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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信不立
논어 안연편에서 유래.
믿음이 없이는 설 수가 없다.
신뢰 없이는 조직이나 국가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음을 의미.
번아웃이 온데다가 잿밥에 눈길이 돌아가는 바람에 3주간 펜을 놓았습니다. 어쨌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해가 밝고, 독일군의 상황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앞서 밝혔듯이 독일군은 강추위와 소련군의 강한 반격에 꽤나 심각한 전투력의 저하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죠. 소련군 입장으로서도 만만치 않은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극동의 병력을 빼내서 수도 방어에 써야 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이미 이 때부터 소련군의 잔여 병력이 조금씩 한계에 달해 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이런 상황, 즉 서로 기진맥진해서 기동이고 화력이고 뭐고 전장에서의 다양한 변수가 발동될 여지가 매우 줄어든 상황에서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상태가 나은 쪽이 전과를 거두게 마련입니다. 소련군이 그랬죠.
주코프는 수도 앞에 잔뜩 몰려있는 독일군의 중부 집단군 전체를 크게 포위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상황이 꽤나 키예프와 엇비슷했던 것이, 주력부대가 한 곳에 몰려 있었고, 후퇴가 거진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었죠. 실제로 얼 치엠케(Earl Ziemke, 군사학자)는 소련군이 시도한 이 포위 섬멸 계획을 바로 키예프 포위전에 비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선공은 후방 부대의 몫이었죠. 여기서 말하는 후방 부대라는 것은 후방에 배치된 부대가 아니라 독일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부대입니다.
1941년 12월 25일의 모스크바인데요, 말씀드렸다시피 이 당시 소련군의 반격은 그렇게까지 성공적이지는 못했고, 이 정도 선에서 한 번 정리되고 새해를 맞이했다고 했었죠. 주력군인 제3기갑집단과 제4기갑집단을 치기 위해서 소련군의 공격은 이번에는 북쪽에서부터 수행되었습니다. 바로 르제프였는데요, 르제프 북동쪽의 스타리차에서 출발하는 제29군의 공격이 12월에 한 차례 실패로 돌아간 상황에서 이번에는 르제프를 끼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크게 돌아서 남쪽 및 서쪽에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9A라 쓰인 곳의 북서쪽 11시 방향에 있는 조그마한 회색이 르제프입니다. 이전에 시도한 공격이 바로 29A가 쓰인 방향이었는데요, 저게 실패로 돌아가니까 서쪽에서 돌출부를 만들어버린 겁니다. KK라고 쓰여 있는 것은 기병군단인데, 여기서는 제9기병군단이 활약했습니다. 르제프 자체가 아주 중요했다고 보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어 보여요. 이미 북부 집단군과의 연결은 소련군에 의해 한참 전에 칼리닌이 해방되면서 차단당한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남는 의미라고는 르제프를 통해서 제3기갑집단이 보급을 받는다는 정도입니다. 물론 보급선은 중요하죠. 그런데 상황이 보급선을 지키면서 제3기갑집단을 전방에 둬야만 하는 상황이었냐, 그거는 아니었다는 겁니다.
제3기갑집단을 전방에 두는 의미는, 명백히 모스크바를 공략하기 위함입니다. 제3기갑집단, 제4기갑집단, 제2기갑집단이 각각 북-중-남 쓰리펀치로 나아가 모스크바를 치는 것, 이게 태풍 작전의 핵심이었죠. 근데 이미 태풍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지독한 강추위와 맹렬한 소련의 반격으로 인해 병력의 보충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굳이 돌출부에 주력부대를 놓아 두어서 억지로 많은 손실을 강요하게 할 필요가 있었느냐, 이건 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3기갑집단이 최전방에 나와 있는 것은 언제든 모스크바를 칠 수 있다는 정치적인 의미 그 이상을 가지기가 어려웠다고 봅니다. 군사적으로는 일단 뒤로 물려서 전선을 축소하고 보급선을 줄이며 줄어든 전선으로 인해 생기는 여유 부대를 구멍을 메우는 데 쓰는 것이 훨씬 현명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래도 르제프는 들고 있어야 했습니다. 수송이 철도로만 이뤄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볼가 강을 따라서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도(이렇게 해야 서북쪽의 데미얀스크의 제16군과 연계되어 북부 집단군과의 유기적인 연계가 가능해집니다) 르제프는 지켜야 합니다만, 최전선을 넘어 제3기갑집단의 목줄이라는 엄청난 의미까지는 가지지 않게 되죠.
