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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17 18:00:57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0. 북방의 위협에 대처하는 고려의 자세
bgm은 천국의 왕국입니다. (...)
이거 거란만 할래다가 여진도 얘기해야겠다 하다가 몽골까지 가서 망글이 된 거 같지만...
뭔가 또 유머게시판에 올린 게 자랑... 일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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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비교해 보면 고려는 정말 외환에 크게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말기를 제외하면 전부 북쪽의 위협이었죠. 오대십국 시대가 끝난 후 겨우 통일 왕국을 세운 송은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북방민족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합니다. 중국이 그럴진대 이들이 한반도를 안 노릴 리가 없죠. 특히 신라 이후 중국과 계속 우호적이었고 배후가 찔릴 위험이 있는 고려는 반드시 잡아야 되는 상대였습니다.
에이 땅도 작은 나라가 버텨봐야 얼마나 버틸 수 있었겠어요.
... 시작하겠습니다.
Round 1. 고려 vs 거란
- 1차 침입 (993)
거란과 고려의 친교는 태조 왕건 때부터 시작되죠. 요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왕건은 사신은 섬으로, 낙타는 만부교로 보냅니다. 참 바람직한 시작이었습니다. 고려로서는 고구려를 잇는다는 정통성 면에서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친교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원교근공이라는 것도 있을까 모르겠네요. 발해가 멀쩡했다 하더라도 왠지 사이가 미묘했을 것 같긴 합니다만.
요나라는 이후 팽창하여 986년에는 발해의 유민이 세운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습니다. 슬슬 송을 공격해야겠는데 뒤가 걸립니다. 고려가 계속 친송이었거든요. 몇 년 뒤인 993년, 요의 소손녕은 총 8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침공합니다. 고려는 이에 맞서지만 패배하죠. 성종은 직접 북쪽으로 갔다가 평양으로 돌아와서 화친을 청합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평남 안주)을 한 번 더 건드려봅니다. 근데 여기서는 고려군이 막아내죠.이 때의 고려 장수가 대도수인데, 발해 출신이라고 합니다. 기분이 참 좋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 이후 소손녕은 더 이상 내려올 생각은 하지 않고 항복하라는 요구만 줄기차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80만은 뻥이고 고려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기는 힘들 정도의 병력이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이후에 올 때도 80만은 커녕 10~20만 수준만 왔으니까요.
조정은 항복하고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떼 주자는 할지론과 서희와 이지백 등의 주전론으로 나뉩니다. 결국 서희가 파견되죠. 그 때의 모습을 보면 서희는 요의 상황을 확실히 꿰뚫어 본 듯 합니다.
소손녕은 "신라에서 일어난 주제에 고구려 땅은 우리 건데 니네가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땅 내놓으라는 거죠 -_-; 서희는 이에 대해 이름이 고려고 도읍이 평양인데 (완전 뻥은 아니죠. 고려 내내 평양을 소중히 했으니) 당연히 우리가 고구려 계승했다. 오히려 니네 동경도 우리 땅이다."고 했습니다.
소손녕은 또 "국경은 우리랑 맞댔는데 왜 바다 건너 송이랑 노냐. 우리한테 조빙하면 봐 준다."
+) 조빙 : 그냥 조공이라 생각하시면 되요.
이에 서희는 "아나 압록강 유역도 다 우리땅인데 여진이 길 막고 있지 않냐. 이놈들 때문에 바다 건너는 게 더 쉽게 됐다. 얘네 없으면 조빙하지."라고 했습니다.
+) 사실 하나 말하고 하나 답변한 게 아니라 소손녕이 저거 다 말하고 서희가 저거 다 답변한 겁니다. 나눈 이유는 보기 편하라고 - -a
당시 압록강-두만강부터 만주 전체에 여진족들이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거란이 마치 자기 땅인 양 말했지만 이들도 지배력을 뻗지 못 하고 있었죠. 현재의 평안북도 일대인 강동 6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의 땅을 받은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상 요의 눈치 없이 강동 6주를 지배할 명분을 얻은 거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요가 얻은 것은 형식상의 사대였죠. 대신 고려는 강동 6주의 여진족들을 다 몰아내고 강력한 요새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건 전쟁 내내 거란을 괴롭혔죠.
