문에 안한게 아니라, 환경적으로 교역을 할수 없는 상황이 오니 유교문화로 그걸 합리화한거라고 봐야죠.
22/06/15 22:41
조선이 상업을 천대했다론에서 다들 생각 안 하는건 교역은 쌍방간의 행위라는겁니다.
동아시아는 중국 통일왕조의 대외정책에 따라서 역내 무역이 결정되는 경향성이 매우 강해요. 그도 그럴게 지금 미국 이상으로 압도적인 경제력을 가진 국가가 동아시아 권역의 중국이었고, 조선이 함께했던 중화권 국가들은 철저하게 조공질서 하의 공무역만 허용한 폐쇄형 국가였어요. 사줄 사람이 없는데 교역은 뭐 혼자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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