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9/03/25 01:59:50
Name 헥스밤
Subject 슬픈 일일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술에 쩔은 노인의 목소리다.

거 누구쇼,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는데.
글쎄,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화를 한 기억은 없는데요.
이름이 뭐요?
그러는 그쪽 분은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 맹구.
모르는 분입니다. 잘못 거신 것 같네요.

전화가 끊겼다. 나는 통화 목록을 살펴보았다. 걸려온 번호로 어제 새벽에 서너 건의 전화를 나누었다. 기억은 전혀 없는데. 해킹일까. 마침 나는 작년 여름에 아이폰을 분실한 참이고, 그 아이폰이 산둥반도 어디에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중인지 삼중인지 하는 락을 걸어 두었음에도 이후로 가끔씩 이상한 스팸 메세지가 오곤 했었다. 최근에는 그런 메세지가 없었는데, 마침내 중국의 기술력이 미국의 기술력에 승리를 거둔 걸까. 내 핸드폰은 그렇게 해킹당했고, 내 핸드폰은 나도 모르는 전화를 하고 만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달랑 네 통의 전화라니 역시 어딘가 이상한데.

기억을 다시 거닐어본다. 어제는 술을 진탕 마셨다. 죽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났다. 살아났으나 도저히 집에 갈 힘은 없어 카카오 택시를 부른 기억이 어슴프레 있다. 그리고 뭔가 문제가 생겨 상호 합의하에 주문을 취소했던 기억이 이어진다. 기억나지 않는 서너 통의 전화는, 추론컨데, 대충 내가 집에 가려고 하던 즈음의 일이었다. 무슨 문제를 어떻게 합의했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혹은 다행히도, 전화를 하기 전의 기억은 전혀 분명하게 존재한다. 화장터에 다녀온 친구와 술을 마셨다. 대략 일 년 전의 기억도 있다 생생하게. 친구가 친구와 결혼했고 나는 결혼식 자리에 있었다. 하나는 죽어 불타 뼛가루가 되었고 하나는 살아 술을 마셨다. 그렇게 어제는 술을 진탕 마셨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집에 기어들어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 운동을 다녀와 내일이면 사라질 가게에 들렀다. 단골이라고 하기엔 민망한 가게다. 그저 가끔 들르던 가게였고, 닫는다 한다. 맥주를 두어 잔 마시고, 출근했다. 날씨는 추웠고 손님은 없었다. 이러다 나도 죽는 게 아닌가 내 가게도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했다.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나는 죽지도, 건물주가 당장 자리를 비워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죽지도 쫓겨나지도 않으려 아침 운동을 했고, 나름 열심히 일해왔다. 그런데, 죽은 녀석은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없어질 가게는 없어질 이유가 있었을까. 녀석은 나보다 좋은 사람이었고 내가 가던 가게도 내가 하는 가게보다 좋은 가게인 것 같은데.

그렇게 조금 일찍 퇴근했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술에 쩔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목소리의 전말을 파악한 참이었다. 어떻게 할까. 잘까. 아니면 상황을 정리하고 잘까. 어느 쪽이건 어떤 것도 해결해주지 않겠지만, 전화를 걸었다.

방금 통화한 사람입니다. 혹시 택시 하시는 사장님이신가요.
그렇수다.
아, 카카오 택시 때문에 전화를 했던 기록이 있는 것 같네요.
아. 그렇소?

