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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1/20 00:28:38
Name 트린
Subject [내왜미!] 1화 좋은 덕후는 죽은 덕후다 (2)






집인 당산에서 합정으로 올라간 뒤 6호선 삼각지 방면으로 갈아탄 은실은 곳곳에 널린 빈 자
리에 감사하며 얼른 엉덩이를 붙였다.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서 천천히 정리하고 싶은
참이었다.
삼각지로 가는 이유, 그러니까 잠입 수사를 지시한 반장의 말이 은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다.




*



“피해자의 이름은 완광남. 서른 살 미혼. 직업은 부모 잘 만난 백수. 사인은 동물 마취제 케
타민 민감성에 의한 쇼크사. 살인자는 최소 2회분 이상 투약 후 그가 사망하자 식도에 올리
브 유를 붓고 차근차근 2센티미터 길이의 플라스틱 인형 10개를 집어넣었네. 해부를 집도
한 검시의 말로는, 그러니까 정신과 전문의가 아닌 검시의 말로는 몇 개는 잘 안 들어갔는
지 길고 유연한 막대기 같은 것으로 수차례 쑤셔서 민 흔적이 입과 식도에 남아 있다는군.
피해자는 다른 일 하나 없이 오로지 취미에만 매진했는데 광적으로 집착한 요리 빼고는 나
머지는 정말 듣도 보도 못 한 거야. 자네 미니어처 게임, TRPG, TCG란 말 들어봤나?”


은실은 열중쉬어자세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번도 못 들었습니다.”
“그렇지. 나도 마찬가지일세. 완광남의 컴퓨터 하드를 국과수에 맡겼더니 미니어처 게임이
랑 TRPG, TCG란 단어로 문서니 동영상이니 즐겨찾기니 수두룩 빽빽했네. 대충 살펴보니
이것들은 모두 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 일종의 부루마불 같은 게임이었어. 미니어처 게
임은 애들 장난감 병정놀이처럼 탱크랑 군인 같은 것 가지고 놀기이고, TRPG는 주사위 굴
리는 연극, TCG는 카드 도박 놀음 같은 건데 도박과는 다르게 돈은 안 걸고 미리 자신이 만
든 카드 묶음으로 상대와 겨루더라고.
피해자는 이 취미를 일주일에 최소 다섯 번 이상, 하루 여덟 시간씩 모임을 주최하면서 장
소를 제공하고, 초보들을 중급자로 만들고, 고수들이랑 활발하게 교류하고, 게시판에 글도
열심히 썼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독선적인 데 있었네. 다 좋았는데 동호회장이라고 생색을
엄청 낸 모양이야. 그래서 뒤에서 다 욕하고 있었대.
살인을 당할 만한 결정적인 일은 사망 추정일 1일 전에 일어났네. 300명 회원 전원을 모아
놓고 단합대회를 하던 중 마음에 좀 안 든다고 모두를 내쫓았다는 거야. 자네도 운전해 봐
서 알겠지만 거기 엠티촌 같은 데여서 밤에는 교통도 끊기잖나.”
“네.”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 추우니까 근처에서 헤매다가 어떤 인간들은 새로 방 잡고 또 어떤
인간들은 몇 십 명 단위 아니면 친분 단위로 뭉쳐서 돌아와서 사과하고 잤다는데 이러면 충
분히 원한을 품을 만하잖아. 용의자가 300명이나 되는데다 엉망으로 들락날락거렸으니 알
리바이 수사하는데도, 심문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케타민을 추적해 보면 되지 않을까요?”
“완광남 형이 수의사인데 관리 소홀을 인정했네. 피해자가 훔쳤겠지. 그 사람 알리바이도
확실해.”
“그렇군요. 케타민은 쾌락을 위해 맞는 약물이니 과거 유명 가수 사건처럼 여자 친구가 제1
용의자 아닌가요? 그런 마니악한 동호회에서는 서로 사귀기 마련입니다.”
“없어.”
“네?”
“300명 중 여자가 한 명도 없네. 따로 여자 친구도 없어.”


은실은 크게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갔다. 그것도 매우 많이.


“막내.”
“넷.”
“해서 나는 잠입 수사를 결정하고 서장님에게 자넬 추천한 상태야. 공대 알지? 공대에서 여
자 한 명 있음 엄청나게 인기 있는 거. 그것처럼 이 동호회에도 여자를 넣으면 인기를 끌면
서 여러 사람들의 정보를 얻어올 수 있는 상황이지. 동의하나?”
“네, 그렇습니다.”
“신입 회원으로 위장해서 결정적인 것 하나만 물어오게. 그럼 나나 서장님이나 모두 자네를
좋게 기억할 걸세.”
“감사합니다!”


