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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9 01:25
책의 반론이 성립하려면 세계적 바이올린리스트의 연주와 그냥 음대졸업생 정도의 일반인이 보기엔 꽤나 잘하는 바이올린 연주를 구분할수 있어야 하겠네요. 저는 막귀이고 클래식에 관심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과연 연주회까지 갈 정도의 매니아면 둘의 연주를 구분할수 있을까요? 만약 구분할수 없다면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맞을 것이고 아니면 책의 반론이 맞는 거겠죠.
22/05/29 09:17
구분하고 못구분하고는 의미없다는 얘기죠.
수준이 높다고 인지하더라도 그래서 몇곡이나 할지 모르는 음악을 듣기위해 지각할려는 사람이나 반차를 쓰는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22/05/29 18:21
아니오. 의미가 있지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연주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알아야 출근을 포기하고 연주를 들을지 말지 결정할게 아닙니까.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그게 백원짜리 연주인지 백만원짜리 연주인지 알아야 선택이란 것을 할수가 있죠. 저 연주자 앞을 저처럼 막귀인 사람들만 지나쳤다면 경제학적 선택을 할수가 없죠. 그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몰랐을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클래식을 전혀 모르지만 유명 연주자란 것을 알았다면 반차를 내고서라도 들었을듯 싶네요. 얼마나 대단한 연주길래 사람들이 많은 돈을 내고 연주를 듣는 건지 궁금하니까요. 그런 연주를 돈 내지 않고 들었으면 경제학적으로도 이득아닙니까. 이게 제 경제학적 선택입니다. 저같은 선택을 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럼 저 사람의 경제학적 분석은 틀린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러니 이건클래식 좋아하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클래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그 시간대에 뉴욕지하철을 오가는지부터 따져야 할게 아닐까요. 저는 클래식도 그 워싱턴 포스트 기사도 저 책도 모르기에 뭔가 의견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한데요. 이런 간단한 것부터 안따지고 조악한 경제학적 원리를 갈가리 찢어놓는다 말하는게 우습네요. 저자가 책에서 이런 조악한 경제학적 논리를 찢어놓겠다는 식의 말을 했다면 꽤나 우스꽝스러울것 같습니다. 애초에 책을 쓴 사람도 경제학자가 아니라고 하던데 그런 사람의 이런 분석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22/05/29 11:59
연주자에 따라 기술적 숙련도는 분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곡일수록 숙련도 차이는 더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연주자의 숙련도가 비슷하다면 그 다음은 취향의 문제입니다. 어떤 음색, 리듬감, 감정을 입혀서 연주하는지는 연주자별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 더 낫다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거장이 대학 입시생보다 항상 숙련도가 뛰어난 것은 아닙니다. 처음보는 곡을 연주하는 거장과 그 곡을 입시 준비용을 1년내내 준비한 예고 3학년을 비교하면 숙련도는 예고생이 더 높을 수 있습니다.
22/05/29 01:32
본문과는 큰 상관이 없을수도 있습니다만 사견임을 전제하고 댓글을 달자면
전통적인 경제학의 가장 큰 맹점은 인류가 “어떤 상황에서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에게 가장 큰 효용을 가져다주는 선택을 한다” 라는 가정하에 논리를 전개한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게 현실이 아닐까 싶어요.
22/05/29 03:51
근데 모델링을 할때 너무 많은걸 넣으면 이도저도 안되는지라...그런 가정정도는 깔아줘야 좀 되죠...
행동경제학이 좀 제한된 합리성을 다루긴하지만 주류경제학을 넘기엔 아직 사례정도만 찾아내는거지 예측모델같은걸 만들진 못하는지라...
22/05/30 11:28
경제학을 비판한다기 보다는 그냥 경제학과는 다른 관점을 취하는 학문을 접하는 학생 입장에서 ‘그런 가정 정도는 깔아줘야’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가정이 저에게는 엄청나게 큰걸로 느껴집니다. 그 강력한 가정을 통해서 경제학이 학문적으로 강한 parisimony를 얻지만 복잡다단한 인간과 사회를 모델로 설명하기에는 항상 부족함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22/05/30 11:37
그런데 그렇게 모든걸 넣을려면 결국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라는 결론밖에 안나올겁니다...(뭐 계산이 되어야지...)그나마 근사치로라도 써먹을려면 단순화해야...
사실 과학같은데서 쓰는 시뮬도 결국 근사하는걸로 퉁치는거 제법 많을거라 그러니 뻑하면 날씨못맞추냐고 기상청이 욕먹죠 크크
22/05/29 09:03
그렇기도 하고, 옵션을 저울질하는 인지 비용도 소모됩니다. 인지 비용은 경제학에서도 어느 정도는 고려되는 모양이더라고요( 전 비전공자)
22/05/29 17:40
전통적인 전제인 '이상적인 인간' 자체가 틀렸다기 보단 그에 달린 조건들이 너무 다원화된게 문제인것 같아요.
막말로 이 세상에 아이패드 한가지 종류 밖에 없어서 같은거 50만원에 살래 100만원에 살래 이러면 당연히 50만원에 사겠지만 고려할 수 있는 옵션들이 너무 많아졌죠. 사면 키보드를 주니 배송은 1시간이면 되니 사실 시야각이 서로 틀리다던가...