그리고 그는 잠시 횡설수설하다가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연락이 끊긴 아들과, 죽은 부인과, 사업의 실패와. 하여 가끔 모르는 번호를 보면 전화를 한다는 이야기와. 혹시나 연락이 끊긴 아들의 전화일까봐 그렇다고 한다. 그는 내 나이를 물었고 하필이면 나는 그의 아들과 비슷한 연배였다. 그는 우는 목소리로 신세 한탄을 계속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싶었다. 빌어먹을, 나도 울고 싶은 기분인데. 짧지 않은 신세 한탄의 끝에서 그는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다. 그러자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소설이면 좋겠다. 이 정도라면, 좋은 소설은 되지 못할 지라도, 그럭저럭 재미난 이야기이지 않은가. 내가 이 정도의, 그럭저럭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혹은, 내게 며칠간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소설 같은 이야기면 좋겠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9-24 15:27)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9/03/25 02:04
수정 아이콘
힘내요 우리.
명란이
19/03/25 02:4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세인트루이스
19/03/25 03:21
수정 아이콘
기묘하고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사악군
19/03/25 06:46
수정 아이콘
토닥토닥..
지니쏠
19/03/25 07:28
수정 아이콘
힘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홍삼모스키토골드
19/03/25 07:51
수정 아이콘
그란 날이 있지요. 잘 읽었습니다
도들도들
19/03/25 09:51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 오랜만이라 반가운 맘에 클릭했어요. 종종 올려주세요.
복슬이남친동동이
19/03/25 09:55
수정 아이콘
가끔 일상 속에서 남의 존재, 남의 사정이 확 다가오는 일이 있죠.. 헥스밤 님도 위로 받아가세요.
마담리프
19/03/25 10:04
수정 아이콘
얼마전 저 세상으로 떠난 친구는 죽을 이유가 없고,
그보다 못한 나는 살아가는 이유가 없고.
뭔가 슬프고도 모순적이라 생각이 많이 지는 글이네요.
19/03/25 12:25
수정 아이콘
소설이었으면 하는…
잘 봤습니다.
콩탕망탕
19/03/25 14:42
수정 아이콘
기묘한 소설같은 느낌입니다.
WhenyouinRome...
19/03/25 19:27
수정 아이콘
소설이 아니라는게 정말 슬프고 아픈 일인거 같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078 [8] 제 첫사랑은 가정교사 누나였습니다. [36] goldfish19824 19/04/29 19824
3077 [기타] 세키로, 액션 게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다. [60] 불같은 강속구18689 19/04/15 18689
3076 [8]남편'을' 덕질한 기록을 공유합니다. [126] 메모네이드27135 19/04/24 27135
3075 연금술과 현실인식의 역사. [33] Farce18366 19/04/17 18366
3074 한국(KOREA)형 야구 팬 [35] 딸기18662 19/04/12 18662
3073 "우리가 이 시대에 있었음을, 우리의 시대를, 결코 지워지게 하지 않기 위해." [41] 신불해25286 19/04/11 25286
3072 거미들, 실험실 수난의 역사 [38] cluefake23549 19/04/12 23549
3071 제주 4.3사건에서 수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 유재흥 [32] 신불해16248 19/04/04 16248
3070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37] 미끄럼틀18527 19/03/27 18527
3069 e스포츠의 전설, 문호준 [47] 신불해19975 19/03/24 19975
3068 보건의료영역에서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의 역할과 미래 [61] 여왕의심복14675 19/03/26 14675
3067 어디가서 뒤통수를 치면 안되는 이유... [28] 표절작곡가27212 19/03/26 27212
3066 슬픈 일일까. [12] 헥스밤14256 19/03/25 14256
3065 [기타] 카트라이더 리그 결승을 앞두고 - 여태까지의 스토리라인을 알아보자 [14] 신불해11403 19/03/19 11403
3064 (안 진지, 이미지) 과몰입과 가능성의 역사. [22] Farce12925 19/03/21 12925
3063 그, 순간. [24] 유쾌한보살12803 19/03/19 12803
3062 나폴레옹의 영 비호감 느낌 나는 사적 면모들 [26] 신불해20843 19/03/15 20843
3061 [삼국지] 도겸, 난세의 충신인가 야심찬 효웅인가 [12] 글곰12691 19/03/13 12691
3060 대한민국에서 최고 효율과 성능의 격투기는 무엇인가!? [95] 에리_921648 19/03/12 21648
3059 나는 왜 S씨의 책상에 커피를 자꾸 올려놓는가? [40] 복슬이남친동동이18358 19/03/11 18358
3058 새 똥을 맞았습니다. [61] 2214047 19/03/08 14047
3057 16개월 아기의 삼시덮밥 시리즈 [45] 비싼치킨21515 19/03/07 21515
3056 '이미지 구축' 과 '스토리텔링' 의 역사에 대한 반발 - 영국의 역사 [14] 신불해12451 19/03/05 1245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