- 2차 침입 (1010)
1004년, 요 성종은 송과 전연의 맹을 맺고 연운 16주를 확보하고 송과 형제의 관계를 맺습니다. 송은 매년 열심히 요에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바쳐야 했죠. 이렇게 요는 동북아의 일인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때 고려는 요에 사대하는 척 하면서 송과의 연락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요로서는 못마땅하게 볼 수밖에 없었죠. 한편 고려에서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납니다. 이 때 정변에 가담했던 하공진이란 이가 승진해서 북방에 있었는데, 여진족 부락 하나 심심해서 털었다가 역관광 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_-; 이 일로 귀양갑니다만, 동료였던 유종이 화풀이로 고려에 조공바치러 왔던 여진족 추장과 수행원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사태가 벌어지죠.
여진족은 지금까지 쌓인 한과 이 일을 핑계로 요나라에 달려가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청합니다. 마침 좋은 떡밥도 있었죠. 요는 정변을 일으킨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일으켜 쳐들어 옵니다. 이 참에 송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하고, 강동 6주를 되찾기 위해서였죠. 고려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막게 하죠. 뭔가 숫자가 커지는데, 이번 침공 역시 20만 대군이었다고 합니다.
강조는 몇 차례 승전을 거둡니다. 이 때 동원된 병기가 검차라고 합니다. 겉에 창칼을 꽂아 적이 접근하지 못 하게 만든, 뭔가 탱크 비슷한 병기일까요. 아무튼 이렇게 승리합니다만... 이후 방심해서 적이 오는데 괜찮다 괜찮다 하고 있다가 크게 패합니다. -_-; 바둑을 두고 있었다는군요. 역시 사람 잡는 게임의 기원은 바둑인 듯 합니다. 강조는 최대한 끌어들여 포위하려고 했는데 적의 기동력이 너무 강했다는 설도 있나 보네요. 이 때 요 성종이 강조의 포박을 풀어 주며 신하가 되기를 권유합니다만, 강조는 단호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부하 이현운이 항복하자 발로 차면서 욕 했다는군요.
길어지니 그 이후의 상황은 요약하죠.
= 현종은 급히 항복 문서를 요 성종에게 보냅니다. 시간 끌기용이었죠. 그러는 한편 동북쪽의 병력을 불러들이죠. 근데 이 때 서경, 평양이 항복해 버립니다. -_-; 급히 도착한 함흥 중랑장 지채문은 항복 사절을 쫓아가 죽여버리죠. 서경에서는 지채문을 쫓아내지만, 다행히 도순변사 탁사정의 병력이 도착해서 버티게 되죠. 항복한 줄 알고 마음 놓았던 성종은 총공격을 하게 되고 계속 버티다가 탁사정은 도주, 대도수는 포로로 잡힙니다. 하지만 강민첨과 조원의 활약으로 버티죠. 강민첨은 이 공으로 3차 침입 때 부원수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한편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는 곽주를 탈환하며 후방을 차단해 버리죠.
= 이에 대한 요 성종의 결단은 개경으로 진격이었습니다. -_-; 현종은 급히 개경을 떠나는데 여기에는 지채문 외 수십명밖에 따르지 않았고, 곳곳에서 반란 비스무리한 무리와 마주치는 선조보다 더 안습한 상황에 마주치게 됩니다. 중앙집권이 잘 된 조선과 덜 된 고려의 차이일까요. 그나마 중간에 하공진을 만나 항복 문서를 주고 시간을 끌게 하는데, 이 때 적 선봉과의 거리가 불과 몇 시간 거리였다고 합니다. 서경에서의 일과 더불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죠.
= 하공진은 그 말빨로 "왕은 지금 나주에 있고 여기서 만리길이다"고 허풍을 쳤고, 요 성종은 낙담하고 하공진을 인질로 하고 돌아가게 됩니다. 하공진 역시 등용하려 했는데 거부하고 고려로 탈출하다가 처참하게 죽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현종은 부리나케 도망가서 나주, 광주, 전주 등을 전전하며 결혼도 했다고 하는군요 - -;
= 이 때 양규는 퇴각하는 적을 성대하게 맞이합니다. 강동 6주에서 적을 쳐서 얻은 성과가 엄청났죠. 이후 거란은 글만 읽을 줄 알면 특채로 뽑아야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고 합니다. 다만 양규는 이 과정에서 전사합니다.
