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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6/17 17:10:19
Name 유유히
Subject [기타] 꼬마들에게 유난히도 잔혹했던 한국의 월드컵
이번엔 제 월드컵 역사를 써보겠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1994년. 저 멀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아니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축구가 뭔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나이였던 저는 광적으로 한국을 응원했습니다. 한국 이겨라! 한국 이겨라! 그래 봐야 초등학교 3학년(당시는 국민학생)이었기에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습니다.

스페인과의 무승부 때 환호하던 해설진, 볼리비아전의 탄식, 그리고 독일전을 끝마친 새벽, 캐스터가 담담하게, 그러나 비통하게 말하던 '졌지만 잘 싸웠다'.. 서정원과 홍명보, 황선홍이라는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나고, '적토마' 고정운은 차두리 못지않은 피지컬로 그라운드를 누볐었습니다. 그러나 기억나는건 그뿐입니다.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지금 와서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왜냐구요?
꼬마들이란 어른과 다릅니다. 인생을 알지도 못하는 나이지만 스포츠에 너무도 쉽게 마음을 열어버리죠. 고사리손은 해남의 이정환처럼 우리 팀의 승리를 갈구하며, 패배했을 때는 아주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어른들이 그냥 '졌네.'하고 투덜거리며 뒤돌아설 때, 꼬마들은 울 기력조차도 없는 엄청난 충격과 좌절을 맛봅니다.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본 분들이라면 아시겠죠. 주인공이 삼미의 패배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는지.

특히 저는 해태의 팬이었기에, 그렇게 패배에 익숙하지가 않았습니다. 야구를 하면 우리팀이 무조건 이기는 것이고, 가끔 질때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 끝(한국시리즈)에 가서는 이기는 법이었습니다. 그게 규칙 비슷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97년 한국시리즈에서 현대의 정민태에게 노히트노런을 얻어맞았을 때는 꽤나 충격이 컸었습니다(상대투수 이대진. 8회까지 3안타로 막다가 무너졌죠). 어쨌든 이기기는 했지만, 그때의 깊은 충격이 98년의 그것의 전조였는지도 모릅니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어엿한 중학생이 된 유유히는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차범근 감독의 전승 본선진출 확정! 언제나 힘겹게 나가는 것이라 도하의 기적 같이 마음을 졸여야 했던 월드컵을 이리도 손쉽게 해내다니! 스포츠신문들은 연신 16강이 확정이라도 된 모양으로 한국축구 찬양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저도 94년과는 달랐죠. 이제 학교 운동장에서 매일같이 축구를 하며 황새 황선홍, 멍게 홍명보, 독수리 최용수, 꽁지머리 김병지, 날쌘돌이 서정원, 폭격기 김도훈, 왼발의 달인 하석주를 연신 재잘거렸습니다.

그런데 왠걸.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황선홍이 상대의 태클에 180도 공중제비를 하며 넘어지더니, 6개월 부상이랍니다. 제법 큰 손실이었기에 꼬마 유유히는 상실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래도 괜찮아. 김도훈도 있고 최용수도 있잖아. 친구들은 여전히 언론의 '16강'에 세뇌되어 있었지만, 저는 왠지 불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왠일입니까. 첫경기 멕시코전, 블랑코라나 하는 공묘기 전문가가 있다는 바로 그 팀을 맞아, 하석주의 프리킥이 (운좋게) 들어가버린 것입니다! 월드컵 사상 첫번째 선제골! 보통 골이라 하면 우리가 먼저 몇 점을 주고 나서 이를 악물고 쫓아가는 것인데, 우리가 앞서다니! 당시 저는 태권도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도장에서 '수련회'를 한답시고 도장 안에 14인치 테레비를 놓고 스무명이 넘는 꼬마들이 모여 단체로 보았습니다.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다!







"맘껏 희망을 가져라.

꿈을 품어라.

그래야

더 깊게 절망하지!" - '신암행어사' 중.








