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인가 ..아들녀석(현재 백수)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습니다.
계획에 없이 삼촌들과 남해를 한 바퀴 돌고온 후였지요.
아들 : 어머니.... 이이명에 대해 아십니까?
나 : 이이명이라면, 숙종 때 벼슬한 서포 김만중의 사위 아니냐. 근데 와?
아들 : 남해로 귀양 왔었는지 묘정비가 있데요. 사당은 없어지구.
나 : 아마 그럴게야. 평생 세 번이나 귀양살이 했지. 남해에서 두 번 살았나..
아들 : 무슨 죄를 지어 세 번씩이나 귀양살이를 했습니까?
나 : 뭐.... 특별히 형사 입건적인 죄를 지었겠냐.
당시야 당쟁이 극심했으니 걸고 넘어지면 다 죄가 되는 거지 뭐.
숙종 때 정권교체가 가장 많이 일어나지 않았냐.
니 알다시피 변덕스런 심술쟁이 숙종은 ,
경신, 기사, 갑술, 세 차례나 환국을 일으켜, 선비를 무더기로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경신환국에는 남인을, 기사환국에는 서인을, 갑술환국에는 또 남인을 귀양보냈지.
나 : 숙종6년, 서인 남구만이 영의정 허적과 대사헌 윤휴를 탄핵했지.
윤휴는 소나무 천그루를 베어 호화주택을 짓고,
허적의 아들 허견은, 양가집 유부녀를 겁탈하고 대비의 서모를 때렸다고 말이야.
아들 : 남구만이라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지은 사람 아임니까.
나 : 그렇지. 시조는 한가로와도 탄핵은 날카로왔어.
그러나 허적이 무고로 뒤집었고,
남구만은 거꾸로 죄를 뒤집어쓰고 남해에 위리안치 되었다.
원래 거제도로 귀양보내려 했었는데, 거기엔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이미 귀양 가 있었거든.
무슨 작당을 꾸밀까 싶어 떼어놓은 게야.
아들 : 그러니까 야당인 서인이 여당 당수를 걸다가 당한 사건이군요.
나 :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숙종이 공정치 못하기도 했고. 사실 허견은 개망나니였거든.
그러나 1년 후 허적은, 참 별일 아닌 일로 숙종의 심기를 건드렸어.
허락도 안 받고 궁중의 기름 천막을 자기집 잔치에 가져다 쓴 게야.
아들 : 그기 그리 큰 죄입니까?
나 : 임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백성이 도탄에 빠지거나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인줄 아냐?
천만에 !! <자기 자리에 대한 도전>이야.
조광조가 왜 사약을 받았겠냐. 뇌물을 먹었나. 역모를 꾸밌나. 사람을 죽있나.
중종은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림의 우상이요 스타인, 조광조가 두려웠던 게지.
선조도 이순신장군이 두려워서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견제했다.
아들 : 왜적과 죽기살기로 싸우고 있는데 말입니까.
나 : 만약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영웅이 아니라 역적이 되었겠지.
무슨 이유를 달아서라도 조정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서,
숙종은 남인이 왕실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했다.
그날로 바로 철퇴를 내리쳤지.
맨 먼저 병권을 빼앗아 장인 김만기에게 넘겨주고,
송시열을 사면하고, 남구만을 도승지로 불러들였다.
우의정 권대운은 영해로 귀양갔다.
윤휴는 사약을 받고 ,허견은 역모죄로 목이 달아나고, 허적은 김만중의 탄핵을 받아 사약을 받았다.
남인 백여명이 죽거나 귀양을 갔지.
아들 : 헐 ~~ 꼴랑 기름 천막 때문에 사태가 어마무시하게 커졌삐릿꾸마.
나 : 임금의 마음이 남인에게서 떠난 걸 안 순간,
서인이 정권을 되찾기 위해 사생결단 덤빈 결과지.
그게 당쟁이고 권력 투쟁 아니냐.
무엇보다 숙종이 찌질이였구.