22/05/29 03:17
음악을 예시로 드셨는데 부랑자꼴을 하고 그림을 싸게 팔때, 그것도 무지하게 싼 가격으로 판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살까? 하는 테스트의 결과로 상당부분은 반박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테스트가 출근길인지 시간대는 모르겠지만 항상 비슷한 시간대에 정해진 곳을 지니치는데 못보던 훌륭한 연주자가 있다면, 이 사람을 다음에도 마추칠 수 있을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 적다고 봅니다. 전 하현우, 김연우급의 가수가 목소리를 바꿔서 출근길에 버스킹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멈춰서서 들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중에는 지각까지 감수하는 사람도 있을거라 봅니다)
22/05/29 08:57
음악회에서 감동을 받는 정도에 비하면 미술관에서 감동을 받는 정도가 훨씬 낮기 때문에 좋은 실험 대상이 아니라고 봅니다. 길거리에서 부랑자가 보여주는 것과 확연한 반응 차이가 보이는 대상을 선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만약 미술관에서 보는 것 말고 비싼 돈 주고 사는 것과 비교한다면, 일반 서민들은 명작을 살 여유가 없으니 그 또한 안되지요.
사실 전 예술에 돈을 잘 안 쓰기 때문에 저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기 참 어렵네요..
22/05/29 03:45
저 '경제학적 상상력'이라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본문에 소개된 내용만 놓고 판단하자면, 작가가 정말로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를 읽어보고 썼는지 의심되는 내용이네요.
행인들이 연주를 듣기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아침 출근길에 바빴기 때문이라는 점은, 굳이 비용편익분석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기사에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입니다. 기사의 문제의식은 잠시 멈춰서서 아름다움을 음미할 겨를조차 없는 현대인의 삶의 우선순위에 관한 것이죠. 본문 쓰신 분께서 사견이라고 언급하신 내용 또한 다루고 있습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인용하며 아름다움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최적의 감상조건 (viewing conditions must be optimal)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적어도 제가 이해한 바로는 대중의 예술적 무지와 허영을 폭로하기 위해 기획된 얄팍한 '몰래 카메라' 같은게 아니었습니다. 연주했던 조슈아 벨 본인, 그냥 지나친 사람들, 잠시 멈춰서서 연주에 빠져들었던 사람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는걸 알아챘던 사람, 지하철 역의 터줏대감 구두닦이.. 이런 사람들을 추후에 한명 한명 인터뷰해서 입체적이고 치밀하게 씌여진 기사였습니다. 뭐... 저 역시도 이 기사가 퓰리쳐상을 수상한 기사라는 labeling에 현혹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22/05/29 09:00
조슈아 벨 실험이 꽤 유명하지요. 그런데 정작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로는 "현대인의 교양 부족" 이렇게 단편적으로 전달되었으며, 2010년대 초반 고등학생 대상 영어 지문에도 그런 식으로만 간략하게 소개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사실 저런 실험은 일반 사회학 연구만도 못한 엄밀성을 띠는데, 그냥 사회실험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건조하게만 비판하면 대중들이 납득하질 않더라고요. 그러니 본문에 나오는 책처럼 적극적으로 까주는 액션이 나름의 역할을 다한다고 봅니다. 다만 저런 실험으로 대중과 학계의 주의를 환기함으로써, 저런 경향성에 대한 학문적 탐구의 물꼬를 틀 지도 모르죠. 딱 그 정도라고 봅니다.
22/05/29 09:52
조슈아 벨 실험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어떠한지와 무관하게, 그에 대한 '경제학적 반론'을 시도하는 작가라면 텍스트에 대한 좀 더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전문가 행세하는 어설픈 지식인인지 헷갈리는 상황일 뿐이죠.
그리고 저 실험이 사회학 연구만도 못한 엄밀성을 갖고있는 이유는, 애시당초 사회학적 입론을 위한 실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오히려, 현대인의 삶의 태도에 대한 철학적 미학적 질문을 던지기 위한 퍼포먼스에 가깝죠. 뭐.. 굳이 예를 들자면 프리허그나 그런 부류의. 그걸 이해하지 못한채로 비판한다면 전형적인 허수아비 때리기에 지나지 않죠.
22/05/29 09:02
근데 용산 해외 축구 선수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경우 평상복 차림의 외모만 보고 알아봐야만 하는 상황인데, 그들의 가치는 주로 축구/음악적 능력에서 나오기 때문에 조슈아벨 실험과 구조적으로 덜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축구선수와 해외 연예인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지 못하는 게 교양 문제와는 좀 덜 맞닿아있어서요.
22/05/29 09:29
그냥 클래식에 대한 인지도가 낮고 장르자체가 문턱이 높아서 그런 것 아닐까요?
무명이라도 누가봐도 월드클래스로 예쁘거나 노래를 잘한다면 좀 더 멈춰섰겠죠.
22/05/29 09:52
저 실험을 기획한 기자는 경제학의 기본 바탕에 대한 이해가 좀 부족하다 봐야죠. 저 기자가 생각하는 경제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돈이 최고시다', '자본주의가 최고시다'인 거죠. 경제학의 기본 바탕은 '한정된 자원(희소성)', '한계효용' 이런 환경에서 '합리적 선택'을 다루고자 하는 것이거든요. 개별 경제 주체들의 합리적 선택을 다루는 것이 미시경제학, 이런 미시적 선택속에서 경제 전체(시스템)를 다루는 것이 거시경제학이니까요.