은실은 갑자기 찾아온 행운, 근무 평점을 쉽게 딸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해 기뻤다. 반장은 책
상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



은실은 삼각지 역에서 내려 녹사평 역 방면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6차선 도로 양옆에
자리한, 인적이 드문 넓은 인도에는 늦가을을 알리는 갈색 낙엽들이 가득했다. 은실은 국방
부와 전쟁기념박물관을 지나 벽돌담과 벽돌담 위 철망이 달린 용산의 미군기지 “용산 개리
슨”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남산 공원보다 크면서, 서울 안의 요충지 중 요충지인 이 군부대
는 50개가 넘는 입구가 있었는데 일반인들이 초청을 받아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한정돼 있
었다. 그곳이 은실의 목적지였다.
은실의 시야에 구름다리가 들어왔다. 구름다리를 지나치기 직전 왼쪽에 철망에 "GATE 5"라
고 적힌 팻말이 걸린 약속 장소가 있었다.
약속 장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약속 시간인 오전 11시에서 10분쯤 지나자 나이는 이십대 초중반, 키는 한국 남성 표준인 1
74에 근접하고 비교적 멀끔하게 생긴 흰 얼굴의 남성이 나타났다. 은실은 그가 미국의 연기
파 배우 제임스 스페이더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약간 어색한 인사를 나누기 직전
모두 안경을 쓰고, 모두 회색 패딩 점퍼를 입었으되 체구는 통통, 홀쭉, 중간으로 제각각인
남자 세 사람이 약속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통통하면서 가장 머리숱이 적은 남자가 알은체를 했다.


“혹시 ‘잘부탁드립니다’ 님?”
“네.”
“진짜 오셨네요!”
“아, 네.”


은실은 대답하면서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의심을 하는지, 의심을 한다면 자신이 어디에서 의심
살 만한 일을 했는지 급히 되새겨 보았다.


“반가워요. 제가 부 시삽(* Sysop. 모뎀을 사용하던 PC 통신 시절 동호회장을 뜻하는 단어.)이
자 가입심사 해 드리고, 모임 장소랑 모임 성격 질문에도 답변 드린 ‘팔매’ 조양익이에요. 저
기 키 작은 친구가 ‘코치’ 닉 쓰는 손중호. 키 큰 친구가 ‘팔콘’ 닉 쓰는 안경환이고요. 잘부탁
드립니다 님처럼 안경 안 쓴 저분은 ‘위로5피트’ 닉 쓰시는 차원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가 반복되는 인사가 오갔다. 은실이 아까 진짜 왔느냐는 말에 대해 질
문하려는 참에 양익이 알아서 대답했다.


“햐, 근데 이거 저희가 여성 회원은 처음인데 게다가 미녀 분이 오셨으니 정말 잘해 드려야겠
어요. 정말 반가워요.”


아, 그래서.


“게다가 여자라고 하셨을 땐 반쯤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도 이쪽 세계엔 여자인 척
하는 변태가 많아서.”
“여자인 척한다고요? 금방 드러나잖아요.”
“인터넷에선 안 그래요. 정모만 안 나오면 되거든요. 관심은 관심대로, 도움은 도움대로 받고
그 상황을 즐기는 거죠.”


은실은 참 별 인간들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들도 참으로 매력
이 없는 패턴만 골라 모아놓았으니 별 인간들에 속한다 할 수 있었다. 경환은 키도 크고 평균
적인 얼굴이었으나 수줍음이 역력했고, 원은 잘생긴 편이었으나 키가 큰 편이 아니어서 아쉬
움이 있었다.
……은실은 일하러 왔으면서 자꾸만 남성성으로 (300여 명의) 용의자 중 네 명을 평가하는 자
신의 마음을 억지로 다잡았다.


“한 분 더 오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그녀의 물음에 양익의 얼굴에 약간 짜증이 어렸다.


“그러게요. 에스코트 해 줄 수 있는 미군 애가 게임 시작 못 하고 계속 기다리는데 왜 안 오는
지 모르겠네요.”
“에스코트요?”


양익은 1인당 두 명씩 손님이나 친구를 자신의 책임 아래 등록하고 입장할 수 있는 주한미군
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지금 저희가 공식 토너먼트 게임에 참석하겠다고 통보해서 미군들이 저희 머릿수만큼의 토
너먼트 자리 비워놓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한시라도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딱 한 명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네요.”


