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12/18 12:59:32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일반] (스포)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 간만에 애니 보고 눈물 흘린 후기 (수정됨)
※ 이 글은 애니메이션 시리즈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이하 <엣지러너>), <빌리 엘리어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뒤엎은 네트워크도 사라지고
의리의 절규가 네온사인에 묻혀버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랑이 씁쓸한 낭만이 된 시대에

한 사이버 웨어가 빌딩 숲 사이를 걷고 있었다.

--------------

흥하는 콘텐츠는 익숙함과 신선함 사이의 절묘한 지점을 포착할 줄 안다. 그 지점을 스위트 스폿(sweet spot)이라고 한다. 익숙하지만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그런 지점이다. <엣지러너>는 이 이론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작품이다.

<엣지러너>의 스토리는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소년의 성장물이라면, 후반부는 정통 누아르다. 그리고 둘 다 아주 판에 박힌 스토리를 보여준다. 성장물에서는 엄마의 죽음과 학급에서의 방황을 극복하며 엣지러너 크루라는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동료, 역경, 성장 등 아픔 속에서 희망을 찾는 그럭저럭 긍정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하지만 누아르로 장르를 선회한 후로는 사랑, 음모, 배신이 난무하며 비극으로 점철된다. 누아르 특유의 음울하고 처절한 감성이 가득하다. 스토리도, 스토리에 담긴 감성도 클리셰 범벅이다. 하지만 엣지러너가 진부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그 이유는 2%가 다르기 때문이다. 2%는 바로 세계관이다.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관에 뻔한 클리셰를 던져 놓았더니 기가막힌 작품이 튀어나왔다. 익숙함과 신선함 사이의 절묘한 지점, 스위트 스폿을 획득한 작품이 되었다. 재미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는, 아니 극찬을 보내고 싶은 그런 작품이 나왔다.

많은 흥행작들이 이 공식을 따른다. <아바타>는 <포카혼타스>를 판도라에 끼얹은 작품이고,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는 스파이 무비에 캡틴 아메리카를 끼얹은 작품이다. 잘 만드는 게 쉽지 않지만, 잘만 만들면 성공이 보장되는 창작 공식이다. <엣지러너>는 그 창작 공식을 성공적으로 적용한 영리한 작품인 셈이다.

다만, 깊이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이버 사이코처럼 사이버펑크 세계 속에서 고민할 거리를 던지기는 하지만, 그냥 던지기에서 끝난다. 냉정하게 말해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처럼 철학적인 사색을 갖춘 작품에 비하면 깊이가 무척이나 얕다. 그런 생각거리를 전개를 위한 소재로만 소모한 점이 <엣지러너>의 가장 아쉬운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엣지러너>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뻔하다고 할지라도 어떤 스토리 라인을 특정 세계관과 접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장르 특유의 감성을 아주 잘 포착했다. 특히 누아르 감성이 절절하다. 사나이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겨울비 같은 작품이었다.

--------------------

인간은 욕망을 가진 존재고, 우리는 그 욕망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산다. 나이트 시티는 그 꿈에 무척이나 충실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꿈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고, 그런 행동이 비난받지 않는 곳. 그래서 패러데이나 키위를 단순히 나쁜 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의리가 허무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살아간 죄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그나마 공상의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이 정도지, 만약 현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는 굉장히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고뇌를 선사할 수도 있다. 그 지점을 잘 포착했던 작품으로 <시티 오브 갓>이나 <가버나움>을 추천하고 싶다)