저 실험은 희소성이나 한계효용이 없는 환경이잖아요. 희소성이나 한계효용이 없으니 관심도 없고 큰 돈(희생, 여기선 시간과 관심)을 쓰고싶지 않은거죠. 그리고 저런 문화상품에는 과시효과라는게 있어요. 같은 물건이라도 백화점에서 명품 브랜드 붙이면 가격이 올라가고 사람들이 더 사려고 하는 거 같은건데..그게 없는 상황이죠. 저도 조슈아 벨이 누군지 모르는데 워싱턴DC 한가운데서 후줄근한 옷을 입혔으면 그냥 공연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미국내 대표적 부촌인 비버리힐즈에서 잘 차려입고 예고 없이 공연하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험집단과 통제집단이 모두 있어야 진실험인데..저건 결론을 내려 놓고 그 결과가 나오기 쉽게 실험을 조작한거죠. 크리밍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보이네요.
22/05/29 11:18
심리 실험이라 보는데, 경제학적 실험이라니 그건 부정확한 말 아닐까 싶네요. 멈추고 안 멈추고는 마음의 인과관계에 따른 것이잖아요. 결론 즉 예술에 대한 안목도 마음인 것이고요. 때문에 경제학적 실험이 아니고, 심리 실험에 대한 저자의 경제학적 해석이라 하면 적절한 것 같고요. 인간 심리에 대해 과학적 접근을 한 행동경제학도 있지만, 말씀하신 것은 행동경제학이 아닌 것 같고요. 오히려 행동경제학이 비판하는 것과 유사한 것 같고요.
그리고 이 실험이 세계적인 음악가가 아닌 보통의 길거리 음악가의 경우의 반응을 동일한 조건에서 보았다면, 더 좋았겠지요. 실험 횟수도 늘리면 더 좋았겠고요. 그러나 세계적인 음악가의 경우에도 반응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대조군을 비교한들 결론이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결과가 난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첫째로 작품 감상이라는 것은 주목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해요. 주의를 기울인 상태에서의 분별력과 그렇지 않을 때의 분별력은 다르다는 거죠. 둘째로 맥락이란게 판단에 큰 작용을 하는 거라 봐요. 연주회장에서와 길거리에서는 다른 거죠. 기대되는게 다른 것이고, 그건 나름 경험적 이유가 있는 것이고요. 물론 나름 개연성을 갖고 추정한 것뿐이지만, 그러나 저 책을 소개하신 내용 중에 실험 데이터는 안 보이는 것 같아요. 경제학적 반론이라 했는데, 실험 데이터가 없고, 이론적 추정에 불과하죠. 인간의 선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추정한 것에 불과해요. 조악한 기획실험이라면서, 그 반론 또한 조악하단 느낌이 들고요.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요. 실험이 없다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라도 있어서 권위를 갖추면 될 텐데, 오태민씨 개인 의견 아닌가요? 학자가 얘기해도 단독 의견인 경우 권위를 싣기 곤란한데, 온라인 서점의 저자 소개를 보면 그런 권위도 없는 것 같네요.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런 패턴이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실력을 갖고 있지만 아직 무명이라서 인기가 없는 예술가가 있다고 해보죠. 그러면 커다란 콘서트장에서 많은 관중을 두고 공연하기가 곤란하겠지요. 맥락을 만들기가 곤란할 거예요. 그에따라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이런 상황에서도 극소수의 일부 사람은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거라 봐요. 안목있는 사람의 귀에 들어오게 되고 자세히 들어보니 훌륭한게 맞다는 판단이 강해지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예술가에게 훌륭하다고 격려를 할 수 있겠지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 예술가 훌륭하다고 한번 들어보라고 소개를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소개를 듣고 주의깊게 들었더니 정말 뛰어난 거예요. 그러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겠지요. 이런 식의 패턴이 있는 거라 봐요.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안목있는 훌륭한 사람이고요. 또한 용기가 필요한 거라 봐요. 맥락과 사람들의 무관심이 그가 흔한 예술가라 가리키고 있는데, 그걸 극복하고 내 생각에 맞다고 내 느낌이 맞다고 믿음을 갖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줘야 하니까요. 용기와 활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 판단에 의심을 품거나, 판단을 했어도 침묵함으로써 바이럴이 안 일어나겠지요. 저 실험은 제가 여러 책에서 인용되는 걸 보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충분히 의미심장한 실험이라 생각하고요. 스스로의 생각을 하지 않고, 비난받을까봐 두려워서 다수를 무비판적으로 따라하기 좋아하고, 정성적 안목은 없어서 정량적 평가(점수, 사람수, 돈 등)에 의존하는 경향이 상당한, 오늘날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실험이라 생각해요.
