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4/27 16:29:14
Name -안군-
Subject [일반] [8] 아버지와의 대화중 (수정됨)
1. 시작하며: 저희 아버지는 대학시절에 큰 교회의 청년회장이자, 전국 장로교 청년연합의 간부셨고, 명문대학의 공대 재학중인, 엘리트까지는 아니더라도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이셨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손가락 안에 들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자기 딸과 결혼시키고 싶어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유신이 일어나고, 장로교 청년연합에선 유신반대 성명을 내고, 아버지는 그날로 정치범이 되십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교회에서도 배척당하고, 이후로 교회에도 발을 끊고, 취직도 되지 않아 장사를 하셨는데, 확실히 장사쪽엔 재능이 없으셨는지 계속 실패만 거듭하셔서 우리 가족은 계속 힘들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2. 민주화 유공자 보상법: 시행된지는 꽤 됐지만 요즈음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보상을 해 주고 명예회복도 시켜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도 말씀드려봤는데, 이미 알고 계시더군요.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좌파놈들이 주는 돈은 받지 않겠다" 였습니다.

3. 대화:
아들: 아니 좌파는 좌파고, 돈은 받으셔야죠. 그리고 문재인이 왜 좌파인가요? 하는 정책들을 보면 죄다 우파적이구만.
아버지: 지금 북한이랑 대화를 하고, 종전선언 얘기가 나오잖냐. 그거 북한이랑 남한이랑 분리해서 각자 나라로 살자는거 아니냐? 그게 좌파지 뭐가 좌파냐?
아들: 아니... 현실적으로 지금 북한하고 당장 전쟁을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 종전선언하고나서 휴전선이 국경선이 되면 중국이나 러시아랑 육로로 연결도 할수 있고, 송유관이나 가스관 같은것도 연결하고, 철도도 깔면 경제효과도 엄청 클텐데 이 상황에서 통일 얘기를 하는건 너무 나이브한거 아닙니까?
아버지: 그 얘기는 지금 한국전쟁은 없었던걸로 하자는거지. 전쟁을 일으켰던 북한을 용서하자는거 아니냐? 한국전쟁의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겠다고? 지금 니네 젊은 친구들은 세월호에서 애들 죽은거 가지고도 박근혜를 죽이네 살리네 하고 있는데, 한국전쟁은 세월호보다 수천 수만배는 더 큰 피해를 일으켰잖아. 만약 종전선언하고 북한 정부를 인정해주면, 한국전쟁에서 부모형제를 잃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은 다 뭐가 되는거냐? 어떤 식으로든 북한 정권을 끌어내리고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그때 죽어간 사람들의 넋이라도 위로해 줄 수 있는거 아니냐? 나이브한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겠지.
아들: ...아니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

4. 사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제 논리로는 더이상 아버지의 말씀에 반박하기 어려웠습니다. 설득을 당한건 아니지만 태극기 어르신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더군요. 게다가 유신반대 투쟁을 하는 중에 믿고 있던 학교, 동료, 교회에서 모두 버림받은 트라우마는 아마 돌아가실 때까지 씻을 수 없으시겠죠. 그 때문에 지금은 오히려 우리 가정에서 가장 극우적인 성향을 가지고 계시고요.
저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이라는 곳이 쉽게 선악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는 곳이고, 어느 쪽이든 자신들만의 논리와 신념이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되더군요. 이번 대화를 통해서 한 가지 더 깨닳은 느낌이 듭니다.
옳은 일을 하셨음에도 그 때문에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아오신 아버지... 비록 정치적으로는 전혀 말이 안 통하지만, 그래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4/27 17:1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아버님 훌륭하신 분이시네요
독재시절에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더 큰 역사의식이 존경스럽네요 어르신들은 그런 강직함과 자존심이 있으시죠
조금 답답하고 촌스러워도 그런 것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급식비 내던 시절에 교직에 있는 친구가 반에 어려운 아이 급식비 보조해주려고 전화했더니 학생아버지가 정중히 거절했다는 소리 듣고 왠지 감동받았던 생각이나네요
나와 같다면
19/04/27 17:53
수정 아이콘
안군님까지 참여하셨네요. 추천 때립니다.
19/04/27 19:31
수정 아이콘
정치든 종교든 다른 무슨 이데올로기든간에 가족간에 의가 상할 가치는 없지 싶습니다. 이게 뭐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일상 생활 하는데 부딪힐 일도 없는 건데 굳이 싸울 이유 자체가 없죠.
-안군-
19/04/27 19:35
수정 아이콘
그러니까 일단 보상금은 받고 보셔야...
사다하루
19/04/27 22:05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심각하게 글 읽고 ' 아 그럴수 도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스크롤 내리다가 여기서 빵터졌잖아요 크크크크
-안군-
19/04/27 22:35
수정 아이콘
"거절하기엔 너무 큰 돈이었다" 급이었으면 설득 가능했는데...(시무룩)
19/04/27 23:06
수정 아이콘
아 그건 안군님 일상에도 약간이나마 영향이 있군요!
