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0년대까지의 만남은 비교적 훈훈했습니다. 양쪽 다 무력으로 딱히 뭘 하겠다는 수준까지 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 이후부터 병인양요까지의 시간 동안 분위기는 바뀌어 갔죠.
이 사이에 있었던 큰 일은 역시 아편전쟁, 참 찌질한 전쟁이었죠. -_-; 중국의 차 때문에 계속 적자가 나자 아편을 팔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그걸 강경하게 막자 그걸 핑계로 터뜨린 것이었습니다. 뭐 어차피 한 번은 일어날 전쟁이라 생각하지만요. 영국 내에서도 부끄럽다는 말이 나올 정도면 말 다 했죠.
1840~42년간의 1차 아편전쟁으로 홍콩이 영국으로 가고 많은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열강은 중국과 본격적인 조약을 맺어 갑니다. 중국은 잠자는 게 아니라 아예 종이 호랑이가 됐고, 본격적인 뜯어먹기를 시작한 것이죠.
이어 1856년에 벌어진 2차 아편전쟁,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는 2만의 병력을 동원했고 베이징까지 들어가는데 성공합니다. 1860년에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이 나서서 베이징 조약을 맺었고 정말 온갖 것을 다 허용해야 했죠. 구룽(구룡)반도가 추가로 영국에 넘어갔고, 개항장도 더 늘였으며, 통상과 포교도 자유롭게 하게 되는 등등... 여기다 러시아가 조약을 중재해 주면서 연해주를 얻게 됩니다.

중국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죠. 뭐 사실 이것보다 청에 더 크게 다가왔던 건 태평천국이었지만요.

페리 제독
한편 일본 역시 거대한 쓰나미를 맞습니다. 1853년 쿠로후네(흑선) 내항이었죠. 후발 주자였던 미국은 남들이 이미 선점한 중국보다 새로운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일본이었죠. 페리 제독은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해 도쿄 앞 우라가에 입항했고, 막부에서는 1년만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I shall return을 외친 페리 제독은 약속대로 돌아왔죠 (...) 막말 시대(막부 말기)의 시작입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개항을 시작했고, 십여년만에 근대 국가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제국주의 경쟁에 합류하죠. 위의 그림에도 일본이 포함돼 있군요. 일본 역시 후발 주자인만큼 남의 손길이 안 닿은 블루 오션을 찾아가니 바로... 에휴 -_-a
중국으로서는 다른 서양 열강들보다 일본이 더 충격이었을 겁니다. 이전까진 신하 수준으로 본 것도 있지만 일본은 중국 코 앞이니까요. 장사나 하고 항구나 좀 뜯어가는 서양에 비해 일본은 중국 자체를 노렸죠.
이렇게 동아시아는 제국주의의 흐름에 휘말리게 됩니다. 쓸려갔든, 자기도 합류했든간에 말이죠.
조선에도 이 흐름이 들려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청의 손을 거쳐 들어온 거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2차 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은 요렇게 말 합니다.
"양이와 억지로 화친하긴 했지만 황가가 북으로 도망갈 정도였으니 천하가 어지럽지 않다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성부터 마을까지 편안하기가 옛날과 같고 장병들도 잘 정돈돼 있으며 방어도 침착하고 여유 있고 민심도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그냥 오랑캐들의 난동으로 황제가 잠시 피신한 '정도'로 본 것이엇죠. -_-a 그 외에 일본이 60년에 미영프러와 조약을 맺었다고 알려오긴 했습니다.
러시아 같은 경우는 좀 신경쓰이긴 했을 겁니다. 연해주를 받으면서 조선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됐으니까요. 실록에 처음 기록된 것은 1864년입니다. "두만강 건너편에서 이상한 생김새의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온 것이었죠. 그들은 편지를 주고 갔고, 역시 통상을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아편전쟁 이후 조선 주변에서도 이양선이 늘어나긴 한 모양입니다. 48년 12월 29일에는 이런 기사가 나오죠.
"이해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다섯 도의 대양 가운데에 출몰하는데,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대부분, 아니 전부가 조선의 지리를 측정하러 온 것일 겁니다. 서해는 지금도 결코 만만한 바다가 아니고, 최대한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야 했으니까요. 간혹 통상을 요구하러 온 경우도 있었죠. 대표적으로 1845년에 온 영국 선박 사마랑 호가 있습니다.

늘 그렇듯 조선인과 접촉해서 대화도 좀 나누고 그림도 좀 그리고 결론은 "통상 안 하니까 가셈"이었죠.
그래도 아직까지였습니다. 일본에 관심 가진 미국이 아니라면야 중국 뜯어먹기에 바빴고 조선은 아직 먼 얘기였죠. 보너스 수준일 뿐, 적극적으로 할 필요성을 못 느낄 때였습니다. 그럴 여력도 없었을 거구요.
하지만, 그래야 할 이유가 생긴 나라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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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조선 교구 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1839년, 한국에 최초로 온 위의 세 신부들이 순교합니다. 기해박해였죠. 프랑스가 이에 개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1847년이었습니다. 늘 그렇듯 하는 김에 문도 열게 하자는 취지였겠습니다만.
그 전 해인 1846년, 재 중국 및 인도 프랑스 함대 사령관 세실(Cecile)이 먼저 나섭니다. 그가 동원한 건 클레오파트라호 등 세 척, 제주도를 거쳐 조선 근해에 들어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의 재상을 만나 직접 선교사 처형을 항의하려고 했습니다. 헌데 그러려면 한양으로 가야 되는데 그 물길을 못 찾은 것이었죠. 결국 충청도의 외연도에서 편지 하나만 주고 돌아갑니다. 그 내용은 이랬죠.
"대불랑서국 수사 제독 흠명 도인도여도중국각전선 원수(아따 길다 -_-;) 슬서이(한자로 음차)는 죄없이 살해된 것을 구문하는 일 때문에 알립니다. (중략) 살피건대, 기해년에 불랑서인인 안묵이·사사당·모인 세 분이 있었습니다. 이 세 분은 우리 나라에서 큰 덕망이 있다고 여기는 인사인데, 뜻밖에 귀 고려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너무 길군요. 줄이자면 중국인이나 만주인, 일본인은 보호했다가 풀어주면서 왜 그들은 죽였는지 따지고 이건 대불랑서 황제를 욕보인 것이다, 내년에 다시 오니까 그 때 확실히 답해 달라. 앞으로도 이러면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내용이었죠.