22/05/29 11:46
다른 댓글에서도 말했듯 저 실험은 그냥 주의를 환기하는 수준에 그칠 뿐, 과학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누구의 책에 언급이 됐고 이런 정도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아들러 유사심리학 등의 학설들도 나름 똑똑해 보이고 문제의식은 날카롭게 느껴졌었습니다. 문제는 반증가능성이나 재현성이 떨어지니 결국 폐기되어 오늘날엔 유사심리학의 지위에 있다는 거지요. 요컨대 그냥 직관적으로 괜찮은 소리도 각 잡고 파고들면 허술함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여기서 입증 책임은 실험의 허술함을 까는 쪽이 아니라 실험을 통해 어떠한 경향성을 주장하고 싶은 쪽에 강하게 있는 게 당연합니다. 가령 A가 새로운 물리현상을 발견했다고 주장할 때 엄밀성을 요구하는 쪽에서는 그냥 기존에 나와 있는 기본적인 룰같은 걸 들먹이면 그만이지만, 입증하는 쪽에서 충분한 실험을 통해 재현가능성을 보여야 하죠. 저 실험과 기사를 주도한 Gene Weingarten이 그럴싸한 소리를 길게 했으니 반론하는 측에서도 그럴듯한 반론으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줘 봐라 하는 건, 사실 과학적 비판적 사고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어프로치입니다. 원래라면 1 turn에서 실험의 엄밀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바로 기각돼야 정상인데, 선동 한 줄을 반박하려면 상당한 에너지가 들기 때문에 그냥 경제원론적인 수식을 휴리스틱하게 동원해서 효과적으로 까 주는 게 저 책이 조슈아벨을 언급한 본 취지라서요.
22/05/29 11:50
그리고 저 실험이 경제학 실험이라는 게 아니고, 저 사회실험이 적절한 변인 통제를 못했다는 점을 적당한 경제학적 표현으로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거지요.
22/05/29 12:11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고 그러한 관점 중 하나로서 본문과 책을 존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상호주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오태민 작가는 '경제학적 상상력'의 초반부에서 이 조악한 기획실험의 경제학적 몰이해를 갈가리 찢어놓고 시작합니다.' 이는 헛소리라 봅니다. 그러나 '효과적으로'를 위해서 헛소리 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건 비유하자면, 축구에서 어깨 싸움 같은 거라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깨 싸움을 한 번 더 하자면,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봅니다. 경제학 중 일부는 과학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대니얼 카너먼을 높게 평가하고요. 경제학의 과학적 허술함을 진단하는데 중요한 하나는 '이콘'이라 생각합니다. 이콘을 전제로 한 경제학적 서술은 기본적으로 과학이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하나의 관점인 거라 봅니다. '한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현실에서 선택을 할 때 한계적으로 판단합니다.'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요? 과학적 주장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어떤 실험을 해서 얻은 어떤 데이터에 근거하는 건가요? 이런 논리적 허술함을 일일이 다 방어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권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위는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니까요. 저자가 경제학 교수님인가요? 저자가 경제학 박사님인가요? 저자가 경제학 학부생으로 졸업한 건가요? 그것도 아니죠. 경영학 학부생일 뿐입니다. 졸업 이후에 경제학에 어떤 전문성을 특별히 키운 건가요? 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논리도 허술하고, 권위도 허술한 것으로 그에 비해서 '오태민 작가는 '경제학적 상상력'의 초반부에서 이 조악한 기획실험의 경제학적 몰이해를 갈가리 찢어놓고 시작합니다.' 이건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라 봅니다.
22/05/29 12:22
좋은 지적을 하셨습니다. 결국 말씀하신 상호주의가 쟁점의 핵심인데 표면 아래에 숨어 있습니다.
low level 학문과 high level 학문이 그저 상호주의적이고 대등한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면 양자역학의 물리학과, 그 양자역학을 오독하는 인문학자들의 탁상공론이 전혀 대등하지 않습니다. 두 학문에서 말하는 '입증' '증명'의 의미도 현격히 다르고요. 사실 지난한 문이과 논쟁같은 것도 결국 여기서부터 평행선을 달려서 발생하는 거기도 하지요. 경제학과 여타 사회과학/인문 학문의 경우 위 예시와는 달리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그러니 서로 대등하다고 퉁치는 건 나이브하다고 지적해 봅니다. 적어도 facny하려고 노력하는데다 실험으로 선입견을 깨려고 하는 학문과, 의미 부여가 선이고 엄밀성 추구가 후인 경우가 차원이 다르게 많은 학문은 전혀 다르죠.
22/05/29 13:25
이 얘기가 빠진 것 같네요. 저는 자유주의자로서 권위에 대해 기본적인 반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무제한적 자유를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권위에도 몇 가지 효용이 있다고 보는데, 그중 하나가 시간이라 봅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권위를 이용할 수도 있는 거라 봅니다. 이런 관점에서 권위를 이야기한 것이지, 저는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권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사고력 등을 사용하여 도전할 수 있는 거라 봅니다.