이처럼 냉혹한 나이트 시티에 아주 특별한 놈이 등장한다. 데이비드의 특별한 점은 사이버 웨어를 견디는 힘에 있지 않다. 그가 특별한 이유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꿈을 위해 살았다는 데 있다. 엄마의 꿈을 위해 아카데미에 다녔고, 메인의 꿈을 위해 크루를 이끌었으며, 루시의 꿈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런 데이비드를 어리석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사랑의 애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심지어 부부의 연을 맺어도 그렇다. 아내의 꿈이 무엇인지, 남편의 꿈이 무엇인지 물어봤을 때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걸 넘어서 상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더 드물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람은 정말 정말 드물 것이다. (사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 상대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걸 나이트 시티에서? 이 정도면 나이트 시티의 전설이라고 부를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뜬금없어 보이지만, <엣지러너>를 보면서 <빌리 엘리어트>가 떠올랐다. 빌리의 아버지가 파업을 포기하고, 주변으로부터 배신자라 손가락질 받으면서 광산으로 돌아갔던 이유... 발레리노로 대성하는 빌리의 꿈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들의 꿈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것, 이것만큼 애절한 사랑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나이트 시티는 그런 애절함이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다. 루시의 꿈을 이뤄주려던 데이비드의 절규는 결국 쓸쓸한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사랑은 나이트 시티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낭만이라 부를 만큼 아름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누구보다 특별했고, 전설이었다. 이제는 사랑 따위에 심드렁해진 아재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을 새겨주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aDayInTheLife
22/12/18 13:02
수정 아이콘
엣지 러너 연말도 다되어가는데 봐야되나 고민도 되고 사펑 본 게임도 자꾸 해보고 싶어지네요. 흐흐흐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겨울삼각형
22/12/18 13:54
수정 아이콘
데이빗또
22/12/18 16:33
수정 아이콘
간만에 여운이 심하게 남는 애니였습니다. 매체보고 눈시울이 붉어진게 얼마만이지 모를정도로 감동 애니였습니다.
서린언니
22/12/18 17:28
수정 아이콘
엄마가 학교가서 사정사정하고... 구독 끊겨서 세탁기 멈추는거 보고 왜이리 가슴아프던지...
마스터카드
22/12/18 18:10
수정 아이콘
데이비또.. 이거 어쩌다 두번 봤는데
첫번째도 좋았지만.. 언제 데이비드가 잘못될까 불안했다면
두번째 볼때는 파멸을 향해 달리는 데이비드가 정말 슬프더군요
또한 사이버펑크만의 쿨함이 좋았습니다. 잔인함이나 야한장면이나 다 쿨하게 보여줘서 좋았어요
마스터충달
22/12/18 18:53
수정 아이콘
저는 1번 봤는데 진짜 불안불안 하면서 봤어요 ㅠㅠ
이민들레
22/12/18 21:43
수정 아이콘
레베카..흑흑...
비 평 = 이 백 만
22/12/19 09:35
수정 아이콘
데이비드와 루시가 가지고 있던 꿈이 서로를 만나면서 바뀌어버렸는데
(데이비드가 살아가길 바라는 루시 / 루시를 달에 보내주고 싶어하는 데이비드)
계속 엇갈린 방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안타깝고 씁쓸했네요
그런 방향에서는 서로의 꿈을 제대로 알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과거의 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야할지..
목적과 수단이 반대가 되어버린 느낌으로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866 [정치] 의대 증원 그 이후 [37] lexial7362 24/02/07 7362 0
100859 [정치]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2천명 늘린다 [499] 시린비23329 24/02/06 23329 0
100843 [일반] 내과 전공의 1년차 후기 및 책 소개 [34] 헤이즐넛커피7210 24/02/03 7210 31
100840 [정치] 20년 이상 지속되었던 의사집단의 정치적 우경화 경향이 윤석열 때문에 끝나는 것일까요? [104] 홍철13266 24/02/03 13266 0
100790 [일반] 두 개의 파업: 생명 파업, 출산 파업 [74] 조선제일검11298 24/01/28 11298 10
100270 [일반] 피와 살점이 흐르는 땅, 팔레스타인 (9) 봉기 [1] 후추통5147 23/11/16 5147 15
100216 [일반] [독서에세이] 행성의 입주자들은 얼마나 닮았는가 part1: 「얼마나 닮았는가」를 읽고 [2] 두괴즐5825 23/11/07 5825 4
100090 [일반] 피와 살점이 흐르는 땅, 팔레스타인 (상) [17] 후추통9163 23/10/18 9163 14
99860 [일반] 뉴욕타임스 9.16. 일자 기사 번역(전기차 전환을 둘러싼 회사, 노조의 갈등) [9] 오후2시7406 23/09/19 7406 3
99842 [정치] 15년차 조선업 용접공 연봉 (feat. 미국, 호주 연봉 비교) [59] 간옹손건미축14005 23/09/16 14005 0
99709 [정치] 과연 교육부는 법과 원칙을 지켜 교사들에 대한 징계를 내릴 것인가? [49] qwerasdfzxcv9299 23/09/04 9299 0
99678 [정치] 예정된 패배로 가는 길 [84] 오빠언니12694 23/09/02 12694 0
99177 [일반] 보건의료노조 7/13 산별총파업 관련 [154] lexicon12940 23/07/12 12940 12
98842 [일반] AI로 인한 우려: 미국 작가 파업과 웹툰, 게임, 일본연예계까지 [69] 졸업12452 23/05/23 12452 4
98522 [일반] [역사] 평양냉면 vs 함흥냉면 / 냉면의 역사 [65] Fig.114192 23/04/20 14192 40
98385 수정잠금 댓글잠금 [정치] (쌀)농민이 이 사회에 기생하는 메커니즘(feat 양곡법) [259] darkhero19294 23/04/06 19294 0
98276 [정치] 주 69시간제 비난은 광우병과 비슷한 류의 선동입니다. [395] 버럴26640 23/03/26 26640 0
98086 [정치] 보수지만 윤석열 정부가 언론탄압은 자제했으면 좋겠습니다. [42] 홍철13840 23/03/07 13840 0
97628 [정치] [기사] '안전운임제' 이대로 끝? 10년 후 예상 못 한 결과 온다 [65] 빼사스12767 23/01/05 12767 0
97502 [정치] 영국 보수당 의장: 간호사 파업은 푸틴을 돕고있다. [10] 기찻길12198 22/12/23 12198 0
97470 [정치] 尹지지율, 중도·20대가 쌍끌이로 올렸다 6월 이후 첫 40%대 [189] 핑크솔져19076 22/12/19 19076 0
97460 [일반] (스포)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 간만에 애니 보고 눈물 흘린 후기 [8] 마스터충달8976 22/12/18 8976 14
97422 [정치] 주 69시간 노동의 시대가 왔습니다. [403] 아이군29832 22/12/14 2983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