= 군을 물리는 조건은 고려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이었습니다. 고려에서는 회군에 감사하는 사신을 여러 차례 보내면서 요와의 친교를 복구하려고 하죠. 하지만 죽어도 입조할 생각은 안 하고 강동 6주도 돌려줄 생각하지 않았죠. 결국 힘으로라도 뺏으려고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막힙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죠. 거란에 복속했던 여진족들도 고려에 연줄을 대기 시작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현종 9년, 성종은 다시 고려 침공을 결심합니다.
- 3차 침입 (1018)
이번 전쟁에 동원된 장수는 이름도 유명한 소배압의 10만대군이었습니다. 현종 역시 강감찬, 강민첨에게 20만을 보내 막게 하죠.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매복으로 큰 타격을 주었고, 소배압은 이번에도 닥치고 어택 땅을 찍습니다. 개경으로 간 거죠. 하지만 논밭은 청야가 돼 있었고, 개경의 방비도 2차에 비해 튼튼했습니다. 소배압은 하릴없이 돌아갔고, 강감찬은 이를 맞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합니다. 귀주대첩입니다. 이 때 포로만 수만 명이요 군마, 낙타, 갑옷, 병기 등 무수히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요나라와의 전쟁은 끝납니다.
- 결과
역시 많이 알려진 건 1차와 3차 침입일 겁니다. 2차는 결국 몰아냈다 하더라도 형식상으로라도 항복한 거였고, 고려의 피해도 컸으니까요. 그래도 3차 때는 2차 때의 경험으로 강동 6주에서 막아내고, 개경으로 오는 것도 별 피해 없이 막아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2차 때가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도 기억해 둬야죠.
요는 이후 고려를 병합할 힘을 잃게 됩니다. 동북아의 균형은 송 - 요 - 고려로 비교적 안정되구요. 이 전쟁으로 양국이 입은 피해도 컸고, 사이에 낀 여진족의 피해도 컸습니다. 이 때 다수의 여진족이 난민이 됐는데, 고려는 이들을 이주시켰다고 합니다. 이들이 후에 천민의 주류가 된 게 아닐까 한다는군요.
유목민족의 강력한 성장세는 요나라 이전은 물론 그 이후의 금, 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는 이 이상 성장을 못 하고 송의 영토를 더 이상 침략하지도 못 했으며, 오히려 점령한 송 영토 내에서는 지나치게 유교화가 돼 버립니다. 고려 하나 치려다가 그 힘을 많이 잃어버린 거죠. 물론 요나라부터가 중원을 다 차지하기보다는 어느 정도만 먹고 만주부터 중앙아시아의 민족들을 다스리는 수준으로 제한한 것도 크겠지만요.
3차 전쟁이 끝난 후, 현종은 개선하는 강감찬을 친히 영파역까지 마중 나가서 성대히 환영합니다. 이 전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이후 현종은 고려의 중흥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전쟁 사이에 무신의 난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일도 벌어졌는데 무사히 막았다는군요. 그 아들 덕종은 천리장성을 축조하며 요의 소소한 침략을 잘 막아냈으며, 7대 실록이 완성된 것도 이 때입니다. 이후 정종, 문종, 선종까지 고려는 태평성대를 누리죠. 선종 때는 생일을 축하하는 요의 사절이 왔는데 날짜가 지나서 놀린 기록도 있더군요. 겉만 대국이지 이 정도면 거의 맞먹는 수준입니다 - -a
이렇게 뭔가 앞으로 다룰 조선에서의 일과 비슷한 거란과의 전쟁은 끝납니다. 1125년 거란이 새로 일어난 금과 연운 16주를 탈환하려 한 송의 연합으로 멸망해 버리거든요. 이후 거란은 쫓겨나서 중앙아시에 쪽에 서요를 세우지만, 이후 몽골과 여진에 동화되어 완벽히 소멸됩니다. 몽골 중에 거란족의 후예로 추측되는 이들이 있다는군요.
다음 상대가 오고 있었습니다.