나 : 두 번째는 숙종 15년에 일어난 기사환국.
사극에서 여러번 우려먹은 장희빈이 그 사단의 중심에 있었지.
원래 서인은 국혼물실國婚勿失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왕비 자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인에서 꿰차야 한다는....
임금의 여성 취향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래서 첫부인 인경왕후는 서인 김만기(김만중의 형)의 딸이었고
인현왕후는 민유중의 딸이며 송준길의 외손녀였다.
인현왕후는 건어물녀였던지 사랑을 못 받았어.
그런데 장희빈이 숙종 14년에 아들을 낳았다.
너무 좋아 정신줄 놓은 숙종이, 두달 후 원자 정호를 내렸다.
인현왕후 아직 22살인데 말이다.
서인의 보스, 산림의 거두, 81세 송시열이 흰수염을 휘날리며 무림에서 나와 일갈했다.
성급하지 않느냐고.
숙종은 분노했다.
이미 종묘사직에 고한 일을 들고 일어나다니....
에이~ 씨--- 저것들이 또 나를 무시했어!!!!
"시열이를 당장 제주도로 귀양보내라 !! "
송시열은 이듬해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영의정 김수항은 진도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았다.
병조판서 이사명(이이명의 형)도 사약을 받았다.
어영대장 김익훈은 매를 맞아 죽었다.
판중추부사 남구만은 강릉으로 귀양을 갔다.
대제학 김만중은 남해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3년 후 귀양터에서 죽었다.
사헌부 지평 심권은 송시열을 따른 죄로 남해로 귀양갔다.
홍문관 부교리 이미명, 유언비어를 퍼뜨린 죄로 남해로 귀양갔다.
드디어 나왔다. 오늘의 토크 인물, <양주목사 이이명 !! >
역시 송시열을 따른 죄로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남해에서 3년 귀양살이 했다.
모두 18명이 죽고 59명이 귀양을 갔지.
숙종은 실컷 분풀이를 하고
권대운을 영의정으로 불러들이고 요직에 남인을 다 앉혔어.
아들 : 어머니....참 할 말이 없습니다요.
정치가 뭐 아兒들 장난 같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도자 자질에 나라의 운명이 달린기네예.
국사 시간에 다 배웠건만도 와 이리 새삼스럽습니까?
정치에 몸 담았다.. 하모, 귀양살이는 뭐.. 필수 체험 코스였다 아임니까.
그라고 남해는 인기 귀양지 베스트 원이었고요.
나 : 귀양지 F4는 남해, 거제도, 제주도, 함경도 오지였느니라.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고,
무엇보다 위리안치에 필요한 가시나무 울타리용 나무가 많았다고나 할까. 크크
귀양도 급수가 무척 다양하단다.
수능 9등급보다 더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었지 싶다.
한편으론 인간적이고도 도덕적인 형벌이었지.
말이 나온김에 또 아는 척을 해보까.
귀양은 본래 귀향이었다.
한마디로, 네놈은 집에 가서 아兒나 봐라였다.
근데 아는 안 보고 작당을 해서 몰래 일을 꾸미니
머얼리 보내뻔져서 격리시키는 것으로 변했지.
바람과 구름을 벗삼아 반성도 하고 물러남의 이치도 깨치라....뭐 그런 취지야.
죄질과 죄인 신분에 따라
배配, 적謫, 찬竄, 방放, 천遷, 사徙 등 이름도 형식도 다양했단다.
가장 많이 시행된 것은
천사遷徙, 부처付處, 안치安置 등 세가지다.
천사는, 고향에서 천 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
말 그대로 고향에서 내쫓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는, 중도부처의 준말로
배소로 가는 도중,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인데 대개 고관에게 가했다.
추사 김정희의 친구 권돈인이 예송에 걸려
귀양갈 때 낭천에 중도부처되었단다.
안치에는, 본향本鄕안치, 주군州郡안치, 사장私莊안치,
자원처自願處안치, 절도絶島안치, 위리안치 등이 있는데,
모두 다 주거제한의 연금이다.
