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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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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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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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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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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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 이 글입니다.
그 아이는 응. 그 사람이 한다는 말이.. 내가 지금 좋은 인연을 만났대. 평생이 지나도 다시는 오지 않을만큼 좋은 인연이래.
근데 서로, 서로 너무 눈치만 보고 간만 보고,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가 없어서 결국은 그 인연을 놓치고 말거래. 그런 이야길 들었어.
하고서 빙그레 웃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도통 영문을 모르겠지만, 짐짓 눈치 없이 못 알아들은 척 했다. 나도 그저 빙그레 웃었다.
#19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순간을 돌아본다. 그 순간이 지니는 의미를,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일정한 슬픔 없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 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20
스물 셋이 되던 날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늦은 새벽의 조용한 골목길과, 영화처럼 울어대던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입 안에 남아있는 깔루아밀크의 달달함과, 그 아이의 손목에 스치듯 말듯하던 나의 손 끝과, 아무런 말도 없이 걸었던 우리와, 그 때.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의 연속 속에 모든 것이 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있다고 깨닫기도 전에 한순간은 사라지고 말았다.
순간은 영원이다. 영원이 순간이듯이.*
#21
한 달여가 지났을까. 나를 지극히 아끼는 나의 친구 중 하나가 신년이 되어 야구 글러브를 내게 선물했다.
나로서는 부담스러운 선물이였고 친구에게 너의 호의를 받아들이면 내가 권리로 생각하게 될 것만 같아 그것만은 싫다 하였지만
나의 사정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는 친구는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캐치볼을 하면서 땀을 내면 참 좋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나를 끌어들였다.
덕분에 한동안 쉬는 날은 친구와 캐치볼을 하며 지냈다. 많은 이야기를 했고,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사실 정답 같은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복학을 할 생각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차근차근 알아보고 있었고, 전역 직후에도 이미 학교와 이야기를 해둔터라 일은 쉽게 해결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였다. 2월이 되고 학교와의 이야기가 전과는 달라졌다. 내가 복학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였다.
교수님을 비롯해 해결이 가능한 모든 분들께 연락을 드렸지만 달라지진 않았다. 마땅히 어딘가에 추궁할 곳도, 푸념할 곳도 없었다.
2년여를 기다려온 복학은 무산되었고 나는 패닉에 빠졌다. 병원일을 한달 쉬기로 했다.
#22
2월 14일 발렌타이데이였다. 같이 캐치볼을 하던 친구는 좋은 감정으로 만나는 아이에게 초콜릿을 잔뜩 받았고
나는 짐짓 별다른 말 없이 공을 주고 받았다. 운동이 끝나고 담배를 한대 꺼냈을때였을까, 그 아이에게 오늘 발렌타인데이래! 라는 연락이 왔고
나는 여자가 남자한테 주는 날이냐,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날이냐? 하고서 무던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아이는 글쎄, 난 이런걸 잘 안챙겨. 하고서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그 날 캐치볼을 끝마치고 친구와 맥주를 마셨다.
친구가 같이 먹자며 초콜릿을 건내줬다. 친구는 내게 연애를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그저 웃었다.
#23
그 다음날 우리는 만났다. 악화되어가는 나의 상황과는 별개로 그 아이와의 시간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였지만,
방학 이후에도 온갖 스터디그룹과 커리큘럼에 쩔어있는 그 아이를 만나는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 또한 그 아이의 학업이나 나름의 스케쥴을 방해해가면서까지 그 아이를 만나고싶단 생각은 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나의 모습에 대해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는 그 아이의 말을 들은 이후로는 더더욱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새해의 첫날 이후에 한달여만에 얼굴을 마주한 셈이였지만, 우리가 서로를 보는 눈빛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저녁을 먹고서 잠깐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그 아이의 말에 나는 그 아이와 나의 집 가운데에 있는 공원에서 보는게 어떻겠냐며 불러냈다.
드라마 같은데 보면 츄리닝만 입어도 이쁘고 멋지던데 난 왜 이렇게 아저씨같냐 푸념을 하며 그 아이를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 아이는 대뜸 초콜릿을 건냈다. 야, 나 이런거 평생 처음 챙겨봐. 하고 그 아이는 눈길을 피했다.
나는 우와, 야 진짜 고마워. 와 썬 너 키운 보람이 있다 인마 와. 하고서 한참을 감탄했다.
