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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06/03 02:32:38
Name kikira
Subject [소설] 3회 :『녀소 는리달 을간시』- 클라인박사, 뫼비우스띠에서 길을 잃다













※ 이 소설은 픽션입니다. 따라서 순환론과 관련된 인명, 서적, 논문, 학파 등에 관련된
    모든 내용은 허구이며, 혹 그 관련이 의심된다면 그것은 순전한 우연임을 알려드립니다.











세 번째 이야기 - 클라인박사, 뫼비우스띠에서 길을 잃다








  한국과 일본이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1973년, 순환론은 조용히 세상에 강림했다. 당시 일본의 지성으로 존경받던 아나끼 하시모토 호세이대 교수는 오비치 신문과의 정년 기념 인터뷰에서 다음의 같은 말을 남겼다.
  곧 순환론의 첫 울음소리였다.

  “제 마지막 논문은 앞으로 10년 동안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겁니다.”

  인터뷰 기사에서 기자는 이 언급을 노교수의 호기 정도로 취급했지만, 기사가 나간 이후 약간의 이슈가 되었고, 몇몇의 사람들은 그 논문을 열람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대개의 명논문들이 그렇듯 아나끼 교수의 논문,「텍스트에 있어서 순환과 단절의 문제」또한 짧고 간결했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 후 반세기 동안은 확실히 잊혀지지 않았으며 앞으로 한 세기 동안에도 그것이 가능할지는 퍽 비관적인 논문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아나끼 교수는 논문에서 ‘가츠코와 라벤다’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선 어쩔 수 없이 앞서 내가 언급한 책의 단편 중 하나,「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내용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먼저 가츠코는 그 작품의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작품내 여중생 가츠코는 어느 날 우연히 학교 과학실에서 라벤다 향의 액체를 마주친 뒤, 시간을 뛰어 넘는 타임 리프와 공간을 뛰어 넘는 텔레포테이션 능력이 생긴다. 이 특수한 능력 탓에 이런 저런 사건을 겪은 가츠코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원인을 찾기 위해 맨 처음 라벤다 향을 맡았던 당시의 과학실로 타임 리프를 한다. 그러나 그곳엔 도리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소꿉친구 가즈오가 있었다. 사실 가즈오는 한 달 전에 미래에서 온 소년으로 다시 미래로 돌아가기 위해 주변 인물들에게 기억 조작을 한 뒤 과학실에서 그 라벤다 향이 나는 액체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고, 우연히 그 향을 맡은 가츠코가 타임 리프 능력과 텔레포테이션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가즈오는 가츠코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만 미래에서의 규칙 때문에 가츠코의 기억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서로의 이별을 아쉬워 하지만 가즈오는 가츠코의 모든 기억을 지운 뒤 미래로 떠나고 만다. 그 뒤 가즈오가 사라진 세계의 가츠코는 우연히 라벤다 향을 맡자 왠지 모를 아련한 생각을 떠올리고 작품은 마무리된다.


  문고판으로도 100여 쪽 밖에 안 되는 이 텍스트에서 아나끼 교수가 특히 주목한 부분은 일명 ‘가츠코의 잠재 기억’에 관한 것이었다. 위에 말했듯이 작품 끝부분의 가츠코는 비록 기억은 지워졌으나 라벤다 향을 맡으면서 왠지 모를 아련한 추억을 떠올린다. 즉, 가즈오에 대한 약간의 잠재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맨 처음 과학실에서 라벤다 향의 액체를 마주친 가츠코도 이와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아직 가즈오에 대한 진실도 모르고 그에 대한 기억이 지워진 적이 없는 작품 처음 부분의 가츠코가 보일 수 없는 반응인 것이다. 여기서 아나끼 교수는 작품 처음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붙여 놓는다. 아나끼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작품 초기의 가츠코는 곧 작품 말미의 가츠코”인 것이다. 이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는 초기 가츠코의 반응을 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러나 작품을 한번 이상 읽어 ‘라벤다의 진실’을 아는 독자가 읽는 텍스트는 그 의미가 전과 같을 수 없다. 텍스트의 활자엔 하등의 변화가 없으나 독자의 이해는 전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텍스트는 독자의 읽기 행위가 계속되는 한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된다. 아나끼 교수가, “이 작품의 두께는 독자의 독서 시간과 비례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   *   *   *   *



