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기 들어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제국의 국경지대를 침탈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중앙정부의 부패와 혼란상이 심각해지는 것은 곧 제국이 변경지역의 이민족들을 위무하는 데 있어서 다소간 성의없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초원의 지도자들이 부하들의 신망을 유지하고 부족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한족의 영토를 침탈하며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약탈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민족의 침입에 대응하는 과정은 두더지잡기와 비슷했다. 여기를 내려치면, 다시 저기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경 지역에서 더 많은 전투가 벌어질수록 중앙정부의 전비는 더더욱 거덜났고, 그를 보충할만한 세입은 북방의 토지가 황폐해짐에 따라 더더욱 줄었다.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전염병
지난 몇세기 동안 비틀거리면서도 잘만 굴러갔던 사이클이 이렇게나 망가지기 시작한 근본적인 원인은 물론, 서쪽의 로마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낱 비루한 인간들이 어찌 대처할 수 없는 자연재해, 즉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염병의 창궐에 있었다.
어쩌면 로마 제국의 안토니누스 역병이 실크로드를 타고 한나라에 흘러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농사를 짓고 모여살기 시작한 이래, 지리적 장벽에 의해 격리되어있던 수없이 많은 집단의 전염병들이 인구교환과 함께 전파되어 왔고, 유라시아 반대편의 인구밀집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배양된 전염병들이 시시각각 실크로드를 타고 한나라에 당도했다.
역병이 가장 먼저 휩쓴 곳은 물론 제국의 서쪽 변방, 서역(西域)이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여귀(厲鬼)
안제(安帝) 영초(永初) 원년 (서기 107년), 제국의 가혹한 요역 징발에 반기를 든 서쪽 변방의 강족(羌族)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향후 10년 넘게 지속되어 무려 240억 전의 군비가 소모되었다. 이는 무려 제국의 4년치 수입에 달하는 막대한 수치였다. 후한서 서강열전에 이 때의 참상이 기록되어 있는데,
"변방의 백성 가운데 죽은 자를 셀 수 없고, 병량 2개의 주가 텅 비어버렸다."
(邊民死者不可勝數, 幷 涼二州遂至虛耗)
기록상의 강족(羌族)은 본래 황하강 상류 유역에 살던 수렵채집 이민족들의 총칭이었다. 그들은 피에 젖은 폭력적 농경국가 '상(商)나라' 의 갑골문에 기록되었고, 주기적으로 사냥당한 뒤 인신공양에 쓰였다.
중원의 농경국가가 계속해서 확장됨에 따라 '강(羌)이라 불리는 종족'의 영역은 꾸준히 서쪽으로 밀려나 후퇴하였고, 끝내는 유목생활을 채택한 일군의 강인한 부족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따라서 '상나라 때의 강족'과 '한나라 때의 강족', 그리고 '오늘날의 강족'은 그 성격이 시대에 따라 매우 상이했을 것이다.
시대를 한나라 말로 좁혀놓고 보아도, 한족 역사가들이 서술한 '강족(羌族)'이 사실 세부적으로는 매우 다양한 성격의 제부족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며 제각기 서로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이 한나라에 대해 보인 태도 또한 그러했다.
한나라가 서쪽의 장안을 수도로 삼고 있을 때에는 강족을 손쉽게 제압하고 통치할 수 있었으나, 동쪽의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로는 강족 토벌이 지지부진해졌다. 이때부턴 차라리 이들을 서쪽 변방의 백성으로 올기는 것(徙民)이 더 효율적인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새롭게 제국 내부의 신민이 되어 정착생활을 하게 된 강족의 무리들은 동강(東羌)으로, 여전히 서쪽 국경 밖에 사는 유목민 무리들은 서강(西羌)으로 구별되었던 바, 강족에도 서로 다른 수많은 종류의 부족들이 존재했고,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 그리고 제국과의 커넥션은 중앙조정이 타락함에 따라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국의 조정과 대립각을 세우기로 결정한 일군의 강족 집단은 이후로도 140년에 흉노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제국의 서쪽 방어선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일단 강족이 선례를 만들어놓자, 제국의 나머지 국경선이 차례로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170년대가 되자, 선비(鮮卑)족의 지도자인 단석괴(檀石槐)가 북쪽 국경을 뚫기 시작했다. 이에 맞서 제국은 남흉노족을 징발해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했으나, 도리어 초원에서 궤멸당하는 추태를 보였다. (그러나 제국에겐 다행스럽게도, 단석괴는 181년에 일찍 사망했다.)