Round 2. 고려 vs 여진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몰라도 (고려사 몰라요 ㅠ) 11대 임금 문종은 고려판 세종대왕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순종과 선종은 일찍 죽었죠. 14대 왕은 선종의 아들 헌종. 뭔가 단종과 참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숙부가 있었죠. 그는 헌종을 내쫓고 스스로 왕위에 오릅니다. 또한 그의 동생을 역모죄로 잡아들이죠. 그가 바로 숙종입니다.
...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입니다. 하는 짓은 패륜인데 정치는 잘 한 것도 비슷하네요.
아무튼 윤관의 그 유명한 별무반이 생긴 게 바로 이 때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유명한 건 소드마스터 척준경이겠죠.
여진족은 북방에 넓게 산개해 있던 민족입니다. 말갈, 선비족이 그 유래라고 하죠. 말갈이 이들 모두를 가리키는 말인지 알 수 없지만, 고구려 때 이미 피지배민족 내지 동맹 세력이었고,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도 그 예하부대에 있었다는군요. 발해에서도 피지배민족이었고 궁예부터 왕건은 이들을 착실히 포섭하고 토벌했죠. 유검필이 이들을 굴복시켜서 일리천 전투에서도 데리고 나왔던 것은... 예전의 제 글을 참고하시구요 ^_^ 이후에도 발해의 후계인 정안국에서도 피지배민족이었다고 하는군요.
간단히, 말 그대로 오랑캐였습니다. 상대가 강하면 조공하고 복종하면서 먹을 거라도 얻어내고, 먹을 게 없거나 상대가 약해보인다 싶으면 침략해서 약탈하는 무리였죠. 고려부터 조선까지 내내 이들이 골칫거리였습니다. 뭐 거의 고려에 눌려지내다가 고려와 요가 전쟁이 나자 괜히 중간에 끼어 크게 피해 입고 다수의 유민이 고려에 흡수되기도 했고, 양쪽에서 줄타기 하면서 2차 침공의 이유가 되기도 했죠. 우리 입장에서야 귀찮은 오랑캐이지만 그들에게 고려는 악몽이나 다름 없었겠죠.
그랬던 그들이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유목민족인지라 전투력은 강했지만 흩어져 있었죠. 이들을 통합한 것이 금나라의 초대 황제 완안아골타였습니다.
변방에서 갑자기 강력해진 여진족의 공세, 숙종은 윤관을 보내 이들을 막게 합니다만 1104년에 패하고 강화를 맺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 때부터 척준경의 활약이 시작됩니다만, 여기서는 크게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진 정벌을 명했던 숙종은 갑자기 죽고, 아들 예종 역시 여진 토벌을 명합니다. 이 때 별무반이 만들어지죠. 17만에 이르는 대군이 만들어졌습니다. 1107년부터 09년까지 이르는 기간 동안 윤관과 척준경 등 고려군은 많은 전과를 올렸고, 9성을 쌓게 됩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싸웠고, 한편으로는 울며불며 애걸하면서 제발 돌려달라고 빌었고, 고려군의 피해도 큰데다 전염병까지 드는 상황이라서 9성을 돌려주게 됩니다. 9성 자체가 방어하기 좋은 위치에 지었는 줄 알았는데 우회가 가능해서 전체가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었고 성 하나가 위험해도 다른 적에 가로막혀 구원이 힘들었다고 하네요. 후에 윤관이 탄핵받은 것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시기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수비가 힘들었다는 면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여진족이 한 맹세입니다. 거기다 요까지도 여진족 편을 들고 있는 상황이었죠.
= 우리들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를 하고 대대로 자손에 이르기까지 세공을 정성것 닦고, 또 감히 기와와 작은 돌도 경계 위에 던지지 않겠습니다.
=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 6년 후를 보죠.
1115년, 완안아골타는 국호를 금으로,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습니다. 급속히 세력을 늘리며 요나라를 공격했죠. 원군 요청이 옵니다만 고려는 거부했고, 요나라의 연호도 없앱니다. 이 때까지도 고려는 금을 속국으로 생각했던 듯 합니다. 금나라가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땅 (현재의 의주 부근)을 빼앗자 돌려달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이에 대한 금의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니네가 스스로 빼앗으라"
뭐 결국 뺏기는 합니다만... 이 때부터 태도가 이상한 걸 느낀 모양입니다. 그리고 결정타가 날아오죠. 1117년, 금나라에서 사신이 옵니다.