  그러나 당시 이 논문은 겨우 일본 내에서만 이런 저런 이야기가 되는 정도였다. 또한 이 논문에서 아나끼 교수는 오늘날의 소위 순환론을 곧바로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순환론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애매한 원형의 상태에서 진정한 순환론이 태동한 것은 아나끼의 논문이 나온지 2년 후(순환론자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아나끼력 3년) 호쇼와대 다카시 교수에 의해서였다. 다카시 교수는 향후 셀 수없이 인용되고 언급된  명논문「가츠코 연구」에서 순환론의 정수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정리했고 이는 곧 순환론자들의 바이블이 되었다. 이 원문자체가 워낙 쉽게 쓰였고 번역도 말끔하기 때문에 여기선 차라리 다카시 교수의 글을 직접 인용하고자 한다.


  "…… 가츠코의 상태는 크게 다섯 단계이다. 가즈오를 만나기 전의 가츠코(A), 가즈오에 의해 기억 조작을 당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가츠코(B), 타임리프 및 텔레포테이션 능력은 있지만 가즈오에 대한 진실은 모르는 가츠코(C), 마침내 가즈오에 대한 진실을 깨달은 가츠코(D), 그리고 다시 가즈오에 의해 기억조작을 당해 기억을 잃어버린 가츠코(E)가 있다.
  A에 대한 묘사는 텍스트에 없으니, 독자가 텍스트를 처음 읽을 경우 가츠코의 상태 변화는 B-C-D-E일 것이다. 그러나 라벤더의 진실을 알고 다시 독서에 임하면 원래 B인줄 알았던 가츠코가 사실은 E의 상태였음을 깨달게 된다. 그렇다. 가츠코는 독자의 독서 행위이전에 이 모든 일을 이미 겪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츠코는 독자의 읽기 행위와 함께 E'-C-D-E의 상태를 반복한다.(E'는 첫 페이지로 돌아온 가츠코다) 그 순환은 물론 독자의 독서 행위보다 많을 수밖에 없고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 텍스트엔 페이지는 있으나 시작도 없고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는 A, B, C의 상태가 있었으리라 짐작할 순 있지만 텍스트는 이미 첫 페이지부터 자신의 행위를 계속 반복하고 있는 가츠코를 보여줄 따름이다.
  그리고 그 반복은 독자의 읽기행위와 함께 축적된다. 곧 소녀는 작품내의 원환적 순환을 꾸준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순환하는 가츠코, 그 달리기는 과연 멈출 수 있을까?"



   *   *   *   *   *



  진정한 순환론의 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물론「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같은 기법의 작품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이와 비슷한 논의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원환적 구조에 대한 지적을 아나끼 교수가 처음 한 것도 아니었다. 순환론 논의의 특징은 그 내용 자체가 아니라 그 강렬한 수용에 있었다. 나는 왜 하필 가츠코월드의 사람들이 아나끼 교수의 논문 이후 갑자기 순환론에 빠져들기 시작했는지 완벽히 이해할 순 없었다. 물론 아나끼 교수는 일본 내 존경받던 석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순환론의 급격한 확산과 과열은 이후 몇 번이고 반복되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또한 나는 이러한 순환론적 해석에 약간 신기해했지만 당시 가츠코월드의 사람들처럼 그것에 열광하진 않았다. 역시 난 이방인 이었던 걸까? 순환론과 관련된 광풍은 가츠코월드의 유별난 특징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다카시 교수의 해설이 붙은『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전 세계 수많은 나랏말로 번역되었고, 그 중 많은 나라에서『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그 나라에서 번역된 첫 번째 일본어 책이 되었다. 동경올림픽 이후로 일본이 이렇게 세계적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다. 전후일본의 최대 이슈였던 순환론은 전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한 번 담금질되었고 결국 당시의 자유세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순환론자들은 더이상 작품 '초기'라든지 '마지막 부분'따위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카시 교수의 말대로 텍스트엔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었으며 끝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다.  