권위가 아니라면 무엇을 신뢰할 수 있는가 하면, 논리를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논리에는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수학의 경우 만약 풀이과정이 10개의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중 단 1개만 틀려도 답은 엉터리가 될 것입니다. 설령 맞았더라도 그건 우연히 맞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직렬적인 10개의 식이 모두 맞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학이라 주장할 때에도 마찬가지라 봅니다. 단 1개만 허술해도, 그걸 과학이라 보기가 곤란한 거라 봅니다. 그만큼 과학은 까다로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과학적'이란 말을 쓰곤 합니다. 그건 나름의 효용이 있습니다. 과학의 여러 특징들을 닮는 것을 높게 평가함으로써 합리성을 높이는 효용이 있죠. 그러나 문제도 있죠. '~적'이란 말은 모호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호함을 기본으로 하고, 사람들은 흔히 어떤 걸 과학적이라 생각해버리게 되는가 하면, '숫자'가 많이 들어가 있거나, '연산기호'가 많이 들어가 있으면 과학적이라 생각해버리곤 합니다. 특히 엄밀히 판단할 시간이 없고, 빠른 속도로 판단할 때에 그렇고요. 또한 자료가 길고 복잡한 경우 그걸 일일이 살피기 곤란하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숫자와 기호의 양을 가지고 과학적이니 운운하는게 얼마나 부실한 것인지는 생각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일 겁니다. 또한 앞서 식 10개 중에 1개만 틀려도 답은 엉터리가 된다고 했는데, 그 9개식을 보더니 '와! 과학적이다!'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깐깐한 사람은 9개만으로 안 믿을 수 있습니다. 99개의 맞는 식을 써놓고, 1개의 틀린 식을 끼워넣은 뒤에 믿어도 되는 것처럼 위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어디에 틀린게 끼워져 있게 되는가 하면, 그 첫 번째는 '전제'이고, 두 번째는 숫자와 기호의 결과를 한글로 번역하고 풀이하는 과정에서 틀리게 되고, 세 번째는 예측 등을 위해 그 한글을 현실과 매칭할 때 틀리기 쉬운 거라 봅니다. 이 세 곳이 숫자 및 기호가 많이 발라진 자료의 아킬레스건인 것입니다. 이는 경제학도 예외일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경제학적 판단을 우리가 이용할 필요가 있고, 이때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 입장으로서 좋은 판단 방법 중 하나는 '경제학자 집단'의 공통된 의견인지 아닌지를 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는 책임 구조를 파악하는 거라 봅니다. 그 판단이 틀렸을 때 누가 얼마나 책임을 지게 될지를 보고, 간접적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완하여 판단이 틀려도 맞았다고 우길 수 있는지 즉 사후에 달리 이야기짓기 함으로써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살피는 거라 생각합니다.
22/05/29 14:32
의미부여가 선이고 엄밀성 추구가 후인 경우가 많은 학문이 경제학인게 아니라면 원글에 인용된 글, 그리고 인용한 저자를 잘못 선정하신게 아닌가 합니다. 소개 한 책의 저자 분이 경제학자가 아닌(...)건 둘째치고서라도, 엄밀함 좋아하는 학문을 한다는 사람도 "인문학적 상상력" 같은 다른 저작에서 분과학문 담장 너머에 흙발로 들어갈때는 "의미부여가 선이고 엄밀성 추구가 후"인 접근을 하니까요.
경제학이 수학을 도구로 해서 관찰되는 현상에 대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 측면에서 엄밀한 설명을 제시하려 노력하는건 사실일 수 있겠습니다만, 해당 설명이 정말 잘 맞느냐를 검증하는건 다른 이야깁니다. 경제학에서도 실험 비슷한건 어차피 못하고, 선입견 관련해서도 당장 이 글에서도 "선입견을 만드는" 쪽에 있는걸요....
22/05/29 12:47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논리는 그냥 반증불가능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a와 b 중에 어떤 선택을 하든지, 경제학적으로는 선택한 쪽의 효용이 더 큰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음악을 듣지 않고 지나치는 것은, 음악보다 다른 것(예: 아침 식사)의 효용이 더 크다는 말과 그냥 똑같은 말이에요.
만약 반사실적으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을 멈추고 30분씩 음악을 경청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음악이 다른 것보다 효용이 더 큰 것이겠죠. 사람들은 실제로 아침 식사를 거르기도 하고, 출근길에 직장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이건 경제학적 이해나 몰이해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이 a보다 b를 선택했다는 말을 a보다 b의 한계효용이 크다고 바꿔말한 것에 불과해요. 제가 볼 때는 학부수준의 경제학원론 지식을 비경제학적 문제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인 것 같습니다.
22/05/29 13:42
자연과학을 공부한 입장에서, 자연과학 하는 사람들이 참 오만할 때가 많다는 느낌을 자주 받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자연과학은 물리학이거나 우표수집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노벨 우표수집상을 수상한 러더퍼드 경이 있죠.