따라서 르제프는 그 자체로 매우 중요했다기보다는, 아니 사실 중요하기는 했는데, 히틀러의 후퇴불가 현지사수 명령과 소련군의 중부 집단군 포위 섬멸 대작전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이 정확히 맞물리면서 그 중요성이 두 배 세 배로 커진 도시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합니다. 아무튼 소련군은 아예 르제프와 뱌지마를 잇는 중요 중간 기지인 시체프카를 점령하면서 아예 독일군 제9군의 후방에서 날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툴라에서 앞서 말씀드린 바 있는 보급로 차단으로 인해 소련군이 마치 상처를 째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칼처럼 독일군의 후방으로 들어오니, 소련군의 창끝이라 할 수 있는 남북 양측(북쪽의 르제프 방면에서 들어오는 제39군, 남쪽의 툴라 방면에서 들어오는 제10군)의 간격은 불과 150 km 정도만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이건 거의 독일군의 포위섬멸식을 속도만 좀 느리다뿐이지 그대로 빼다가 들여온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자주 써먹었던 독일군이었던 만큼 당연히 독일군 사령부도 당면한 문제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겠죠. 심지어 상황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이 처한 상황보다 더 심각했습니다. 일례로 브랸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제24기갑군단은 말만 기갑군단이었지 전차가 한 대도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전차 없는 기갑군단이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이런 상황일수록 휘하의 장군들을 믿어도 모자랄 판에 군사적으로 철저하게 문외한이었던 히틀러가 한 짓이라고는 제4기갑집단을 맡던 회프너를 해임한 것이었습니다. 그냥 해임에서 끝나지 않고 아예 불명예 전역시켜버렸죠. 1월 8일자로 병력을 후퇴시킨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인데... 이렇게 프랑스 전역과 동부 전선에서 활동한 역전의 기갑 장군이 더 이상 전선에 등장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후 회프너는 7월 20일 사건이라 불리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관여하였고,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됩니다. 다만 그는 절멸계획을 자발적으로 지지한(Active supporter) 인물이었고, 이 때문에 2009년에 그의 이름을 딴 학교가 이름을 바꾸는 일도 있었다는군요.
하지만 뭐 장군 하나를 해임한다고 들어오는 소련군이 나갈 리가 있겠습니까? 1월 7~8일에 주코프가 아예 돌출부를 작살내 버리기 위해서 전면적인 공격을 내리는 순간 -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제1충격군, 제20군, 제16군, 제5군, 제33군, 제43군, 제49군, 제50군 - 히틀러는 약 15 km 정도의 후퇴를 허가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셔야 할 것은 15 km입니다. 숫자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히틀러가 장군들을 믿지 못하고 세세하게 어디까지 후퇴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는 증거죠. 히틀러가 힌덴부르크처럼 교활한 군인이었다면 납득이 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보헤미아의 상병일 뿐이었고, 그런 상병 따위가 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후퇴선을 조정하고 있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죠.
전 전선에서 소련군의 공격이 (정면으로 들이받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지속적인 전투의 결과로 독일군은 결국 슬슬 뒤로 밀려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천하의 후퇴불가 현지사수를 외치는 히틀러라도 결국 후퇴의 필요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히틀러는 쾨니히스베르크 선까지 후퇴를 허가합니다. 이 쾨니히스베르크 선은 르제프 - 그자츠크(현 가가린.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에서 딴 이름입니다) - 메딘(뱌지마에서 동쪽으로 약 150 km)을 잇는 일종의 요새선이었는데요, 후퇴함으로써 독일군은 어느 정도 전선을 줄이면서 일부 여유가 있는 사단으로 반격을 개시할 힘을 얻었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게 최대한 빨리 이루어졌어야 하는데 사실 이 때도 이미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죠.
여전히 상황은 완전히 서로 뒤얽혀서 뭐가 뭔지 모르는 싸움을 벌이는 난장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