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4/13 15:14:38
Name 초모완
Subject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어느 추운 겨울날 새벽 다섯시, 따뜻한 것이 먹고 싶어 옆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바닥을 쓸며 청소를 하고 있었다. 뭘 먹을까 고민을 하다 베지밀을 골랐다. 청소 하시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계산을 해달라고 말씀 드렸다.

간만에 허리를 펴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백팔십이 훌쩍 넘는 키였지만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피곤에 찌든 얼굴이 그를 왜소하게 보이게끔 하였다.

평소때라면 카드를 내밀었을 테지만 그날은 왜인지 현금 결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잔돈이 있었기에 가격을 지불했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베지밀이 금방 식어버릴 것 같아 창 밖이 보이는 곳에 가서 베지밀을 홀짝 거리며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다섯시까지 오라고 말 해 놓고는 정확한 주소를 찍어주지 않는 광고 제작사를 욕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보니 답장이 왔다. 주소를 검색해 보니 길 건너편 오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베지밀을 쓰레기통에 넣고 편의점을 나섰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편의점 아저씨가 헐레벌떡 뛰어 오더니 날 붙잡았다.

“아니. 사람이… 돈도 안내고 그러시면 어떡해요?”
“예?”
“아니 내가 청소하면서 쓰레기통을 다 비웠는데 베지밀 한병이 딱 있는거야… 그거 당신이 돈도 안내고 먹은 거잖아.”
“아니. 아저씨 무슨 말씀이세요. 저 계산 했잖아요.”
“하. 진짜 사람 참…”


바로 떠오른 생각은 휴대폰으로 온 카드 결제 내역을 보여 주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필 그날 현금 결제를 했다.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씨씨티비였다.

“아저씨. 카운터에 씨씨티비 있죠? 그거 한번 보시죠.”

아저씨는 도둑놈 새퀴가 적반하장이라는 듯이 어디 그럽시다 라고 한다.
하지만 그때 또 때마침 전화가 온다.

“아니. 다섯시까지 오라니깐 왜 안오세요.”
‘니가 정확한 주소 안 찍어주고 어디역 근처라고만 해서 대기 타고 있었잖아. 주소도 이제 막 알려 줬음시롱.’


“아. 넵. 다 왔으니까 금방 가겠습니다.”

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상황이 묘해졌다.

“아. 아저씨. 제가 지금 일하러 가봐야 해서요. 가봐야 할거 같은데…”
“아니 씨씨티비 보자면서 어디 도망치려고 해요?”

나도 모르게 ‘아니’ 가 나왔다. 하지만 아니로 시작 하는 말의 뒷부분은 대부분 상대방 화를 더 돋구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세상 그렇게 사는거 아니에요.”

라면서 ‘도둑놈 새퀴 한번 봐준다’ 라는 듯 씩씩대며 편의점으로 돌아갔다. 멍하니 자리에 서 있는데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난 건너지 못하고 우두커니 보고만 있었다. 기왕 늦은거 씨씨티비 보고 갈까 했는데 다시 전화가 울린다.

“아니 준비하고 챙겨야 할거 많은데 왜케 안와요.”

이새퀴 뭐지? 방금 통화한지 얼마나 됐다고. 주 라인이 탑인가?

세상 억울한 정글러의 심정이 되어 ‘아.네. 곧 갈게요’ 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여기도 저기도 내편 없이 날 다그치기만 하니 세상 서러워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호를 그렇게 두번 보내었다. 다시 편의점에서 아저씨가 뛰어 오신다. 오미터 정도 됐을때 속도를 죽이시더니 쭈뼛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아니 내가 돈통 다 정리했는데… 다시 가서 보니까 딱 베지밀 가격이 있네요.”

내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자 주섬주섬 몇가지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요 며칠 잠 못자고 일을 하다 보니 제가 너무 정신이 없었습니다.”

‘아이고 사장님. 잠도 못주무시고 고생 많으시네요. 저는 괜찮으니까 들어가셔서 좀 쉬세요.’

라고 말했다면 좋았을 것을… 오분전 아저씨의 행동에 복수하려는 듯 그분에게 들었던 말을 되돌려 주듯 말을 던지고 건널목을 건넜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마자 늦게 왔다고 조연출에게 엄청 혼났다. 일을 시작했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고. 쓸고 닦고 막말 듣고 옮기고 구르고 쌍욕 듣는 일이었다. 보통 연출자 성질이 불 같으면 조연출은 착하던데 여긴 둘다 꼬라지가 영 거시기 했다. 모델 없이 이런 저런 촬영을 진행하다  오후 느지막한 시간에 광고 출연자가 도착 하였다. 스마트하고 젠틀한 스타였다. 로마 황제 같이 군림하던 감독이 버선발로 마중나가서 모셔온다. 그 옆에 조연출이 잔뜩 굽신거리며 돕는다.


저녁이 되고 스타는 퇴근했지만 촬영은 새벽 다섯시까지 이어졌다. 꼬박 스물네시간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니 몸이 녹초가 되었다. 여섯시가 될 때쯤 촬영은 끝이 났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가 간신히 나오고 촬영팀, 조명팀 등등의 팀들이 후다닥 본인들 짐을 챙기고 퇴근했다. 뒷정리를 하며 쓰레기를 쓸어담기 시작했다. 오십리터 짜리 쓰레기 봉투 열 개가 가득 채워졌다. 시간은 오전 일곱시를 지나고 있다. 조연출이 집에 안 갈거냐고 짜증을 낸다. 빨리 정리하겠다고 말한 후 양손에 쓰레기 봉투를 하나씩 들고 쓰레기장으로 달려 나갔다. 오분 거리였다.