"형인 대여진 금국 황제는 아우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 (중략) 하늘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섬멸하게 되었으니 왕은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고 형제의 의를 맺어 (후략)"
이런 금의 태도를 고려는 무시하다시피 했지만, 금도 압박을 하진 않았습니다. 거란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변방에서는 별 일이 없는 상황에서 고려 내부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거든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죠. 한창 혼란스럽던 1126년, 금은 송과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킵니다. 이 때 금나라를 대국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논의가 벌어졌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은 찬성하죠.
이 달 갑오일에 해의 빛깔이 핏빛 같았다고 했는데,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척준경이 이자겸의 충복이었다 하나 배신하기 직전(5월에 배신)이었고 척준경의 옛 활약이 진동북무쌍 수준이었던 걸 생각한다면, 여진의 강함을 알기에 찬성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은 해 봅니다. 어쨌든 이후 백년간 양국은 특별한 외교 분쟁 없이 평화롭게 지냅니다. 이후 금은 송을 집중공격하는데, 송의 구원 요청의 답서에서 "원래 우리 속국이었던 놈들이 저러니 어쩜 ㅠㅠ" 이란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는 많이 억울했던 모양이네요. 9성을 쌓았던 여진 정벌이 조금만 더 성공적이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고려는 건국 후부터 일관되게 북진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성종 때는 여러 차례 압록강까지 진출해서 여진족을 몰아냈습니다만, 역시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백두산 밖으로 다 몰아냈다는 말이 있는데 또 들어와서 살고 있으니까요 - -; 고려 때나 조선 때나 북방의 문제거리는 여진이었고, 북진정책을 방해하는 가장 귀찮은 적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을 다 몰아내고 압록-두만강까지 영토를 넓힌 것은 세종 때에 와서야 가능했죠.
백 년 후, 여진은 역시 몽골과 남송의 협공에 멸망하게 됩니다. 이후 다시 중국과 고려, 조선에게 종속된 상태로 지내다가 청나라를 일으키게 되죠. 한민족과 여진족의 대립은 이렇게 여진족의 승리로 끝나는... 듯 하다가 청이 멸망하고 지금 만주족은 한족에 동화돼 가고 있죠. 왠지 9성을 돌려줄 때 했던 그들의 맹세가 떠오르는 마지막입니다.
"이제부터 나쁜 마음을 버리고 대대로 조공을 드릴 것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번토는 멸망하리라."
한창 몽골이 금을 멸망시키고 세력을 넓히던 1219년, 거란과 여진의 잔당들이 고려로 쳐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김취려는 쳐들어온 적을 다 없앤 다음 압록강을 넘어서 다 털어버렸다는군요. 이 때 몽골군과의 연합작전을 했는데, 김취려의 용맹을 본 몽골은 고려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 지겹죠? 이제 끝판대장이 나타났습니다.
Round 3. 고려 vs 몽골
당시 고려는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가고 무인시대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김甲수... 아니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다스리고 있었죠.
처음 몽골과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죠. 하지만 역시 몽골의 힘이 커지면서 조공 요구가 계속되었고, 최우는 이를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225년 몽골 사신이 살해된 사건이 벌어지는데, 몽골은 고려 탓이라 했고, 고려는 여진족이 했을 거라고 하죠.
뭐 당시 몽골에게 싸움 거는데 이유가 있겠어요. -_-; 원 태종, 오고타이 칸은 살리타이를 보냈고, 이게 기나긴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뭐... 간단히 축약해 보면요.
1차(1231)에서는 귀주, 서경 등에서 몇 차례 이겼지만 적은 계속 남하, 개경을 포위하자 고종은 왕족을 보내 강화를 맺게 합니다. 이후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해서 장기전을 각오했고, 이 움직임을 본 몽골은 다시 쳐들어옵니다.(32) 이 때 서경의 홍복원이 항복해서 길안내를 맡았고 개경과 남경(한양)이 연달아 함락됩니다. 이 때 용인을 공격하던 살리타이를 승려 김윤후가 활을 쏴 죽였고, 몽골군은 철수합니다. 이후 고려군은 잃은 땅을 되찾고 배신자 홍복원을 쫓습니다만, 몽골로 도망갑니다.