그 아이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하며 괜히 작은 선물에 너무 고마워하니 오히려 자기가 너무 민망하다며 나를 나무랐고
아니야 나는 이 초콜렛에 담긴 너의 마음이 보여 크크 이 마음을 고마워하는거야 인마. 야 진짜 기대해 내가 취직하면 아파트 사줄께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아이는 이왕이면 차도 사달라고 덧붙였고 나는 그 아이를 툭 밀치며 으이구 크크크 하며 웃었다. 그 아이도 웃었다.
한참을 걸으며 그 아이는 내게 담배를 끊는게 어떻겠냐는 조심스런 잔소리를 늘어놨고, 나는 여자친구 생기면 끊을게, 하고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 아이는 야 그럼 평생 못... 아니야. 미안. 하고서 나를 골려먹으며 웃었고, 나 또한 어쭈 야 인마 넌 인마 크크 하며 떠들었다.
한시간을 조금 덜 되는 시간을 함께 걸었을까, 그 아이의 숨이 가빠진게 느껴졌고 나는 눈치껏 잠깐 뭐라도 마실래? 하고서
그 아이와 공원 앞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24
종종 그 아이는 CC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작년에의 이야기를 들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좋게 만나도 욕을 먹고, 나쁘게 만나면 당연히 욕을 먹는
그런 서로에게 해가 되는 관계는 누구를 위한 연애인 것이냐고 그 아이는 종종 묻곤 했다.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었다.
#25
사장님 안녕하세요. 아 선남선녀 오셨네. 아이구 예 크크 잘생기신 사장님이 또 별말씀을.
음, 뭐마실까? 핫초코? 난 그럼.. 저희 핫초코랑 카페모카 주세요. 네 둘다 따뜻한걸로. 아 물은 시원한거 주세요. 그냥 한통 주세요. 크크
나는 자리에 앉아 커피가 나올때까지 물을 홀짝대며 손에서 초콜릿을 놓지 않았고,
그 아이는 야 자꾸 사람 민망하게 크크 그거 내려놓자. 하고 날 타일렀다.
나는 장난스럽게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 아이를 쳐다봤고, 그 아이는 아 진짜 못말려 크크크 하며 웃었다.
지금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나는 그 날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6
커피를 반쯤 마셨을 땐가, 그 아이는 잠깐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그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과 사뭇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1월 1일의 이야기들이 불현듯 기억이 났다.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한참을 단어를 골랐다.
눈치가 빠른 아이는 아니였는데, 그 아이는 한참을 조용한 나에게 별다른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뗐다.
은선아.
응?
할말이 있어.
뭐야 갑자기 크크. 뭔데?
있잖아..
.....
우리도 아직 어리지만 있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세상 산다는거 참 진짜 쉽지 않다는거.
살다보니까 내가 생각했던것만큼 이쁜 곳도 아니고, 덜컥 겁을 먹을만큼 더러운 곳도 아닌 것 같은거야. 그치?
어..응.
근데 언제부턴지 잘 모르겠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아 사는거 참 힘들다, 하고 푸념을 하게 될때면 니 생각이 나기 시작했어.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나도, 나도 이렇게 참 먹고 살기 빠듯하고 뭐가 이렇냐 싶은데, 너는 어떨까하고 걱정이 되는거야.
...
그 때 그런 생각을 해봤어. 나의 무언가가 너를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세상이 진짜, 조금만, 조금이라도 더, 더 아름다운 곳이고, 그래서 니가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
좋아해. 은선아. 사랑한다. 니가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
우리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전에 내 감정에 솔직하고 싶었어. 사귀자느니, 오늘부터 일일이라느니 하는 유치한 연애놀음이나 하자는게 아니야.
나는 너한테 정말로, 이제껏 없을만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구, 그걸 은선이 너한테 말하지 않는다는건 나에게도, 너에게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에게 진솔했으면 해. 그래서... 응. 그래서... 그래서 이렇게. 응.
마땅히 매듭지을 말을 찾지 못하고 나는 싱긋 웃었다. 그 아이는 한참을 핫초코잔을 만지작댔다. 이제는 내가 창밖을 쳐다볼 차례였다.
* 박연선 - 『연애시대』
* 츠지 히토나리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15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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