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6/30 13:00:04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12
Subject [일반] 문학소녀를 만난 꿈 없던 소년은 (첫사랑 이야기) (수정됨)
문학소녀를 만난 꿈 없던 소년은
-첫사랑의 프로파간다



  다른 애들이 한창 대입 준비의 정점을 향해 갈 때, 나는 연애를 시작했다. 2001년의 겨울이었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십팔 년 동안 들어왔던 것이다. 좋은 대학은 몇 개 없고, 인간은 너무 많다. 그런데 왜 가야 한다고 했더라?



십 대 시절의 사랑은 도를 넘기 마련이다. 심지어 첫사랑이었다. 비밀 연애가 될 수 없는 동네 연애는 곧 부모에게 발각되었고, 투옥과 탈옥이 반복되었다. 꿈이 없던 내게 여자친구의 꿈은 프로파간다가 된다. 그녀는 문학소녀였다.



투옥이 되었을 때는 문학을 읽었고, 탈옥을 했을 때는 영화를 봤다. 시와 소설은 졸렸지만, 영화는 두근댔다. 컴퓨터 게임과 만화책, 바보가 되는 축구와 중2병 환자에게 허락된 유일한 마약인 록 음악에 빠져있던 내게 새로운 영토가 열렸다. 세계는 넓고 볼 건 많다.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거기서 뭘 공부해야 하는지는 몰랐던 부모님은 나의 입시에 개입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냐? 다, 너 잘 되라는 거 아니냐? 나는 공부하고 싶어도 못 했는데, 너는 왜 이러냐?”라는 타박을 해왔고, 그건 정당했다. 남들보다 일찍 시작해서 남들보다 늦게까지 일하시던 부모님은 대학 구경도 못하셨던 분들이었다. 그러나 나의 전전두엽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했고, 나는 이해했음에도 통제하지 못했다. 우리의 오랜 조상이 그러했듯 십 대 후반은 원래 짝짓기를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어문학과에 진학했다. 나는 꿈이 없었고, 문학은 졸렸지만, 여자친구는 문학소녀였다. 그러니까



첫사랑은 왜 아름다운가? 첫사랑은 왜 시들지 않는가? 첫사랑은 왜 병 속에 들어간 신 같은가?



첫사랑이 아름답고, 시들지 않고, 병의 신이기 위해 끝나야 한다.



누구나 가기 싫지만 누구든 뺄 수 없는 곳이 군대다. 나는 아무나였기에 속절없이 가야 했다. 그렇게 국군이 되어 탄약창으로 갔고, 나의 님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물 건너갔다. 군인에게 까마득한 세월은 님에게도 마찬가지의 세월이다.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나의 곁에서 식민지의 백성 같이 살았던 그이는 독립이 필요했다. 물 건너간 님은 빼곡한 엽서를 보냈지만,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했던 그이도 말을 잃어갔고, 그만큼 엽서는 무안해졌다. 빈 엽서의 여백에는 채울 수 없는 공백이 차기 시작했고, 그 시절이 나의 계급을 키웠다. 전투력을 거의 잃은 병장이 되었을 때, 물 건너 세계시민이 된 첫사랑의 마지막 엽서가 왔다. 초대장이었다.  



세계시민으로의 초청이었지만, 나는 조선의 고지식한 상놈이었다.



학교에 돌아와서 보니, 아-

나는 국문학도였다.

국문학도라고? 어쩌다가…

낙동강은 흐르고 나는 오리알이었다. 정말이지, 정말로.