3차는 35년이었습니다. 무려 4년이나 지속된 전쟁으로 서로 물고 뜯고 하면서 고려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황룡사 9층탑이 파괴된 것도 이 때였죠. 몽골군은 강화도를 함락시킬 수 없었고, 고려군도 쫓아낼 정도의 힘이 없었습니다. 결국 38년 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강화를 맺습니다. 하지만 철수 이후에도 입조를 거부하면서 대신 왕족을 왕자로 꾸며서 보냅니다.
4차 역시 마찬가지로 적이 강원도부터 충주성까지 내려왔다가 대장 예케와 고려의 철수 요구로 물러납니다. 이 때는 왕자가 입조하죠. 원 헌종 몽케 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54년에 다시 공격, 이 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심각해서 포로만 20만 6천 8백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 대장 자랄타이는 몽케 칸의 명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오는데 이번에는 강화도를 어떻게든 함락시키려고 했다가 마침 몽골에 있던 김수강이 몽케 칸을 설득해서 철수하게 됩니다. 이는 59년 마지막 7차 침공 때도 마찬가지였죠.
결국 1258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던 최의가 김준에게 피살되면서 고려 조정에서도 확실히 강화를 맺자는 주장이 커집니다. 59년 고종은 태자를 쿠빌라이 칸에게 보내 강화를 맺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다음 해에 황제가 되는데, 이 때까지는 확실히 뒤를 이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나름 모험이기도 했습니다. 그게 기뻤는지 쿠빌라이 칸은
"고려는 머나먼 나라로 그 옛날 당태종이 쳐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태자가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들 사이에서 몽골이 고려를 직접 점령하지 않는다는 게 결정된 듯 합니다. 이후 태자는 돌아와서 24대 왕 원종이 됩니다. 최씨 정권 때문에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없었고 치세의 대부분을 강화도에서 적이 우리 땅을 휩쓰는 것을 지켜 본 고종의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40년간의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른바 "대몽항쟁"의 끝이죠. 이 항쟁 및 원종의 항복에 대해서는 말이 갈립니다. 특히 40년간 버틴 최씨 정권이 과연 잘 한 것인가에 집중되죠. 강화도에 있으면서 자기들 권력에만 안주하는 모습이 보이니까요. 끝까지 항전한 삼별초 역시 그 때문에 좋게만 볼 수 없구요. 그래서인지 항복한 원종에 대한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당시 원의 세력 확장을 보면 무시무시하니까요. -_-;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뜯겨도 부마국이라는 그나마 괜찮은 지위를 얻었다는 것은 결국 40년간 지겹게 버틴 것과 외교력 때문이었습니다.
너무 긴 기간이라서 너무 줄인 것 같아서 아쉽네요. 나중에 할 기회 있으면 다시 하겠습니다.
이후 동북면의 철령 이북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서 원에 항복, 쌍성총관부가 만들어졌고, 서북면의 서경 역시 최탄이 반란을 일으켜 항복, 동녕부가 만들어집니다. 한편으로 삼별초를 토벌한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둡니다. 고려의 지배력이 부족했던 지역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그 이후
여진족 얘기할 때 고려의 북진에 대해서 얘기했었습니다. 한번에 거대한 땅을 얻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고려는 기회가 될 때마다 영토를 넓히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현 국경인 압록강-두만강은 이 때 이미 목표였고, 여진족 때문에 힘들어도 계속 달성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상대들이 다 만만치 않았네요. -_-; 때문에 고려는 30만(거란과 싸울 때), 17만(여진 정벌 때) 수준의 대군을 운용합니다.
글쎄요. 보시다시피 좋은 모습만 보이진 않습니다. 특히 전쟁 중에 끌려간 포로들을 반환하려는 노력은 없었다고 봐도 되구요. 여러 문제가 있었다 해도 최소한 노력만은 했던 조선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다만 상대의 국력이 커졌을 때 숙이는 척 하면서 송과의 친교를 끊지 않았고, 상대가 약해지면 과감히 외교를 끊어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러면서도 내왕외제를 멈추지 않았죠. 결국 내왕외제가 끊긴 것은 몽골의 침략 후였습니다.
서경을 포함한 동녕부는 1290년에 반환됩니다. 쌍성총관부는 공민왕이 원을 몰아내면서 탈환되죠. 이 때 크게 성장한 게 이성계입니다. 최영에 의해 제주도도 탈환되면서 잃은 땅을 다시 되찾는가 싶었는데...