참고로 이 때 김대건이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조선이 그를 협상 카드로 썼다면 협력했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죠. 오히려 그 같은 이가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를 끌어들인다고 프랑스 함대가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처형합니다. 배교만 하면 능력을 중히 쓸 수 있을 거라 설득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거부했죠. 그가 사제 서품을 받은지 불과 1년 1개월만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세실의 후임 라피에르(랍별이)가 옵니다. 기세등등하게 왔겠습니다만... 난파했죠. -_-; 이들은 고군산도에서 불쌍하게 도움을 청했고, 조정에서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소·돼지와 양식 쌀과 채소를 넉넉히 보내어 먼데서 온 사람을 회유하라고 명하였다." (...)
이렇게 라피에르는 아무 소득 없이 가게 됩니다. 그가 남긴 글을 봅시다.
"대불란서국 수사 총병관 납별이는 조회할 일 때문에 알립니다. (중략) 사나운 바람에 부수어졌으므로, 본총병이 어쩔 수 없이 이 곳 가까운 섬의 민가에서 떨어진 곳의 바닷가에 잠시 수수·사졸과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인원을 두고서 구제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지금 사람은 많고 물은 모자라며 양식은 태반이 죄다 바닷물에 침괴되었는데, 귀국에서 늘 너그러이 예대하여 먼 나라의 파괴된 배에 탄 사람을 구제하여 주는 것을 절실히 생각하고 물과 양식을 도와 주기를 절실히 바라서 살펴 주시기를 거듭 빕니다."
배 두 척만 사 주면 돌아가서 갚을 것이고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거라는 거였죠. 배를 사 준 건지는 모르겠는데 장교 두 명이 상하이로 가서 영국 배가 왔고 이들을 데려갑니다.
1856년에는 게랭 사령관이 옵니다. 그는 조선과 접촉하지는 않았고 탐사만 하고 갔죠. 여기서 서울로 들어가는 포인트인 덕적군도를 발견합니다. 그 외에는 딱히 한 게 없었죠. 배도 한 척밖에 없었구요. 쥐베르는 "게랭 제독의 정력과 실력이 좀 모자라 보였다."고 평가합니다. (...);
이렇게 프랑스는 조선에 관심을 가졌지만 계속 이어지지는 못 했습니다. 했다가 끊기고 했다가 끊기고 -_-a; 자기들도 바쁠 때였으니까요. 통상도 같이 요구해야 되는데 아무리 조선이 작다 해도 배 한두척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병인양요만 해도 베트남에서의 폭동으로 미뤄졌다가 온 것이었죠. 글쎄요. 오히려 선교사들의 하소연이 귀찮게 들렸던 건 아닐까요? -_-; 조선에 그 정도 투자를 해야 할 정도로 젖과 꿀이 있다는 소문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1866년, 더 이상 미룰 수는 없게 됐습니다. 신자들은 죽여도 죽여도 계속 늘어났고, 선교사들은 죽을 길에도 계속 갔습니다. 그러다가 12명 중 무려 9명이 처형당하는 병인박해가 있었고 리델 신부가 직접 탈출해 도움을 요청했으니까요. 교황의 권력이 무너져 갔지만 어쨌든 믿음은 여전했던 그 시절, 평화적인 방법이든 무력이든 안 쓸 수는 없었습니다. 중국은 여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됐습니다. 그들 자신도 박해를 계속 하긴 했지만, 속국이라 한들 조선은 확실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중화세계의 질서는 서양인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1866년 병인년, 프랑스군은 조선으로 향합니다. 이제까지의 이양선들과는 달리 확실한 목적을 가진 파병이었습니다. 평화롭게 무역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무력을 동반한 것이었죠.
+)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 이번에도 제대로 준비 안 했던 것이었죠 -_-;
그리고 그 직전, 사건이 하나 터집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했던 분위기를 생각하면 참 의외의 나라에서 한 것이었죠. 지금이야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나라겠습니다만.
그 동안 조선은 표류한 배든 통상을 요구한 배든 잘 먹여서 돌려보냈습니다. 이것을 공포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좋게 왔든 나쁘게 왔든 다 잘 먹였고 그들이 남긴 기록에도 나와 있거든요. 공포인 경우가 있었을진 몰라도 공포만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주민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서 달아났지만 친해져서 배까지도 구경한 경우가 있고 영어를 가르쳐 준 경우 역시 있죠.
지속적인 교류는 안 하더라도 만나서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왠지 하멜 지못미입니다만. 하지만 무력을 사용할 경우 가만 있을 사람들 역시 아니었죠. 처절한 응징이 가해졌고, 그들은 돌아가지 못 합니다.

그 배의 이름은 제너럴 셔먼이었습니다. 뭔가 달라 보인다면 기분 탓입니다 (...)

다음 편 주인공은 환재 대감이시겠군요.
+) 사족이지만, 한제국건국사 정말 강추입니다. 이젠 나온 지 제법 됐고 3부가 나올 길은 영영이지만 (...) 이 쪽 글 쓰면 쓸수록 대단함을 느끼게 되거든요.
+) ... 결국 또 전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