그 이후의 전개는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레드카드. 그리고, 골골골. 3:1의 패배. 제가 가졌던 한국축구에 대한 의심이 씨가 된 것인가, 꼬마는 죄책감에 몸부림쳤습니다. 다음 상대는 세계적인 강호, 토탈사커의 전통 네덜란드. 진작에 짐을 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들 만했습니다. 그런데 감독이라는 콧수염 아저씨(거스 히딩크)는 인터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직도 그 인터뷰가 기억납니다.

"네덜란드 팬들이 한국팀을 상대로 압승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결코 만만한 팀이 아니며, 우리가 고전할 것을 염려하고 있다. 기대가 부담스럽다"

와, 네덜란드 감독이 우리팀에 겁먹었다! (그때 저는 립서비스라는 말을 몰랐습니다.) 저는 잔뜩 흥분해서 친구들에게 재잘거리고 다녔습니다. 네덜란드가 한국한테 쫄았대! 해볼만해! 이길거라는데? 학교 전체에 희망의 전조가 불타올랐고, 결국 그날 새벽, 우리는 다시 수련회라는 명목으로 도장에 다함께 모였습니다. 경기시작 20분쯤 됐을까. 한국팀의 강력한 슈팅이 골문을 흔들었습니다! 와아아아~~ 그런데 알고 보니 뒷그물을 때린 것이더군요. '저선수 누구야?' '이동국이라는데? 그게 누구야?' '어린데 잘한대' 우리는 일제히 탄식하면서도 "해볼만하다!"는 전의를 다지며 경기를 지켜보았습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 '대털' 중














고글을 쓴 레게머리의 외계인 같은 흑인선수 앞에서 우리 수비들은 파란옷 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베르캄프가 툭 치면 우리 공격수들은 볼링핀처럼 우르르 쓰러져 나갔습니다. 삼미슈퍼스타즈를 지켜보는 팬처럼, 저는 외쳤습니다.

졌다. 졌으니까 그만 해라.

울부짖듯이 외쳐댔지만 비정한 네덜란드 선수들은 지치지도 않고 골을 넣어댔습니다.
허수아비 혹은 볼링핀들이 뛰는 경기를 지켜보던 저는, 몽환적인 기분으로 휘청휘청 도장 밖으로 나가 픽 주저앉았습니다. 울 것 같았지만 울음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어쩌자고 우리 팀은 이렇게 약한 걸까. 어쩌자고 이길 거라고 떠들었을까.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소년은 너무 어린 나이에 패배의 쓴맛을 '제대로' 맛 보았습니다.





그 이후로 부지런히 경우의 수를 따지던 언론들은 조용해졌습니다. 차범근 감독은 십자포화를 맞고 경질되었고,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벨기에전에서 '눈물나는 투혼'을 보여준 뒤 귀국하는 일뿐이었습니다. 하필이면 98년은 IMF가 찾아온 해죠. 그 여파로 해태가 경영난에 휘청이며 선수를 팔아대기 시작했습니다. 해태는, 그렇게 몰락하기 시작했고, 저는 월드컵에다 해태의 몰락까지 겹쳐 더욱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2002년이 처음 본 월드컵이라는 제 여자친구를 보면 그냥 웃으면서 얘기합니다. "행복했겠네." 그렇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하는 것을 보면, 어찌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5:0으로 진다는 것은, 정말 남에게 권하고 싶지 않은 슬픔인 것을.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팀에게 바라는 점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꼬마들에게, 너무 깊은 상처를 주지 마세요. 그렇게 깊은 상처는 저 하나, 아니 98년 월드컵을 지켜보았던 모든 꼬마들로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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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17 17:15
수정 아이콘
그랬었지요.

94년 미국월드컵, 국민학교 5학년때.
경기가 대낮에 주로 펼쳐졌고, 비록 2무 1패로 탈락했지만 그래도 꿈을 안고서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달려나가 너도나도 중거리슛만 찼습니다.
98년 프랑스월드컵, 중학교3학년때.
역사상 첫 선제골에 광분한 한 중3은 집에서 날뛰다가 동생에게 엄지를 밟혀 시퍼렇게 멍이듭니다...만.

