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7/03 13:45:37
Name RookieKid
Subject [일반] 충분히 눈부셨다. (수정됨)
https://ppt21.com/?b=8&n=81030

>> 지난 8회 글쓰기 이벤트 글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0.
할머니와 이별했습니다.

6월초 결국 요양병원에 입원하시게 된 할머니.
지난 토요일 10시. 그녀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습니다.



#1.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외손주의 자격으로 치러본적은 있지만
장례를 주관하는 맏상주의 아들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장례식장에 할머니가 도착하신 후 시신을 확인하는 절차.
할머니의 영정을 놓고 제단을 꾸미는 것.
음식과 일회용품 등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
슬픔과 피곤으로 눈이 퀭해진 부모님과 형의 얼굴을 보는 것.
입관 전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에게 위로를 받는 것.
입사한지 2달 된 회사에서 화환과 조문을 받는 것.
할머니의 관을 들고 영구차에 옮기는 것.
화장장에 들어간 할머니가 하얀 재가 되어 나온 것을 보는 것.
할머니가 원했던 장지에 하얀 재가 묻히고 그곳에 손 흔들며 인사를 하는 것까지.

너무나 슬픈 2박 3일을 보냈습니다.



#2.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날이 참 좋고 맑았습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올랐어요.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있다"]



#3.
태어났을 때부터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굉장히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오늘은 할머니 방에 있던 짐들을 모두 치우고 버릴 것들을 골라내고 방을 비웠습니다.
할머니 방에 있던 비니가 제 방에 왔는데 흰 머리카락 한 올이 붙어있었습니다.
할머니의 것이겠지요.
주책스러운 것도 알지만 차마 떼지 못하고 그대로 붙인 상태로 옷장에 넣어두었습니다.
언젠가 까맣게 잊고 "뭐야?" 하면서 자연스럽게 떼고 쓰는 날이 오기를 바래봅니다.



#4.
그녀는 눈이 부셨을까요.
평생 행복하지 못하게 살다가 돌아간 그녀는 눈이 부셨을까요.
병원에서 마지막 의식을 붙잡고 있을 때, 결혼하지 않은 손주 걱정을 했던 그녀는 눈이 부셨을까요.
목사님이 집에 찾아와 임종예배를 드릴 때 청력이 좋지 않은 귀에 대고 "권사님, 기도제목 있으세요?" 라고 물어보셨을 때,
"우리 아들, 손주들, 새끼들 잘 사는 거요." 라고 대답하고 목사님의 손을 꼭 붙잡고 기도했던 그녀는 눈이 부셨을까요.

그녀를 보는 제 눈이 부시다는 건 알겠네요...



#5.
할무니.
손주들 평일 휴가 다 받아가라고 토요일에 가신거 다 알아요.
하여튼 쓸데 없이 그런 거에 디테일하다니깐.
우리 형아 32년. 나 27년 동안 할무니 사랑 많이 받고 잘 컸어요.
할무니 빈소에 화환 봤죠? 그거 우리가 다 했어요.
마지막까지 내 손 붙잡고 형아 걱정만 해서 좀 삐쳤지만..

할무니 사랑해요.
나도 할무니만큼 오~래 살고 따라갈테니까
거기서 잘 살면서 딱 기다려요.
또 만나요. 안녕!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사악군
19/07/03 13:55
수정 아이콘
고인과 글쓴이 모두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머님은 행복하셨을 겁니다. 평안하실거고요.
19/07/03 14:00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 가셨기를..
To_heart
19/07/03 14:35
수정 아이콘
담담함에 베어있는 슬픔이 공감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홍승식
19/07/03 15:19
수정 아이콘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진산월(陳山月)
19/07/03 18:27
수정 아이콘
고된 하루를 마치고, 오랜만에 이발을 하고, 집에 와 씻은 후 비빔면에 오징어 숙회를 비벼 안주삼아 소주 한 잔 하며 습관처럼 피지알에 들어왔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화목한 가정을 일궈낸 할머님을 존경합니다. 평안하시길........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1678 [일반] 충분히 눈부셨다. [5] RookieKid6524 19/07/03 6524 12
81677 [일반] "제약사 여직원이 몸로비…" 영업사원의 슬픔.... [297] 修人事待天命33673 19/07/03 33673 36
81676 [일반] [유럽] EU 주요 보직의 명단이 드디어 합의되었습니다. [15] aurelius7369 19/07/03 7369 1
81675 [일반] [팝송] 에이브릴 라빈 새 앨범 "Head Over Water" [11] 김치찌개5974 19/07/03 5974 1
81674 [일반] 아프리카 TV에서 역대급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80] Leeka24642 19/07/03 24642 2
81673 [일반] [9] 용서 [13] 이혜리4774 19/07/02 4774 1
81672 [일반] 소설 '부활'을 읽고(스포 있습니다.) [2] chldkrdmlwodkd4380 19/07/02 4380 1
81671 [일반] 파 프롬 홈 후기(스포) [28] aDayInTheLife7284 19/07/02 7284 1
81669 [일반] 영화 슈퍼맨(1978)이 높게 평가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32] 중년의 럴커8368 19/07/02 8368 7
81668 [일반] [9]여자사람 동생과의 휴가 [42] 전직백수8314 19/07/02 8314 26
81667 [일반] (파 프롬 홈 강스포) 그 남자를 그리워하며 [22] roqur7984 19/07/02 7984 1
81666 [일반] 보험에 대하여 Araboza -4- [30] QuickSohee9273 19/07/02 9273 21
81665 [일반] 내가 내맘대로 이해하는 잔다르크이야기 [18] noname116733 19/07/02 6733 2
81664 [일반] [9] 나의 휴가, 너의 휴가, 우리의 휴가 [3] 초코머핀4390 19/07/02 4390 2
81663 [일반] 오버로드와 유녀전기에 관해서(스포 있습니다.) [29] chldkrdmlwodkd6088 19/07/02 6088 0
81662 [일반] 자유게시판 카테고리 우선선택 기능 단축키이동 지원 [11] 레삐4128 19/07/02 4128 6
81661 [일반] 오늘날의 세계는 3개의 '문명권'으로 삼등분된 거 같습니다. [74] aurelius11983 19/07/02 11983 3
81660 [정치] 교육공무직들은 공무원이 되고 싶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35] 아유11067 19/07/02 11067 13
81659 [일반] (강스포) 스파이더맨 : 파프롬홈 후기 [45] 삭제됨9232 19/07/02 9232 2
81658 [일반] 반송중 시위대의 홍콩입법회 장악 [25] 나디아 연대기10333 19/07/01 10333 3
81657 [일반] 기자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23] 간옹손건미축9026 19/07/01 9026 8
81656 [일반] 인피니티 사가의 마지막을 장식할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 개봉을 앞두고. [14] 은하관제7204 19/07/01 7204 1
81655 [일반] [보드게임] 미친 시대에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핵무장뿐... 『맨하탄 프로젝트2 - 종말을 향한 초읽기』 [6] 6688 19/07/01 6688 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