결국 촬영은 여섯시에 끝났지만 내 퇴근은 여덟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발을 질질 끌고 집으로 향했다. 고개를 푹 숙인채 길을 걷다 고개를 들었다. 그 편의점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안을 들여다 보았다. 어제 그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반짝반짝 잘 닦여진 편의점 창문에 피곤에 찌든 한 남자의 모습이 비춰 보였다.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12-12 08:53)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레이미드
22/04/13 15:47
수정 아이콘
하필이면 '마치 이런 일이 있으려고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현금 결제를 했는데...
거기서 카드 결제를 했다면 이런 글이 나오지 못 했겠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단편 영화를 본 기분이 드네요.
22/04/13 15:52
수정 아이콘
글 잘 쓰시는 분들 정말 부러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League of Legend
22/04/13 15:56
수정 아이콘
글을 엄청 잘 쓰시네요.. 눈으로 생생히 보는 듯한 글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만사여의
22/04/13 17:23
수정 아이콘
철권 글도 잘 읽었습니다.
글 자주 올려주세요
신류진
22/04/13 18:32
수정 아이콘
오오 스타가 누구였을까요
푸헐헐
22/04/13 19:01
수정 아이콘
코로나 휴유증 때문인지 조금 전 상황이 기억 안 나는 경험을 했었는데, 편의점 아저씨도 코로나에 걸렸던 걸로 하시죠..
일상 속 이야기인데 몰입해서 잘 읽었습니다
Faker Senpai
22/04/13 20:20
수정 아이콘
하필이면 현금 결제를 했는데 그런일이 있었다니
예정된 시나리오 같네요. 용서하고 좋게 끝내는게 베스트였겠지만요. 사람들과 다 좋게 좋게 지내는게 바램만으론 힘들고 지혜가 많아야 하는거 같아요.
다음부터 비슷한 상황에서 이날의 기억을 계기로 더 유하고 온화하게 넘어갈수 있으면 이날의 가치는 큰것일수 있겠네요.
에베레스트
22/04/13 21:21
수정 아이콘
편의점이면 현금결제했어도 영수증조회하면 바로 뜨는데 바코드 안찍고 돈만 줬나보군요.
단비아빠
22/04/13 21:45
수정 아이콘
그래도 나중에 와서 정중하게 사과했으면 괜찮은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요즘은 그런 사과조차 보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려서...
네오크로우
22/04/13 23:34
수정 아이콘
아... 글이 예쁘네요.
풍문으로들었소
22/04/14 04:08
수정 아이콘
그냥 오래 일하신게 더 눈에 들어오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린본드
22/04/14 05:47
수정 아이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밀물썰물
22/04/14 07:47
수정 아이콘
편의점 아저씨 편 드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 가끔 순간의 기억이 깜빡 할 수 있어요, 특히 피곤하거나 머리가 복잡하면.
타이밍이 안좋아 더 힘드셨겠네요.
페스티
22/04/14 10:27
수정 아이콘
글 잘 쓰시네요. 잘 읽었습니다.
청순래퍼혜니
22/04/14 10:4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94 집에서 먹는 별거없는 홈술.JPG [23] insane7991 22/04/30 7991
3493 인간 세상은 어떻게해서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 3권의 책을 감상하며 [15] 아빠는외계인4811 22/04/29 4811
3492 [테크 히스토리] 인터넷, 위성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 해저 케이블의 역사 [32] Fig.13899 22/04/25 3899
3491 소수의 규칙을 증명..하고 싶어!!! [64] 라덱4917 22/04/25 4917
3490 웹소설을 써봅시다! [55] kartagra5333 22/04/25 5333
3489 믿을 수 없는 이야기 [7] 초모완3652 22/04/24 3652
3488 어느 육군 상사의 귀환 [54] 일신4449 22/04/22 4449
3487 (스크롤 압박 주의) 이효리 헌정사 (부제 : 어쩌다보니 '서울 체크인' 감상평 쓰다가...) [76] 마음속의빛3955 22/04/19 3955
3486 [테크 히스토리]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아내를 두면 생기는 일 / 캡슐커피의 역사 [38] Fig.12966 22/04/18 2966
3485 『창조하는 뇌』창조가 막연한 사람들을 위한 동기부여 [12] 라울리스타2913 22/04/17 2913
3484 코로나19 음압 병동 간호사의 소소한 이야기 [68] 청보랏빛 영혼 s3324 22/04/16 3324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3891 22/04/15 3891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2930 22/04/14 2930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2910 22/04/13 2910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2817 22/04/05 2817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4062 22/04/11 4062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3612 22/04/11 3612
3477 음식 사진과 전하는 최근의 안부 [37] 비싼치킨2851 22/04/07 2851
3476 꿈을 꾸었다. [21] 마이바흐2742 22/04/02 2742
3475 왜 미국에서 '류'는 '라이유', '리우', '루'가 될까요? - 음소배열론과 j [26] 계층방정3460 22/04/01 3460
3474 망글로 써 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 [34] 공염불3552 22/03/29 3552
3473 소소한 학부시절 미팅 이야기 [45] 피우피우3060 22/03/30 3060
3472 [테크 히스토리] 결국 애플이 다 이기는 이어폰의 역사 [42] Fig.12859 22/03/29 285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