본향안치는 고향에,
사장안치는 개인 별장에,
자원처안치는 스스로 유배지를 택하는 것으로
셋 다 가벼운 격리, 연금이었다.
주군안치는, 일정한 지방을 지정하여 그 안에서만 머물며
그 안에서는 자유로이 왕래하고 활동할 수 있게 했다.
물론 가족을.. 엄밀히 말해 첩을 데려가도 되었고...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된 것이 바로 주군안치였다.
주군안치였기에 강진에서 네번이나 이사를 하고
자유로이 백련사로 읍내로 다니며,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힘쓸 수 있었지.
그러나 절도안치와 위리안치는 가혹했어.
절도안치는 말 그대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 안치시키는 것으로...
아들 : (말을 끊고) 절도안치도, 첩을 데려갈 수 있었나요?
나 : 그래, 위리안치만 제외야
아들 : 어머니... 저요 ..갑자기 죄 짓고 여친이랑 절도안치 당하고 싶네요.
아...증말 낭만적인 형벌이야.
나 : 이--- 짜슥이...
위리안치는 귀양집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한 발짝도 못 나오게하는 중형이지.
보통 탱자나무 울타리를 사면에 둘렀어.
탱자나무는 남해와 제주도에 많았기 때문에
위리안치를 받으면 이쪽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완당(=추사)은 위리안치 중에서도 원악지遠惡地 제주도,
그 중에서도 80리 더 가는 대정현에 떨어졌지.
많은 사람들이 다산과 완당의 귀양살이를 비교하면서
다산은 귀양살이를 통해 현실을 발견했는데,
완당은 그렇지 못했다고 말하곤 하지.
그것은 유배의 성격이 달랐던 데에도 이유가 있었어.
완당은 귀양살이에서 자아를 재발견했지.
언젠가 엄마가 완당을 더 알게 되면 그의 제주도 유배시절을 이야기할 참이야.
아들 : 어머니....이제 갑술환국을 마저 말씀하시고 토크를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스니껴.
나 : 왜 지루하냐?
아들 ; 그럼 재미있으리라 생각하십니껴.
제가 미쳤다꼬 이이명을 물었을까요.
나 : 으음....그렇다면 숙종과 이이명의 독대까지 말해야겠군.
나 : 세번째 갑술환국은 숙종 20년에 일어났다.
남인의 지나친 욕심이 스스로 무덤을 팠지.
나아가 취하였으면 물러설 줄을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기사환국으로 살아남은 서인을 싹쓸이할 궁리를 냈다.
서인 김춘택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을 넣은 것이다.
김춘택은 김만기의 손자로 일찌기 숙원 최씨와 공주들을 서인편으로 끌어들이고,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궁중의 기밀을 빼내기도 한 인물이야.
한마디로 권모술수를 잘 부렸지.
드디어 국청이 열리고 서인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이었는데...
서인은 이판사판 역고변을 넣었어.
장희재가 최숙원의 생일날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말이야.
참으로 어이없는 고변이었지.
이 무렵 카멜레온 숙종의 사랑이 장씨에서 최씨로 옮겨가고 있었으니,
사태는 급반전 되고 말았어.
남인의 우두머리 우의정 민암은 목이 달아나고,
영의정 권대운은 남해로 귀양가고,
판의금부사 유명현 또한 남해로 귀양가 2년 후 죽었지.
사약으로 죽거나 매 맞아 죽은 사람이 14명이고 67명이 귀양을 갔단다.
강릉에 귀양 가 있던 남구만이 영의정으로 복귀하고,
심권은 수찬으로 등용되었다.
남해로 귀양갔던 이이명도 이조좌랑으로
역시 남해로 귀양갔던 이미명은 호조참의로 등용되었지.
아들 : 차암...한마디로 당이 곧 나의 운명이구만.
평생 벼슬을 수십 차례 사양한 조식과 성혼이 이해가 갑니데이.
나 : 그래,, 동인과 서인,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대를 이어 죽고 죽이는 대립.
