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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6/10 16:37:05
Name 글자밥청춘
Subject [일반] 회한
지나고보면 20대에는 오로지 남의 노동자였던 기억이다.
피자집에서, 웨딩홀에서, 마트에서, 학원에서, 노래방에서, 피시방에서, 커피샵에서, 아파트 경비실에서, 학교에서, 독서실에서..
혹은 어디 거리에서라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아 일을하고 돈을 쥐어다 어딘가에 쓰곤 했다.
매 계절 옷은 사입어야 하고, 매 달 핸드폰 요금은 내야하고, 친구들은 주기적으로 밥을 먹어야 하고, 가끔은 술도 먹어야하고.
어떤때는 조금 피곤한대신 조금 여유있게, 어떤때는 조금 덜 피곤한대신 조금 빠듯하게.
그래도 20대에 벌어서 사는게 당연하다는 생각에 그냥 그러고 살았다.

몇 시간 전의 일이다.
삼일 전부터 독서실 사장은 프로그램을 업데이트 해야한다며 내게 업체에 전화를 걸어 진행하라고 하였다. 업체는 15분이면 된다는 프로그램 업데이트에만 3일이 걸렸다. 중간중간 생기는 기능적 트러블에 대해 자신들도 알 수 없다고 했다. 3일만에 발견한 해법은 놀라운 것이었다. 윈도우 xp는 관리자 모드로 들어가야 한다나. 그 사이에 사장과 실장으로부터 지속적인 갈굼을 당한건 보너스 같은 셈이다. 때려칠때 미지급 최저임금 다 때려박고 소방법 세금 개인정보관리같은 위반사항 죄다 민원넣어버릴테다. 하는 마음으로 억지로 책 몇 자를 읽는데, 어떤 학부형이 찾아왔다.

이를테면 그런것이다. 며칠 전 한 학생은 여기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했는데, 청소중에도 나오지 않았고 분실물이 따로 접수된 것도 없었다. 그래서 없는 것 같다고 하고 돌려보냈다. 이 학부형은 그걸 내가 훔쳤다고 믿는 듯 했다. 좋게 말할때 내놓으라던 그의 손가락질과 흥분한 어조. 나는 다시금 그 학생이 앉았던 열람실로 안내해 일일히 사물함을 열어보며 지갑이 없는걸 확인해 줬고, CCTV를 네 배속으로 돌려 학생이 지갑을 손에 들고 나가는 것 까지 확인시켜줬다. 그 시간동안 뒤에서는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귓가를 푹푹 찔렀다. 어디 할게 없어서 도둑질을 하는지. 내가 경찰 안부르고 온 걸 다행으로 알아라. 알바야? 알바래도 일은 똑바로해야지. 당신이 가져가놓고 지금 발뺌하는거 아냐. 한시간 반이 넘는 설전은 CCTV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학부형은 바득바득, 약이 바짝 오른듯이 마지막까지 분노를 쏟아낸다. 돈 없고 공부 못해서 알바나 하는 것들이.. 의심받을만하니까 받는거지. 처음부터 없다고 정확하게 얘길 하든가. 왜 시간을 버리게 만들어? 내가 거기서 살인범이 되지 않은게 이 사회의 사회화가 갖는 위대한 기능일 것이다. 물론 수 시간내에 살인범이 될것같이 손이 떨리지만, 아직까지는 간신히 진정중이다. 뭔가 부술게 필요하다. 이왕이면 저 나불대는 주둥이가 달린 대가리라든가.


둘러봐도 내 것이라곤 핸드폰과 책 정도. 어느것 하나 부숴봐야 빡침이 덜하긴 커녕 다시 구할 돈도 없다. 내 거라곤 너무 빈약한 것들 뿐. 폭풍처럼 몰아친 진상을 견뎌내고 나서 다시 책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안들어와서 이걸 어디다 하소연이라고 할 생각에 SNS를 뒤져본다.


어떤 이들은 잘 살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이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참 인생이 충만하다고 느껴지게끔 SNS를 활용하는 듯 했다. 진짜든 가짜든 문득 나는 회한이 들었다. 남의 노동자로 성실히 살아온 10년에 가까운 시간. 그러고보니 처음 웨딩홀 알바에서 주방 이모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못 배운게 돈 없어서 저나이부터 알바나 하는거지.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얘기를 듣는다. 나도 부모 등골좀 부수고, 어학연수좀 다니고, 돈 좀 덜 벌었으면 뭐라도 떠올릴 것들이 있었을 텐데, 돌아보고 나니 온통 남의 소일거리 뒤치닥꺼리 했던 기억뿐이다. 괜한짓이라는 생각에 폰을 끄고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린다. 문득, 마음 어딘가에 울화가 치밀어오른다. 이 책도 결국 남의 소일거리 하며 월급좀 타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짓인데.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하는거지? 부모 등골은 이미 IMF와 구조조정과 노후대책같은게 가루로 만들어버렸는데, 난 뭐 골수라도 빨았어야하나. 뭐 하나 분지르지도 못한 손이 파들거린다. 이를 빠드득 가는데 이가 시리다.