그런데 잘 보면 경제학을 하는 사람들도 사회과학 분야에서 되게 오만한 경우가 많은 것 같더라구요. 뭐 대단한 실증을 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조슈아 벨 실험의 결과를 경제학의 언어로 '번역'한 것만으로 조악한 기획실험의 경제학적 몰이해를 갈가리 찢어놓는다는 자신감 넘치는 표현을 하는 것도 그런 오만의 연장선 같고요. 러더퍼드 같은 '오만한'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솔직히 같은 자연과학이라해도 이론물리 이외엔 단순 현상론과 분류학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고 (그 와중에 수학자들은 이론물리도 엄청 까죠) 좀 넓게 자연과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과학에 같은 '과학'이란 말이 붙는 게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엄밀함의 정도가 차원이 다르거든요. 그런데 그렇다고 사회과학이 무슨 사이비과학 같은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죠. 자연과학은 탐구하고 싶은 현상이나 모델에 가장 잘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설계하고 변인을 통제하여 엄밀한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사회과학은 현실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로 이런 방식이 불가능하니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론이 자연과학 이상으로 잘 발달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옆길로 새는 얘기지만 자연과학 중에선 천문학이 좀 이런 특징이 있고요. 일반적인 의미의 실험이라는 게 아예 불가능한 분야다 보니 다른 자연과학 분야에 비해 관측과 시뮬레이션을 통한 연구가 극도로 발달해있죠. 그런데 사회과학 중 수학적 모델링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분야가 경제학이다보니 (자연과학자의 눈으로 보면 Toy model 수준이겠지만) 유독 경제학을 '사회과학의 왕'같은 느낌으로 떠받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어차피 경제학도 사회과학이라 실험설계와 실증에 이런저런 제약이 많이 따릅니다. 결국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경제학만으론 안 되고 심리학, 정치학, 인류학 등등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죠. 어차피 저도 이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조슈아 벨 실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저 실험이 히트를 치고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실험들이 많았던 걸로 압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실험이 있었고 결과도 비슷했다고 들었고요. 그런데 만약 아침 출근시간 지하철 역에서 아이유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깟 지각 한 번 하고 아이유 노래를 듣고 가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았을까요? 조슈아 벨이 실험 전 걱정했던 것처럼 인파가 너무 몰려 통행에 방해가 되는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논의를 위해 실제로 아이유가 지하철 역에서 노래를 불렀고, 사람들이 몰렸다고 가정을 해보죠. 그럼 우리가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의 버스킹 < 출근길 시간 < 아이유의 버스킹 이라는 우선순위가 발생했다는 현상입니다. 이걸 한계효용 개념을 통해 경제학적 언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별개로 한계 개념이라는 거 사실 그냥 미분 아닌가요?) 그러나 사람들의 선호체계가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은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부분이겠죠. 전공자가 아니라 이 현상을 분석할 때 어떤 학문들이 더 적합한지 까지는 모르겠지만 오직 경제학의 언어로만 설명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마지막 사족으로 혹시나 있을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면, 제 얘기는 수학에 비해 이론물리가, 이론물리에 비해 다른 자연과학이, 자연과학에 비해 경제학이 덜 엄밀하다고해서 학문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듯, 마찬가지로 경제학이 다른 사회과학에 비해 우월하지도 않다는 얘기입니다.
22/05/29 15:06
일단 지적할 점이 좀 많은 내용인데.... 먼저 글쓴분도 말했지만 이 책의 저자는 경제학자도 아니고 글쓰신 분도 경제학자는 아닙니다;;
저는 자연과학중에서는 아는 분야가 어차피 물리학밖에 없으니 물리학과 경제학을 비교를 하겠습니다. 일단 자연과학의 관점에서는 경제학의 수학적 모델링이 Toy model이라고 하셨는데 이건 분야마다 다릅니다. 제가 거의 장담하는데 현대 매크로의 최대 주류인 Structural modelling, 소위 말하는 DSGE-like한 모델링은 현재 물리학과 최대 주류인 응집물질실험 대부분의 랩실에서 쓰이는 수학적 모델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이거랑 수준이 가장 비슷한 건 소위 말하는 계산고체 분야의 모델링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해서 경제학의 수학 수준이 낮냐? 이것도 거의 장담 가능한데 이론물리 일부 랩실을 제외하고서는 경제학의 미시이론전공만큼 어려운 수학을 쓰는 곳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이거 가지고 경제학이 물리학보다 어려운 수학을 쓴다거나 복잡한 테크닉이 필요하다는 건 아니고 한 학문에서도 세부분야마다 쓰는 툴이 상당히 많이 다르기 때문에 분야 전체끼리 어떻다 비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글 중에 경제학계는 오만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건 냉정하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건 물리학과 사람들을 오만하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 전공 모두 진짜 자기 전공이 다른 학문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소수고 (이런 말 진짜 정색하고 하면 물리학과나 경제학과 어딜 가든 이상한 사람 취급 받습니다...;;) 자기 자신이 전공하는 학문에 자부심이 엄청나게 강하기 떄문에 그런 느낌을 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사실 경제학은 엄청나게 열린 분야이기도 합니다. 심리학 정치학, 인류학, 행정학 등에서도 아이디어를 열심히 수입합니다. 그냥 "경제학의 언어로" 논문 쓸만한 거리만 있으면 됩니다. (물론 수출하기도 하구요.) 그런데 경제학의 언어는 특별히 어떤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엄밀성과 정량화입니다. 즉 수학적, 계량적 방법론으로 어떤 사회 현상을 보일 수 있으면 그냥 그게 바로 경제학입니다. 한계 개념이 미분 아니냐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아주 엄밀하게 만듭니다. "그냥 미분"이 아니라 연구 레벨에서는 수학과 석사 이상의 수학 수준의 Real Analysis와 Functional Analysis를 이용해서 해당 "함수"의 성질을 탐구합니다. 정량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어떤 사회에서 A가 B를 만나면 변한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변하냐? 를 답하고자 하는 것이 경제학입니다. 그 정량적, 계량적 계산을 할 수 있으면 전공에 관계없이 경제학 저널에 논문을 실으시면 됩니다. 사람들의 선호체계가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느냐?를 말씀하셨는데 이건 사실 별로 경제학자들의 관심이 아닙니다. 그건 말씀하신 것처럼 심리학자들의 관심입니다.(신경경제학같은 일부 심리학, 인지과학 등과 겹치는 세부 분야에서는 관심이 있기도 합니다.) 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의 선호 체계가 형성되는 이유보다는 그 모양에 훨씬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하셨듯이 경제학은 "현상론"적 학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와 현실세계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이 경제학입니다. 그 도구가 그저 수학적/계량적 방법론일 뿐입니다. 경제학이 다른 사회과학에 비해 우월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학문 간의 우열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다른 학문의 관점에서 잘 모르는 다른 학문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2/05/29 15:40