19/04/27 21:41
수정 아이콘
저도 아버님의 논리에 반박하기가 어렵네요.
cluefake
19/04/27 23:12
수정 아이콘
정치적이나 신념은 존중하는 편입니다만
...아니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2)
19/04/28 00:08
수정 아이콘
좌파가 주는 돈이건 우파가 주는 돈이건 돈은 돈이다... 라고 설득하려고 시도했을 것 같긴 합니다. 남북 화해 기조에 대한 부분은 논리적으로 반박하기가 어렵네요
서지훈'카리스
19/04/28 01:51
수정 아이콘
반박은 가능한데 가족간에 그럴 필요는 없겠죠
겜숭댕댕이
19/04/28 12:01
수정 아이콘
안군님하고 아버지 두 분 다 멋지시네요. 그래도 돈만큼은...크흠
ioi(아이오아이)
19/04/28 13:45
수정 아이콘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3)
서린언니
19/04/28 13:57
수정 아이콘
...아니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4)
의지박약킹
19/04/29 08:27
수정 아이콘
독재에 대한 투쟁처럼 고결한 일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보상금 나오는 일을 신념 문제로 아버지가 거부 하고 계셨는데
저랑 엄마 고생시킨 일과 평생 생활비 못 준 걸로 후벼팠더니 포기하시고 보상금 받아오시더라고요. 너무 잔인했지만 엄마 생각하면....
아드님이 착해요 저에 비하면...휴
사악군
19/04/29 10:24
수정 아이콘
맞는 말씀입니다. 아버님께는 그게 자존심의 가치인거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0995 [일반] 동네 놀이터 후기(feat. 오지랖) [7] April2338186 19/04/30 8186 1
80994 [일반] 합의 성관계 6회.. "당했다" 신고한 20대女 집유 [194] 삭제됨18494 19/04/30 18494 27
80992 [일반] 수능이 서민한테 불리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182] AUAIAUAI12764 19/04/30 12764 9
80991 [일반] 아시아나, 최대 3년 무급휴직 발표 [85] Leeka16663 19/04/30 16663 7
80990 [일반] 자한당 해산청원 100만 돌파 [427] 어강됴리19365 19/04/30 19365 23
80989 [일반] 패스트 트랙과 참여정부 시즌2 [315] StayAway19405 19/04/30 19405 5
80988 [일반] 팩스요정(?)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 근황...jpg [75] 쿠즈마노프16404 19/04/29 16404 7
80987 [일반] [스포주의-왕좌의게임]2019년까지는 건강히 살아야지 했던 이유 [94] T1팀화이팅~10918 19/04/29 10918 1
80986 [일반] [강스포] 어벤져스 닥터스트레인지 14만분의 1은 사실... [79] HesBlUe19366 19/04/28 19366 3
80985 [일반] 스포없는 일본에서 감상한 엔드게임 감상평 및 기타 잡담. [16] 삭제됨8518 19/04/28 8518 1
80984 [일반] [스포]엔드게임, 간단한 소회 [46] 로랑보두앵9149 19/04/27 9149 1
80983 [일반] 우리나라에서 사기꾼이 가장 많은 분야 [129] 도뿔이18272 19/04/29 18272 6
80982 [일반] [8] 가정의달을 대비하여.. [10] 겨울삼각형7228 19/04/29 7228 4
80981 [일반] 어벤져스: 엔드게임 중에서 인상깊었던 장면들(스포) [41] 아라가키유이12604 19/04/27 12604 8
80980 [일반] [8] 제 첫사랑은 가정교사 누나였습니다. [32] goldfish13431 19/04/29 13431 34
80978 [일반] [스포 있음] 엔드게임 후기 + 여러분의 마블 최애 여성 캐릭터는? (데이터) [82] k`13232 19/04/27 13232 7
80975 [일반] <자정 4분 뒤>보고 든 호러 이야기. [8] aDayInTheLife6267 19/04/28 6267 1
80972 [일반] [8] 가정 [22] 갈색이야기5646 19/04/28 5646 12
80970 [일반] 사는 이야기 [19] 삭제됨6936 19/04/27 6936 21
80968 [일반] 오라클아레나(골든스테이트) NBA P.O. 직관 후기 (2) (데이터) ​ [24] 2210139 19/04/27 10139 26
80967 [일반] 공주보 교량, 지하수, 가뭄 그리고 가짜뉴스(PD수첩) [24] 읍읍13799 19/04/27 13799 24
80966 [일반] 선진국 치매 연구 근황.jpg 이라고 돌던 자료가 가짜뉴스라는군요 [41] 말다했죠14180 19/04/27 14180 7
80964 [일반] [8] 아버지와의 대화중 [16] -안군-7512 19/04/27 7512 1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