때마침 양익의 핸드폰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양익은 영어를 중얼거리며 억지로 웃으며 통화
를 시작했다. 가장 활발히 대화하던 양익이 미군과 통화하면서 어색함이 되살아났다.
원이 물었다.


“자금은 좀 많이 가져오셨나요?”
“양익 님이 그러라고 하셔서 한 5, 6만 원 들고 왔는데 자세히는 못 들었어요. 왜죠?”
“오늘 하실 미니어처 게임 방식 때문이에요. 던전 앤드 드래곤, 줄여서 디앤디 미니어처라는
건데요. 판타지 테마 속에서 은지 님이 일종의 모험가들의 부대장 역할을 하는 거예요. 부대
의 개성을 선택하는 거죠. 은지 님 하고 싶은 대로 강력한 마법사로 갈 수도 있고, 아님 갑옷
을 튼튼히 입은 전사 중심으로 부대를 구성할 수도 있고요. 한데 그러려면 스타터라고 안에
유닛이 많이 든 기본 상자를 산 뒤, 부스터라는 추가 유닛이 든 상자를 많이 뽑아야 해요. 아
무래도 유닛이 많으면 선택의 폭이 넓잖아요.”
“그렇네요. 얼핏 들으니 레어 유닛도 들어 있다고.”
“그렇죠! 복권 생각하시면 돼요. 진짜 좋은 유닛을 뽑으려면 결국 많이 사야 하는 거죠.”
“이제 돈이 많이 필요한 이유를 알겠어요.”


한편 사소한 잡담 사이로 들리는 양익의 통화는 미군에서 아직 오지 않은 한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양익의 목소리에 당혹과 짜증이 배었다.


“어디까지 오셨다고요? 네? 그럼 앞으로 30분 더 기다려야 하잖아요. 얼른 오세요. 다섯 명이
나 기다리고 있어요. 녹사평으로 오시면 더 빨라요. 삼각지 말고. 택시 있음 택시라도 타시고
요. 네. 얼른요.”


통화 후 45분이 흘렀다. 정오가 되면서 이곳에 근무하는 미군의 한국인 여자 친구들과 카투사
(*주한미군에 파견된 한국군인)들의 가족과 여자 친구가 들락거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슬슬 점심을 먹고 싶고, 근처 벤치에 앉아 있기도 지칠 무렵 저 멀리에서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남자가 나타났다.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키가 180쯤에 상체가 특히 발달한 근
육질이고, 산에서 수련하는 도인처럼 턱수염에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었다. 분위기나 체격
만 봐서는 가장 이질적이면서 가장 덕후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새였다. 덕후 증명서는 따로 있
었다. 그는 뒤에는 길고 큰 백팩, 양손에는 바퀴 달린 여행가방을 끌고 있었다. 은실은 분명
저 가방에는 플라스틱 인형들이 잔뜩 들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도인 또는 반칙 레슬러처럼 생긴 남자는 양익의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씩 웃으며 이쪽으로 걸
어왔다.
은실이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 거 아냐?’


거의 1시간 늦은 주제에 번개처럼 뛰어오는 것은 고사하고, 미안한 기색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
다. 은실이 보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수성 씨 쫌! 얼른 오라니깐!”
“예, 예.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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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스디
13/11/20 08:28
수정 아이콘
잠깐 디앤디 미니어쳐? 녹사평역?! ... 미군부대?! ...왠지 엄청나게 친숙합니다...?...
게다가 2005년... 이면 왠지 아는 분인 것 같은 느낌이... 폴 있던 때 아닌가요...
게다가 등장인물 중에 적어도 두분은 현실모델이 보이는데요 잠깐 누구세요 크크크크크크
13/11/20 10:57
수정 아이콘
엘에스드님 저 tune이에요. 여기 계셨군요!
엘에스디
13/11/20 11:02
수정 아이콘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에요!!! 크크크
13/11/20 11:08
수정 아이콘
저도 반갑네요. 좀 있음 소설 속에 "비열 마이크"도 나오고, 폴도 나와요. 완전 추억담!
엘에스디
13/11/20 11:09
수정 아이콘
오오 그립네요 ㅠㅠ
알피지
13/11/20 09:09
수정 아이콘
추억의 5번 게이트..
13/11/20 10:57
수정 아이콘
추억이 있으시다니 위의 엘에스디 님처럼 아는 분일 수도 ^^;;;
귤이씁니다SE
13/11/21 23:37
수정 아이콘
여.. 여자사람이 없는게 뭐가 이상해!! ㅠㅠ
옆집백수총각
13/12/02 04:32
수정 아이콘
크크 내왜미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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