94년은 몰라도 98년은 너무도 충격이었지요. 02년 월드컵을 대학신입생 때에 볼 수 있었던 것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10/06/17 17:21
수정 아이콘
02년때 성인 신분으로 마음껏 그 열기를 즐겼다는게
다시오지 않을 행운이지요.
암요. 다시는 못느낄 그 광기.
10/06/17 17:24
수정 아이콘
어렸을때 본 네델란드전 5:0 패배는 잊지 못할껍니다..
경기내용은 아직도 기억안나지만 5:0으로 졌다는 것과 베르캄프가 정말 잘했다는 것만 기억나네요.
감전주의
10/06/17 17:24
수정 아이콘
98년도의 그 얄밉던 블랑코가 이번 월드컵 개막전에서 교체 선수로 나오는 걸 보고
"뭐야 아직도 선수로 뛰고 있었냐"라고 생각했는데 엉거주춤 뛰는 걸 보니 고소하면서도 어쩐지 좀 불쌍해 보이더군요..
10/06/17 17:36
수정 아이콘
90년 월드컵을 직접 보지 않으셨다니 그나마 다행이군요.
벨기에한테 지고 스페인한테 떡실신, '마지막 한경기는 이겨줄거야'라고 생각했지만 우루과이에게 루즈타임에 오프사이드 결승헤딩골;;;
그 당시는 지금처럼 월드컵 열기가 뜨겁지 않을때라 한국 경기 할때도 새벽에 거실에서 불꺼놓고 부모님 몰래 조용히 봤던 한 소년의 가슴에 상처가....
이후 대한민국의 첫 승리를 보기까지 무려 12년이나 기다렸더랬죠.

이번경기 16강 꼭 올라가서 90년 우루과이와의 리벤지던 98년 멕시코와의 리벤지던 성사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후니저그
10/06/17 17:38
수정 아이콘
02년도 20살이 막 되버린 그때 볼 수 있었던게 정말 최고의 행운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인전 거리응원 끝내고 아직 술 맛 모를 그때 참 그때가 가끔 그립습니다. 그리고 이젠 서른을 바라보는 20대 후반 다시 그 감동 느껴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16강 올라가면 멕시코와 붙기를 바랍니다. 제가 90우루과이는 모르지만 98멕시코는 알기에 더 몰입될 것 같거든요
가우스
10/06/17 17:53
수정 아이콘
꼬마에게는 유난히도 잔혹했던 롯데의 KBO
10/06/17 18:03
수정 아이콘
2002년 전까지 대구지역 꼬마들에게 너무나 가혹했던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파일롯토
10/06/17 18:34
수정 아이콘
그래도 마지막경기에 모든선수들이 온몸을던져서 비겼기때문에 꿈은 남겨두었었죠
10/06/17 19:19
수정 아이콘
제가 본 첫 월드컵은 90년 이탈리아 대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월드컵이 뭐하는 대회인지도 몰랐고,
TV에서 틀어주면 축구 하나보다 하는 수준이었지요. 지금까지 뇌리에 남아있는 건
황보관 선수의 대포알 프리킥, 결승전 끝나고 오열하던 마라도나군요.

94 미국 대회부터는 월드컵이 뭔지 알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홍명보 서정원을 무한 찬양하고, 황선홍 최인영 조진호를 미친 듯이 욕했었죠.
(그래도 황선홍 선수는 말년에 명예회복 했으니 다행)

98 네덜란드전은 다들 그랬겠지만 악몽이었고요.
베르캄프 트래핑 몇 번에 한국 간판 수비수들 혼이 다 나가버렸으니.

그래도, 앞으론 월드컵에서의 0:5 패배는 다시 안나올 겁니다. 더구나 요즘 아이들이라면,
본선에서 최소 1승씩은 하는 대표팀을 보고 자랄 테니 다행이다 싶네요.
검은창트롤
10/06/17 19:58
수정 아이콘
'베르캄프가 툭 치면 우리 공격수들은 볼링핀처럼 우르르 쓰러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2010년, 우리에겐 차두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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