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1/08/17 03:54:46
Name 걷자집앞이야
Subject 잘지내고 계시죠 (수정됨)
작년 가을
길게 아팠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너무 좋아해 수많은 손자손녀들 중
가장 이쁨받는 손녀였어요
태풍이 오면 할머니께 전화해 아파트인 우리집으로 빨리 오라고
다치면 안된다고 수화기들고 엉엉 울던
나름 귀여운 손녀였지요



대학생 시절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옷가게, 과외, 학원강사, 편의점, 웨딩홀 등등
이것저것 많이해왔지만 전일제로 하는건 처음이었죠
고향에 내려와 가족들도 많이 보고 친구들도 많이 만나야지
했던건 일에 찌들리다보니 어느덧 뒷전이 되더라구요

그날은 연장근무가 없어 칼퇴를 하게 된 날이었어요
노란 단풍이 들고 유독 하늘이 파랗던 날이라
보고싶은 사람을 보러가야지 하고
무작정 할아버지 집으로 걸어갔어요

빵을 사들고 도착하면
왜왔냐고 피곤한데 쉬지 하는 반가운 말씀을 하시는
항상 정독하시는 신문과 오래된 선풍기, 익숙한 서랍장,
이런게 고향냄새가 아닐까 하는 그곳

유독 추위를 많이타는 제가
몇겹을 입어도 추웠던 근무처에서 떨다
할아버지댁에 가면은 따끈한 방에서
할머니가 밥한그릇 퍼주시기도 전에 잠이들곤 했어요
나도 모르게 쿨쿨 잠이들다 깨어보면
무뚝뚝한 할아버지가 손녀 먹으라고
사과를 한가득 깎아두고 기다리시지요

일어나서는
아구~ 우리 할아버지 이런거도 깎아주고
나 진짜 복받은거 같아 냠냠
그러면 부끄러운듯 웃음을 지어주던 우리 할아버지
이제 돌아가신 지 1년이 다 되어갑니다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해
저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던 우리 할아버지
산책하다 다치신 고관절때문에 병원에 입원한뒤
퇴원하지 못하고 언젠가부터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지요
그래도 저는 잊지 않으셨어요
아들도 딸도 손자도 다 잊어도
제가 가면 기억이 돌아온듯 왔냐며 반겨주고
가지말라고 아기처럼 울던 우리 할아버지
잘지내고 계시죠 거긴 어때요




할아버지
난 가을마다는 참 슬픈일이 가득했어서
가을을 너무 싫어했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 이상하게도 가을을 타곤 했는데
할아버지가 더이상 아프지 않게된것은
그렇게 싫어했던 가을이 내게 마음 돌리라 선물준걸로 생각해
코로나때문에 면회도 못가고
돌아가셨단 전화로 마지막을 보내서 너무 미안해요
거기선 외롭지 않죠?
건강하게 잘지내요
많이 사랑해주셔서 고마웠어요 보고싶어요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3-08-29 01:36)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1/08/17 04:04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이별이란 참 어렵네요..보고싶어요
21/08/17 04:09
수정 아이콘
이름은 깜빡했었지만, 너를 잊었던건 아니란다.
가을에 만나자

지금 상황과 닿아있는 지점들이 있어서 괜히 눈시울이 뜨끈하네요.
마리아 호아키나
21/08/17 07:45
수정 아이콘
믿지는 않지만 내세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보고싶은 사람들 언젠가 서로 만날수 있도록..

글 잘 읽었습니다.
Rumpelschu
21/08/17 08:18
수정 아이콘
어우 코끝이 찡해지네요...걷자님도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21/08/17 08:35
수정 아이콘
글을 읽어보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사랑을 많이 주셨겠지만, 글쓴분도 정말 사랑을 많이 받을만한 손녀셨던 것 같네요.

타고난 천성이든 노력이든 성품이든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은데 그걸 할 수 있는 글쓴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 손녀를 두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행복하셨을거라 생각합니다. 글쓴님께서도 앞으로도 많이 사랑받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melody1020
21/08/17 09:05
수정 아이콘
행복하세요.
예쁘게 자라다오
21/08/17 09:56
수정 아이콘
참 그래요..
지금은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저를 이뻐해주셨어요. 당신 아들들 보다 더 손주들 보다 더 저를 이뻐해주셨어요. 지금은 사라진 달동네에 예쁜거 보여주시겠다며 저를 안고 그 달동네를 올랐죠. 그 야경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모르는개 산책
21/08/17 12:51
수정 아이콘
나 이런거 슬퍼하네...
터치터치
21/08/17 15:50
수정 아이콘
할머니 미안해요.
파이프라인
21/08/17 17:52
수정 아이콘
눙물이..
마로니에
21/08/19 03:56
수정 아이콘
할아버지도 항상 보고싶어하실거에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49 와인을 잘 모르는 분을 위한 코스트코 와인 추천(스압) [89] 짬뽕순두부10722 21/09/11 10722
3348 [콘솔] 리뷰) <토니 호크의 프로 스케이터>가 위대한 게임인 이유 [29] RapidSilver5837 21/09/08 5837
3347 Z플립3의 모래주머니들과 삼성의 선택 [115] Zelazny13966 21/09/08 13966
3346 [역사] 몇명이나 죽었을까 / 복어 식용의 역사 [48] Fig.18726 21/09/07 8726
3345 유럽식 이름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 [53] Farce10721 20/10/09 10721
3344 내 마지막 끼니 [5] bettersuweet5989 21/09/06 5989
3343 이날치에서 그루비룸으로, 새로운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 [38] 어강됴리11976 21/09/03 11976
3342 만화가 열전(5) 청춘과 사랑의 노래, 들리나요? 응답하라 아다치 미츠루 하편 [84] 라쇼8820 21/09/02 8820
3341 DP, 슬기로운 의사생활 감상기 [23] Secundo8560 21/09/02 8560
3340 집에서 레몬을 키워 보겠습니다. [56] 영혼의공원7405 21/09/02 7405
3339 공식 설정 (Canon)의 역사 [100] Farce7814 21/08/30 7814
3338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공포 [20] 원미동사람들6140 21/08/26 6140
3337 대한민국, 최적 내정의 길은? (1) 규모의 경제와 대량 생산 [14] Cookinie6590 21/08/26 6590
3336 독일에서의 두 번째 이직 [40] 타츠야7241 21/08/23 7241
3335 차세대 EUV 공정 경쟁에 담긴 함의 [50] cheme9666 21/08/23 9666
3334 잘지내고 계시죠 [11] 걷자집앞이야9565 21/08/17 9565
3333 [역사] 라면 알고 갈래? / 인스턴트 라면의 역사 [38] Fig.19784 21/08/17 9784
3332 다른 세대는 외계인이 아닐까? [81] 깃털달린뱀13805 21/08/15 13805
3331 LTCM, 아이비리그 박사들의 불유쾌한 실패 [18] 모찌피치모찌피치9794 21/08/15 9794
3330 만화가 열전(4) XYZ 시티헌터와 만나다. 호조 츠카사 [34] 라쇼10056 21/08/15 10056
3329 피지알에 자료를 업로드해보자 총정리판 [56] 손금불산입9923 21/07/22 9923
3328 현재 미국은 무엇을 우려하는가? [106] 아리쑤리랑35613 21/08/13 35613
3327 [도서]정의 중독 - 나카노 노부코 [18] Rays5994 21/08/11 599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