창천이사 황천당립
(이전에 썼던 황건적 시리즈 참고)
이 과정을 통해 북중국 지역의 인구, 특히 국경지대의 인구는 6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고, 도리어 남중국 지역의 인구는 개발과 이민자들의 유입 등으로 인해 늘어나버렸다. 균형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향후 이들 남쪽 지역에서 독자적인 군벌세력, 우리가 잘 알고있는 유표, 손권, 유비 등의 대두를 암시했다.
국경지역의 연쇄적인 붕괴를 막기 위해, 정부는 적극적인 이주 정책을 펼쳐야만 했으나 이러한 중앙통제적인 방식은 지방의 호족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저지되었다. 호족들은 국가의 붕괴 속에서 도리어 기회를 찾았고, 더욱 더 강력한 세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후한 연희(延熹) 9년(166년), 어쩌면 몰락한 호족의 자제였을 수 있는, 장각이라는 이름의 한 젊은이가 요상한 꿈을 꾼 뒤, 역병에 신음하는 백성들을 치료하러 거록 땅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고, 중앙에서는 환관과 외척으로 비롯되는 극소수의 핵심권력자들과 다수의 실무 지식인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수백여 명의 관직길이 막히는 당고의 금(黨錮之禁)이 벌어졌다.
희평(熹平)연간 (172-177년) 천하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역병에 고통받자(時遭兵亂,疾疫大起), 각지에서 종교지도자들이 저마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남방 민(閩)나라 지역에서는 여자로 태어나 남자로 변한 서등(徐登)이란 주술사가 있었고, 그의 제자 조병(趙炳)은 월나라의 방술(越方)을 써 강물을 멎게 하고 나뭇가지에 새싹을 돋게 했다. 이들은 모두 조정에 의해 체포된 뒤 처형당했지만 장각은 이들과 달랐다.
그는, "스스로 「대현량사」 를 자칭하며 황로의 도를 행했고, 부적과 물을 쓰고 주문을 외워 병을 고치니, 백성들이 그를 믿게 되었(自稱「大賢良師」 ,奉事黃老道,符水咒說以療病,病者頗愈,百姓信向之。)"으며, "여덟 제자를 사방에 보내 선량한(善) 도(道)로써 천하를 교화(角因遣弟子八人使於四方,以善道教化天下)"했다.
이내 제남사람 당주(唐周)가 상표문을 올려 장각의 음모를 밝혔고, 낙양에 머물고 있던 장각의 제자 마원의가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자, 황건의 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각 지방에 분봉된 유씨 제후들은 나라를 버리고 도망가거나 포박당했고, 지방 자사와 태수들의 군대는 연전연패하였다.
이러한 황건적의 기세는 중앙에서 북중랑장 노식(盧植),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 우중랑장(右中郞將) 주준(朱雋), 기도위(騎都尉) 조조(曹操), 남양태수 진힐(秦頡) 등의 군세가 새로이 파견되기 전까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황건의 난이 결국은 조정에서 파견된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음에도, 어째서 식자들은 이를 두고 난세의 시작이라 일컬었던 걸까?
그것에 대해서는 "낙양의 한 여자가 머리 둘에 몸이 하나인 아이를 낳았다(洛陽女子生兒,兩頭共身。)"는 구절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실제로 이 시기에 존재했던 샴쌍둥이를 묘사한 사례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황건의 난을 진압하는 그 순간에도 한나라의 조정이 환관과 조정대신들, 그 둘로 갈라져 마치 머리가 두 개인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는 비유의 일종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중랑장 노식이 한창 황건군을 몰아치고 있을 때, 중앙 조정의 다툼은 그를 해임하는 대신 동중랑장 동탁(董卓)을 파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동탁이란 자는 과연 어떤 자인가?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강족(羌族)과 어울리며 깊은 신망을 쌓았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며, 병사들 대우하기에 있어서 마치 자신의 가족들과 같이 하니, 밑의 사졸들은 하나같이 그를 목숨바쳐 따를 정도였다고 한다.
동탁은 일찍이 자신의 농사짓는 소를 잡아 호걸을 대접하고, 변방을 순찰하며 포악한 오랑캐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늘상 자신의 공을 부하들에게 대신 돌렸고, 조정으로부터 하사받은 각종 금은보화도 모조리 나누었다. 중앙 조정의 손길이 닿지 않아 역병과 침탈로 고통받는 강족들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였다.
동탁은 그렇게 이민족과 영웅호걸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군대, 분노에 휩싸인 젊은 종사단을 손에 넣게 되었고, 설령 조정의 천자라도 그의 군대를 빼앗을 수는 없어 보였다.
정말로, 동탁은 군대를 떠나 상경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부했다. 악한 마음과 개와 같은 성정을 지닌 오랑캐 병사들이 처자식을 굶기고 얼어 죽게 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의 수레를 꽉 붙들고 도저히 떠나보내주지 않는다는, 반쯤은 진실이 섞인 거짓말을 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