요즘은 소비하지 못하면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다. 소비는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벌려면 노동을 해야한다. 난 자본가 계급이 아니니까. 이젠 이런게 다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하면 안되는 일들이 지긋지긋하다. 남 탓을 하기에는 내가 덜 성실했던 탓이 많아 세상을 탓하기도 어렵다. 양심적으로 내가 그렇게 꼭 더 나아졌을만큼 필사적으로 살았냐 하면 그건 아니니까. 벌어서 필요한데 잘 쓰고 잘 살았다. 무너지지 않고 생활을 버틴게 어디냐. 다들 더 나빠지지 않으려고 산다는데. 어제까진 괜찮았다. 어제까지는. 근데 이제 오늘은 안괜찮다. 예전같았으면 씨바 똥밟았네 할 법한 말들이 머리속에서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어디서 얼핏 본 것 같다. 절망이 자신을 죽이다보면, 그 사람들이 언젠가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죽일거라고.
최근들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짜증이나 화가 자꾸 치솟는다. 해야할 일들이 잘 되지 않고, 하고싶은 일들은 점점 사라져간다.
나는 잘 살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희미해진다. 남을 죽이면 안된다. 차라리 내가 죽어야지. 이제는 다짐에 가깝다.
다들 이러고 산다. 다들 이러고 잘 살아간다는게 신기하고 존경스럽다. 무슨 에너지로, 어떤 기억으로 자신을 다독이며 힘 있게 나아가는지 궁금하다.
나의 이십대에는 그런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뿌리삼아야 할 기억들은 죄다 최저시급으로 바뀌어 어딘가로 나가고 들어왔던 것 같다.
어지럽다. 빨리 집에가서 잠을 좀 자고 싶다. 그러고 나면 어느정도는 까먹고, 어느정도는 멍해져서. 그러면 또 책이나 강의로 눈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직은 남도 죽이지 않았고, 나도 죽지 않았으니
무너지지는 않은셈이다.
그런 셈이다.

아, 담배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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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충달
16/06/10 17:06
수정 아이콘
대학 좋은데 나온다고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취업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걍 별거 없긴 한데, 그나마 어디서 "네까짓게."소리는 안 듣게 되더라고요. 자라면서 일그러진 교육시스템을 그리 한탄했으면서도 결국, 그 시스템의 비호를 받는 자신이 참 우습고 짠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죠... 저 아주머니의 헛소리를 보고 있자니 한 때 느꼈던 묘한 자괴감이 다시 떠오르네요.

우리나라는 노동자에 대한 개념이 잘못됐어요. 자신도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를 동료로서 바라보질 않이요. 사람들은 노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고객,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는 손님이 왕이란 소리를 손님이 하는 짓거리가 벌어지죠. 물건이 없어졌다고 알바부터 의심하다니... 알바생을 종놈 보듯이 보는 거죠. 지금이라도 어렸을때부터 노동에 대해 교육해야해요. 저 아줌마 자식도 똑같이 자랄겁니다.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데 배울 사람은 부모밖에 없죠. 그러면 그 아이는 자라서 "전 노동자 안 할 건데요? 삼성 갈건데요?" 이러겠죠. 저 아주머니의 망발에 치가 떨리면서도, 저렇게 밖에 못 배우고 자란 시절을 생각하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아이들 만큼은 그렇게 자라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더 늦기전에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 잘 보고 갑니다. 힘내세요. 걍 똥밟은셈 치시고요.
히히멘붕이오
16/06/10 18:21
수정 아이콘
욕보셨습니다. 요즘(?) 부들부들이란 말이 유머소재로 쓰인다곤 하지만 사람이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 날 때 몸이 저절로 부들부들 떨리는 그 기분은 진짜 *같죠. 이런 일이 정신건강에 매우 안좋은게, 남에 대한 분노가 결국은 자신에 대한 좌절감과 자책으로 귀결되는 일이 흔해서..부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은 하얘지더라도 머리 꼿꼿이 세우고 움츠러드는 어깨를 애써 펴가며 당당히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저는. 같이 힘내요.
아케미
16/06/10 22:28
수정 아이콘
몸도 마음도 건강 잘 챙기시길 빕니다. 무너지지 말자구요.
장수풍뎅이
16/06/11 00:10
수정 아이콘
어떻게생각해야 알바생이 가져갔다는데 생각이 미칠까요.. 기억이 어서 흐릿해지길 기원합니다.
16/06/15 15:59
수정 아이콘
많은 생각이 드는데, 가장 와닿는건 글자밥청춘님에게 제 동생이였으면, 혹은 ... 하는 생각이네요.

술 한 잔 사주며 "세상 뭐 같지? 술이나 마시자..." 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위로할 자격이 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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