  순환론 논의의 특징 중 또 다른 하나는 그러한 논의에서 작가가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츠츠이 야스타카는 몇 차례 비평가들과 독자들의 해석을 존중한다는 뜻을 보였고 순환론을 긍정하는 듯한 언급을 이런 저런데서 하기도 하였으나, 결코 순환론 자체를 인정한 적은 없었다. 가츠코월드 사람들 또한 이런 작가의 생각을 존중했고 또한 무시했다. 작가가 인정하지 않는 작품에 관한 논의가 성립할 수 있는지, 나는 의아스러웠다. 또한 내심 작가의 명쾌한 해설을 기대했기에 다소의 상심에도 빠졌다. 이러한 논의의 성질 또한 가츠코세계의 유별난 점 중 하나였다. 물론 간혹 작가를 찾아가 작품의 순환적인 구조를 의도했는지 묻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논의자들은 이미 작품이 작가와는 상관없는 양 취급했다. 그 뒤 얼마 안 돼 작가는 잠적했고, 또한 침묵했다. 따라서 논쟁과 토론은 여전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었다.

  아나끼력 4년, 그 해 노벨문학상은 당연히 아나끼 하시모토 교수에게 주어졌다. 그 뒤에도 5년간 3명의 순환론자 - 흔히 순환론 삼총사로 불리는 다카시 교수, 와이즈먼 옥스포드대 교수, 크리스틴 토론토대 교수가 그들이다. - 들이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차례로 노벨상을 타갔다. 그리고 이후에도 노벨문학상은 순환론에 관련된 여러 논의들의 추이와 성세를 알려주는 시금석이 되었다.

 
  순환론의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 그들은 어디에서나 순환론을 이야기했고 누구나 순환론을 입에 올렸다. 당시 미주 대륙의 흑인과 백인이라 할지라도 순환론을 가지곤 서로 흥미롭게 의견을 나눴다. 순환론이 가장 맹위를 떨치면 70년대 후반, 와이즈먼 교수는 순환론은 더이상 이론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하며 순환론적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등을 유행시켰다. 그러한 열기에 맞춰, 수많은 정당들이 순환론을 자신의 강령으로 삼기 시작했다. 거기에 그 상관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 세계적으로 순환론을 수용한 선진국들의 자살율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난 이때부터가 진정으로 가츠코 월드와 우리 세계가 달라지기 시작한 기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인과율에 따라 이전에도 양세계는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내가 더듬기엔 너무 멀고 희미했다. 또한 인과율에 따라 이후에도 양세계는 수많은 동질성을 지니고 있었다. 난 그 수많은 차이점과 동질성 속에서 어느 것이 순환론 논의때문에 생긴 것인지, 무엇이 이전부터 지니고 있던 가츠코월드의 특이점인지 확연히 구분하진 못한다. 난 중심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순환론과 관련된 논의는 꾸준히 이어져 가츠코월드 고유의 수많은 '차이'를 생성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프로방스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순환론을 가르치던 시기에도 몇몇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결코 떨쳐버리지 않았다.


  "과연 그런가?"

  


            




                                                                                                                                                                  4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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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6/18 00:24
수정 아이콘
흥미진진한데요.
다음 회도 기대하겠습니다.^^
Black_smokE
08/06/18 01:34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 ^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만약 위의 A, B, C, D 그리고 E 에 대한 설명에서 A라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은(논의가 가츠코가 가즈오를 만나기 전의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가츠코가 순환론에 진입하는 시기부터 설명이 된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도 되나요?

만약 그렇다면, B의 상태가 어떻게 존재 가능한 것인가요?

위의 설명에서 B와 E는 '다시'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 밖에는 차이가 없는데 순환론에 처음 들어오는 가츠코는 B의 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말이죠. 언급된 '다시' 라는 개념은 '1회 이상의 기억 조작을 당한 후'로 받아들이는 것인가요 아니면 B상태의 연속으로서의 '다시'인가요?

앞으로 좋은 연재 부탁드립니다~^ ^
08/06/18 17:06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파란토마토
08/06/18 23:11
수정 아이콘
잘읽고있어요~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파블로아이마
08/06/20 17:56
수정 아이콘
좋은글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다음회가 기다려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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