경제학의 모델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몰랐는데, 수학적으로 많이 복잡한 모델도 사용해서 연구를 하고 있군요. 하긴 어찌보면 물리학에서 다루는 그 어떤 복잡계보다도 더 '복잡'한 게 인간사회인데 그런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수학적으로 복잡한 모델을 사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 알고 계실 것 같지만 저도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응집물질실험이 물리학의 주류이긴 하지만 여기서 쓰는 모델은 다른 물리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수학적으로는 되게 단순한 편입니다. 고체가 신기한 게 이렇게 단순한 모델로 현상이 설명이 되나? 싶은데 해보면 진짜로 얼추 다 설명이 된다는 거죠. 물론 말씀하신 계산고체 같은 분야나 복잡계를 좀 더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에선 훨씬 복잡한 수학적 모델을 쓰겠지만요. 수학적으로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모델을 사용하는 건 아마 물리학 중에서도 입자이론이나 핵물리 이론쪽일텐데, 예를 들어 Nuclear Shell Model 같은 거 계산하거나 할 때 슈퍼컴퓨터 주구장창 돌려야하는 분야가 이쪽이지요. 그래서 가끔 고체하는 친구들은 '자연을 아름답게 설명한다'는 관점에서 고체가 진짜 물리학이라고 하기도 하더군요 크크 이건 좀 더 명확히 얘기하려다가 너무 주절주절 늘어놓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은근슬쩍 넘어간 것이기도 한데.. 저도 진짜 경제학자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경제학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잘 발달해 온 분야라고 생각하는데 학계에 그런 오만한 풍조가 있었다면 사실 그런 발전 자체가 불가능하지요. 물리학 쪽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실제로 학계에 몸을 담고 어느 정도 연구를 한 분들은 오만한 경우가 오히려 더 적죠. 제 체감상, 물리학자가 가장 오만하고 다른 학문을 무시할 때는 학부 1학년 때입니다. 경제학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사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 '경제학을 하는 사람'이 오만하다고 했지만, 이게 석박사급 이상의 진짜 연구자들을 겨냥한 얘기라기보단 더 포괄적으로 자연과학이랑 경제학을 공부했던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자연과학의 권위를 빌리기 좋아하는 사람', '경제학의 권위를 빌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써야 할 것 같네요. 그리고 주로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경제학 원론부터 읽고 와라'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쪽인 것 같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Toy model 같다고 얘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선데... 사람들이 세상의 진리를 담은 것처럼 찬양하는 경제원론에서 사용하는 수학적 모델은 실제로 엄청 허접하지 않습니까. 이건 학부 수준 자연과학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학부 수준에서만 비교하면 솔직히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모델의 허접함이 더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라, 자연과학에서 사용하는 모델이 더 허접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크크. 사실 이런 수학적으로는 허접한 모델을 가지고도 자연과 현상을 어느정도 충분한 수준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게 자연과학과 경제학의 신기하고 대단한 점이긴 한데, 중요한 건 어쨌든 이런 허접한 모델로는 자연이든 사회든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선호체계가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느냐?' 하는 것은 경제학의 주된 관심이 아니라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회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의 내용에 한정한다면 조슈아 벨 실험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학 뿐 아니라 다른 분야가 필요한 것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직 경제학만으로 (그것도 원론 수준 경제학만으로) 사회를 설명하려 하는 것 같길래 그 지점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22/05/29 17:25
맞습니다. 특히 응집물질실험 쪽은 많이 단순한 편이죠. 이것도 어떤 세부 전공에 따라 다르지만... 진짜 실험 위주 연구를 하는 사람들은 물리 이론도 이론이지만 실험 자체에 들어가는 시간과 테크닉들을 배울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앉아 이론 공부할 시간 자체가 적죠. 사실은 같은 응집물질실험도 뭘 연구하냐에 따라 이론 난이도가 크게 달라지기도 하죠
그런데 솔직히 경제학보다는 자연과학이 훨~씬 정확합니다. 미시/계량이론이야 수학적으로 엄밀한 증명을 할 수 있는 분야니 당연히 정확하지만 다른 경제학분야들은 자연과학보다는 훨씬 덜 정확합니다. 이건 경제학이 과학적이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다루는 대상, 즉 인간과 인간 사회가 너무 다양한 것들에 영향을 받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학부 수준 얘기도 맞습니다. 냉정하게 경제학 전공생들이 1, 2학년때 배우는 경제학 원론이나 거시/미시경제학 과목의 수학 수준은 잘 쳐줘도 겨우 고등학교 물1/물2 수준입니다. 경제학 원론 얘기는 이제 2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중요해서 그런 얘기를 할 때도 있고(진짜 원론적이고 기초적인 내용도 모르는 경우) 아니면 말씀하신 것처럼 원론 수준만 알면서 얘기를 함부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자는 소위 101ism이라고 해서 해외에서도 유명한(...) 비웃음 대상이고요. 저도 후자에 대한 지적에는 매우 동의합니다. 어설프게 아는 사람들, 어디서 읽은 경제학의 일부 내용만을 가지고 자신의 의도에 맞게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건 당연히 문제죠. 사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문제가 경제학을 꽤 배운, 그러니까 경제학 전문가중에서도 일부는 자기 가치관에 맞춰 일부 연구를 취사선택해 왜곡시켜 퍼트리는 사람들도 있다는 거죠. 이런 사람들이 경제학이라는 학문 전체에 대한 신뢰를 낮추는 것 같아 저도 많이 안타깝습니다... 완전히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한 학문 자체의 특성도 있겠습니다만...