그리고 계절은 돌고 돌아



십오 년의 강물이 흘렀다. 오리알이던 예비군은 오리가 되어 민방위 대원이 되었다. 그 오리는 새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온 오리알들 앞에 쭈뼛대며 서 있다. 그러고는 떠든다. 아주 뭐, 잘난 척을 한다. 정말이지, 정말로 인생은 알 수가 없고, 도통 모르는 것이다. 문학소녀를 만난 꿈 없던 소년은 선물 받은 문학을 졸린 눈을 비비며 읽었다. 읽어도 별 감흥은 없었고, 이해도 잘 되지 않았지만, 그건 숙제였고, 그녀는 과외선생이었다. 그랬는데, 그랬던 바보축구는 이제 문학을 가르치는 오리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조선의 고지식한 상놈은 세계문학론을 가르친다. 글로벌시대인 것이다. 그러니 올해 내게 세계문학론을 배운 오리알들은 곧 나는 오리가 될 것이다. 물 건너간 세계시민의 일원이 되어, 어디든, 그렇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페스티
23/06/30 13:35
수정 아이콘
그야말로 첫사랑이라는 글이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두괴즐
23/07/01 13:2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23/06/30 15:37
수정 아이콘
이과생들이 쓰는 보고서같은 글들만 읽다가 이글을 읽으니 정말 신세계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괴즐
23/07/01 13:2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반항하는인간
23/06/30 23:35
수정 아이콘
두!
괴!
즐!
두괴즐
23/07/01 13:31
수정 아이콘
두? 괴? 즐?
larrabee
23/07/01 06:55
수정 아이콘
이문세의 옛사랑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두괴즐
23/07/01 13:30
수정 아이콘
이제는 그 시절의 감정이 다 휘발되어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옛사랑>은 참, 명곡이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171 [정치] 석사학위 반납? 그런 것 없다 [17] kurt11164 23/07/11 11164 0
99170 [일반] 여학생 성폭행하고 피해자 가족도 협박하는 촉법소년단 근황 [227] qwerasdfzxcv16252 23/07/11 16252 18
99168 [정치] 로이터 단독: 한국정부 시중은행들에게 새마을 금융지원 5조 요청 [82] 기찻길15471 23/07/10 15471 0
99167 [일반] 중국사의 재미난 인간 군상들 - 위청 [27] 밥과글7950 23/07/10 7950 39
99166 [일반] 소 잡는 섭태지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일/ 에세이) [11] 두괴즐5827 23/07/10 5827 7
99165 [일반] 웹소설도 도파민 분비가 상당하군요 [109] 평온한 냐옹이12290 23/07/10 12290 3
99164 [정치] 백선엽 형제와 인천 교육기관 [31] kurt12305 23/07/09 12305 0
99163 [정치] 개각인사 김영호·김채환 '촛불집회 중국 개입설' 논란 [32] 베라히13701 23/07/09 13701 0
99162 [일반] [팝송] 조안 새 앨범 "superglue" [2] 김치찌개5365 23/07/09 5365 0
99159 [일반]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 충실한 계승(노스포) [26] aDayInTheLife8756 23/07/08 8756 2
99158 [일반] 어쩌다 알코올 섭취자들은 대한민국의 천룡인이 되었는가? [154] dbq12319125 23/07/08 19125 41
99156 수정잠금 댓글잠금 [일반] 내기의 불쾌함의 원인은 가치를 투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16] 노틀담의곱추9402 23/07/08 9402 2
99155 [일반] 탈모약 복용 후기 [50] 카미트리아10313 23/07/07 10313 11
99154 [정치] 판사님 "나는 아무리 들어도 날리면과 바이든을 구분 못하겠다 그러니 MBC가 입증해라" [98] 검사19151 23/07/07 19151 0
99153 [정치] 국힘, “민주당이 사과하면 양평고속도로 재추진 정부 설득” 외 이모저모 [152] 검사18441 23/07/07 18441 0
99152 [일반] 불혹에 듣는 에미넴 (에세이) [2] 두괴즐6415 23/07/07 6415 13
99150 [정치] 해군, 독도인근 훈련 예고했다가… 日이 이유 물은뒤 구역 변경 [47] 톤업선크림11951 23/07/07 11951 0
99149 [일반] GS건설 검단 아파트. 주차장 붕괴사고 조사 결과 발표 [107] Leeka10670 23/07/07 10670 11
99148 [일반] 뉴욕타임스 7. 4. 일자 기사 번역(리튬 확보를 위한 경쟁) [5] 오후2시7859 23/07/06 7859 2
99147 [일반] 지하주차장이 무너진 자이. 5~6년 입주 지연 & 보상금 8천 예상 [90] Leeka16871 23/07/06 16871 0
99146 [일반] [루머] 애플, USB-C 에어팟 프로 출시 예정 [17] SAS Tony Parker 10302 23/07/06 10302 0
99145 [정치] 박민식 "백선엽 장군 친일파 아니라는 데 장관직 걸겠다" [124] 덴드로븀14167 23/07/06 14167 0
99144 [정치] 원희룡 “서울 ~ 양평 고속도로 전면 백지화” [314] 검사24005 23/07/06 24005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