이 때는 또 남쪽의 왜구, 북쪽의 홍건적으로 동북아시아 전체가 막장이던 시절이었죠. -_-; 공민왕은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며 요동의 동녕부까지 공격, 일시적으로 점령합니다만, 그 근처의 주민들에게 고려에 귀순할 것을 권고한 후 회군합니다. 이후 최영에 의해 한 번, 정도전에 의해 한 번 요동 정벌이 시도됩니다만... 결과는 다들 아시겠죠.
명을 세운 주원장은 철령 이북의 땅이 원의 영토였으니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만 이건 고려의 요동 공격 시도를 막기 위한 엄포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정도전을 경계했고, 고려가 단독 혹은 여진과 협동으로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겁냈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주원장이 조선에 한 협박들이 사실은 조선을 두려워한 증거라고 하는데, 이거 출처를 찾아내야 되는데 못 찾겠네요. (...) 공부 안 한 증거로 그냥 거기서 옮깁니다.
- 네놈들이 험한 산과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걸 믿고 까부는가 본데 => 조선 지형 싫어 ㅠ
- 너희가 인구가 많고 양식이 넉넉하다는 건 나도 안다. => 작은 나라 주제에 ㅠ 장기전 가면 망
- 우리를 과거의 수나라, 당나라 군대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때는 수전에 약했지만 지금 우리 군대는 수, 륙 모두 싸움에 능하단 말이야 => 과연...
결국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축출하고, 홍무제 주원장은 이를 지지하면서 더 이상 조선에 대한 압박은 가해지지 않았죠. 이후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압록강 - 두만강에 이르는 영토를 확실히 확보하면서 고려 때부터 이어진 북진은 끝을 맺습니다. 그래도 북쪽이 살기는 힘들었는지 사민정책을 계속했는데도 북삼도의 인구가 경상도 하나보다 못 할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_-;
- 총평
우리나라가 900번 넘게 침략을 받았고 단 한 번도 침략하지 않았다, 이런 말이 있죠. 근데 조선을 고려보다 더 높게 집계한다는군요. -_-; 그럴 리가요.
고려는 이렇게 요-금-원이라는 강대국을 맞아서 버텼습니다. 그리고 겨우 원을 몰아내자 홍건적과 왜구라는 최악의 적을 만났죠. 그래도 버텨냈습니다. 이후 조선으로 오면 남북으로 큰 적이 없어서 대군보다는 소규모 게릴라에 맞서는 시스템으로 확정됩니다. 물론 이성계가 쿠테타로 일으킨 나라이기에 군벌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도 컸지만요. 고려와 비교하기는 힘듭니다. 저 시기 중 고려에 그나마 호의적으로 굴던 - 아마 9성 등으로 고려가 무서운 걸 알아서였을 듯한 - 금나라 말고는 언제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고려의 힘이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많은 아픔이 있었죠. 금나라 때는 자기 속국 수준인 애들을 대국으로 불러야 했고, 몽골에게 좀 뻗댔다고 당시 세계 최강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쟁 기간 보낸 항복문서가 한둘이 아닐 거고, 왕은 남쪽으로 강화도로 도망다녀야 했죠. 그래도 나라는 살렸습니다.
전쟁 기간 고려 내에서도 많은 배반과 반란이 일어나기는 했습니다만, 이로 인해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확고해집니다. 단군 숭배 신앙이 제대로 일어난 것도 이 때고, 고구려 계승을 확고히 하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만들어지죠. (삼국사기가 사대주의? -_-; 전 부정합니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것도 이 때구요.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걸까요.
휴... 그 긴 내용을 글 하나로 담으려니 못 한 말도 많고, 틀린 것도 많을 것입니다. 아무튼, 고려는 이랬습니다.
그럼...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이제 같은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은 조선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겠습니다.
예전에도 한 얘기지만 신라 때부터 우리 나라는 동아시아의 콩라인이 아니었나 싶어요. -_-; 어떤 나라든 자기는 최강이지만 고려 니네는 무조건 우리 바로 밑이고 우리편이어야 된다 이렇게 대접했으니까요. 싸울 때야 싸웠지만, 송, 요, 금, 원이 고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한 것도 많이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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