22/05/29 17:29
경제학의 허점 중 하나는 심리가 매개된다는 점이라 생각합니다. 인간 정신은 복잡계죠. 물론 경제학에서도 일부는 심리가 매개되지 않거나 무시해도 좋은 것일 겁니다. 1만원을 빌렸는데 한 달 이자가 복리로 5%인데 일년이면 얼마겠느냐는 심리가 매개되지 않은 거죠. 그러나 경제학의 많은 것들은 심리를 매개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래라는 경제적 사건을 매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래에 있어 의사결정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 물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리도 복잡계가 있고, 그걸 무시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 영역에서 물리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날씨를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리는 그런 영역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안다고 주장하면 금방 들통이 나게 됩니다. 경제학은 그렇지 않은 거라 생각합니다. 결과로인한 피드백이 부실한 것입니다. 게다가 경제학은 정치가 엮일 가능성이 큰 거라 봅니다. 정치는 온갖 주관적인 것과 엮이기 쉽고, 이에 강력한 동기가 엮이기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물리는 온갖 잡다한 인과관계를 배제하기 쉬운 거라 생각합니다. 시공간적 연속성이 그 주요 이유가 된다고 보고요. 이는 화학 등 다른 과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실험실이란 것의 의미가 시공간적으로 외부와 차단한다는 걸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일어나는 것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내부적으로도 복잡계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어려움은 여전히 잔존할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물리학과 1학년생은 물리학자가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과학 선생님은 과학자가 아니죠.
22/05/29 14:40
출근길 바이올리니스트 실험은 기본적인 수요곡선 쪽 문제 같아요.
클래식 연주는 소수의 수요자가 높은 가격을 지불해서 거기서 시장이 형성되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이 희망하는 가격은 거의 0에 수렴해서 아무리 길거리에서 가격을 낮춰도 수요가 안생기는. 당장 유명 아이돌이 출근길에서 공연하면 그냥 반차 쓰든 지각하든 노래들을 사람도 꽤 있을텐데요.
22/05/29 15:49
라벨링이 없으면 본질적가치를 알아볼수 없고 이를 무시하게 되는데, 인간 허영심의 단편이라고 볼수도 있는거죠. 그냥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렇게 동작하는구나 싶습니다. 인지에 오류도 많구요.
22/05/29 18:51
글과 댓글 모두 유용하네요
비싼게 좋다라고 생각햐는건 허영심이 아니라 효율적 사고죠 수많은 것들에 대해 우리는 그 본질적인 가치를 알수가 없어요 이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하나하나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때문에 우리는 좋은것에 좋은가치를 매기고,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합니다. 그를통해 우리는 간단하게, 그야말로 효울적으로 가치를 알수있게되죠 문제는 본질적 가치와 돈이 정직하게 매치되지 않는경우가 생기는건데 이건 엄밀히 따지면 별개의 문제고요
22/05/29 20:28
바이올린 논의를 봐도 그렇고 책 목차를 봐도 그렇고 그냥 또 하나의 허접한 경제학 교양서 수준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자 약력을 보니 무려 '여백의 질서' 저자 분이시네요. 학창 시절 읽으면서 상당히 충격에 빠졌던 책입니다. 그런데 이후 이런저런 일 하시다가 지금은 논술강사라고 하시는데 책의 깊이도 고등학생 정도가 읽기에 좋은 수준입니다.
22/05/30 02:53
어디까지 오태민 작가의 글이고 어디까지 darkhero님의 글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데
Dresden님이 위에 언급하셨듯이 헤드라인 및 요약만 훑어보는게 아니라 기사 전문을 읽었다면 [워싱턴포스트에 "현대 대중은 예술을 소화할 역량도 안되는 주제에 허영을 떨려고 돈을 낭비해"라며 대문짝만하게 보도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을 쓰지는 않았겠죠. 조슈아 벨 실험을 예시로 삼아서 독자의 관심을 끌고 경제학적 개념을 설명하는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마블 영화에서 헐크 바지를 예시로 삼아서 물질들의 신축성의 한계를 설명하는게 아무런 문제가 없듯이 말이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슈아 벨 실험/마블 영화의 어설픈 지식인/과학자 행세가 경제학적/과학적 반론 앞에 처참하게 깨진다]는 얘기를 한다면 벙찌는 거죠. 웃픈건 저 조슈아 벨 기사가 2007년인데 7년 후인 2014년에 원 기자가 후속 기사를 썼습니다. '조슈아 벨 실험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라는 제목으로 말이죠. 대부분 사람들이 조슈아 벨 실험에 대해서 기사 원문이 아니라 짧고 부정확한 요약을 통해서 알게 되는 현실을 개탄하는 내용인데 거기서 7년이 지난 뒤 여전히 혹은 어쩌면 더더욱 후속 기사의 교훈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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