학문이 바다를 메우고 인격이 하늘을 찌른들,
권력 앞에서는 이전투구하는 일개 벼슬아치에 불과하고나 할까.
서인 세상에서 승진을 거듭하던 이이명은,
형 이사명의 죄를 변호하다가 숙종 24년 공주로 또 귀양을 간단다.
하지만 이듬해 풀려나 예조판서, 대사헌, 좌의정을 거쳐
예순에 영중추부사가 되어 서인의 실질적인 우두머리가 되었지.
<드디어 숙종 43년, 이이명은 임금과 독대하였다.>
아들 : 임금과 신하는 독대할 수 없는 것이 조선시대 관례 아임니껴?
나 : 그렇다. 반드시 사관과 승지가 자리를 함께 해야 했지.
그러면 그런 관례를 무시하고 둘은 무슨 밀담을 나누었을까.
추측컨대.....
숙종은 세자(경종)를 무척 싫어했다.
아마도 세자를 갈아치울 일을 꾸미라 지시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꼬투리를 잡기위해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인가.
왕비의 폐출도 어려운데 하물며 차기 대권자 세자를 ...
그러고 있는데 그만 숙종이 죽고 말았어.
다급해진 노론의 네 대신,
영의정 김창집, 영중추부사 이이명, 관중추부사 조태채, 좌의정 이건명은
노론대간을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갔지.
그리고 연잉군(영조)을 세자로 세우라 윽박질렀지.
경종은 맥없이 윤허했다.
노론은 여기서 만족치 않고 그 해가 가기 전에 또 상소를 올렸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야 합니다."
사실 경종은 동생 연잉군을 죽일 생각도 없었고, 그럴 힘도 없었는데
왜 노론은 죽기살기로 덤볐을까.
경종은 어쩔 수 없이 또 윤허했다.
하지만 이 일로 노론은 그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어.
소론의 강경파 김일경이 많은 대신들의 도장을 받아 상소를 올리자,
드디어 경종은 칼을 뽑았다.
이이명은 남해로 , 김창집은 거제도, 조태채는 진도, 이건명은 나로도로 위리안치되었다.
이이명은 남해에서 귀양살이 터도 잡기 전에
대역죄가 추가되어 한양으로 불려와 사약을 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64세였다.
경종이 은전을 베풀어 목이 잘리는 수모는 면했지.
여기서 이이명의 히스토리는 끝났다.
물론 그를 포함한 노론의 자손들이,
소론에 의해 어떻게 도륙나는가는 말하지 않겠다.
아들 : 참...허무하군요.
권력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듭니다.
나 : 나아가기만하고 물러설 줄 몰랐던 게지.
아들 : 그리 몇년씩 귀양을 살았는데 왜 물러설 줄 몰랐을까요?
나 : 그걸 깨치라고 보냈는데 다시 권력을 잡을 때만 기다린 게지.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다들 세살 적부터 공부에 입문하여 성리학 물을 먹은 선비들이다.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려야함을
뼛 속 깊이 배운 사람들이지.
당대의 학자를 스승으로 두고 그 문하에서 수년씩 합숙하면서
스승의 학문과 언행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다들 자신을 다스리기 전에
남을 다스리려 하다가 멸문지화는 물론이고
나라에도 해를 끼쳤지 않았냐.
그만큼 자신을 다스리는 일은 어렵다.
아들 : 그러면 남도 안 다스리면 될 거 아임니까.
나 : 야이 짜슥아 그것이 더 어렵도다.
니가 한 바퀴 돈 남해는, 구석구석마다 유배객의 이야기와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그저 금산에 올라 바다를 감상하고 해수욕이나 즐기기엔
너무 많은 사연을 안고 있다고 하겠다.
전직 대통령 둘, 전 도지사 현 도지사, 전 대법원장이 현재 감옥에 들어앉아 있지요.
물론 저들은 죄값을 치르는 중이라 저 시대 귀양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겠으나,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면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은, 그 잘못은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