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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08/30 16:14:01
Name happyend
Subject 누가 그들을 벌주는가
1.

고려 문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 봄에 일식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일식은 예보되지 않았습니다. 궁궐은 발칵 뒤집혔고 마침내 어사대가 나서서 담당 관리의 파직을 주장하게 됩니다.

당시 일식담당 천문관리는 태사국 소속 유팽과 유득소였습니다. 임금은 용서하기를 희망했으나 어사대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죠. 결국 잘못의 책임을 물어 관직에서 쫓겨납니다.당시로서도 그리고 이후의 관례로 보아도 제법 큰 처벌이었습니다. 곤장을 피곤죽이 되도록 맞는 경우는 있지만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었거든요.거기에다 태사국 소속 관리는 전문직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문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로 전 임금인 현종때도 처벌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 그때의 직접적인 원인은 월식을 예보했으나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현종때는 상황은 좀 특수했습니다. 거란과의 접전이 벌어질 때였으니까요. 3번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나라를 재정비하는 와중에 태사국의 일식예보는 이미 두 번이나 틀려버렸습니다. 두 번이나 일어나지 않은겁니다.

태사국은 지금으로 치면 기상청과 천문연구원을 합한 업무를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되어야 하는 전문직이라는 점에선 기상청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고려시대는 점성술이 가장 번성했던 시대라 처음 천문기상관련 기관은 태복감이 전부였습니다. 유명한 최지몽을 비롯한 점성술사가 이 기관을 지배했죠. 이름그대로 하늘을 관찰해서 점치는 기관입니다.
이후 농업중심적 왕권국가가 되면서 태복감은 사천대로 이름을 바꾸고 태사국이 분리되어 나옵니다. 사천대는 하늘과 관련된 일, 그러니까 시간이나 점성술관련 일을 맡고, 태사국은 기상관련일과 역법, 즉 달력과 일월식의 업무를 맡게 됩니다.)


일식이 예보되었으나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것은 중앙집권국가를 표방하는 고려로서는 매우 큰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일식과 월식은 예보된 날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왕은 신하들의 축하를 받기도 했습니다. 예보된 일식과 월식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다행스런 일이라서 태사국 직원들은 징계를 면한 듯 합니다.

그러나 현종을 결정적으로 화가 나게 한 것은 월식이 예보되었으나 일어나지 않은 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중국에서 달력을 받아와 보니 두 나라간 달력이 한달이나 차이가 나버렸습니다. 현종이 화를 낸 것은 이렇게 거듭된 계산착오에 대한 경고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고려의 천문관리들의 실력으론 이 오차를 보정하긴 만만치 않았거든요.

그런데 문종때의 태사국 관리도 이런 과학기술력의 차이를 극복못하고 오보를 하고 맙니다. 하지만 그 두사람은 밥줄이 끊어지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단 한번 오보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벌을 받은 것이지요. 그까닭은 그가 한 오보의 차원이 현종때와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현종때는 단지 일어나지 않을 것을 일어난다고 한 것이지만, 문종때의 오보는 일어난 일식을 예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식이나 월식은 중앙집권적 국가에선 국가적 재앙으로 취급했습니다. 이것이 예보되면 일해와달을 구해낸다는 구식행사를 합니다. 이 의식은 하늘이 노해서 벌어지는 일이라 여겨서 죄인처럼 왕은 흰옷을 입고 모든 관리들도 소복을 입었습니다. 해가 사라지기 시작할때부터 다시 나타날 때까지 북소리가 울리고 그동안 왕과 신하들은 해를 향하여 두 손을 잡고 다시 밝아지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구식행사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일식과 월식의 예보는 정확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일식이 벌어져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왕위에 오른지 일년도 되지 않았을 때였죠. 불길한 기운이라 느낄 수밖에 없었고결국 태사국관리는 그 책임을 져야만 했습니다.

이미 고려인들은 일식과 월식은 계산만 잘하면 예보가 가능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예측이 전혀 불가능한 천재지변과는 달랐습니다. 어사대의 주장은 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일식과 월식은 음양의 규칙이므로 계산이 틀림없으면 그 변화를 알 수 있는데 그 관직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어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으니, 어찌 대번에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계산이 정확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어사대의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시로선 정답은 아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예보가 잘못된 경우가 숱하게 나왔습니다. 우주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한 시헌력이라는 역법이 만들어진 뒤에서야 정확해지기 시작한 것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병자호란 뒤까지도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우주에 대한 생각이 고대인의 주장에서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험에 따라 계산한 역법으로는 오차가 반드시 생기게 마련입니다.

거기에다 고려시대 사용하는 역법은 당나라에서 만들어 신라로 들어온 선명력입니다. 이미 오차는 심각한 수준이 되었죠. 과거의 역법이란 기하학적 방정식으로 계산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항성과 행성들의 위치를 하늘의 좌표에 표시합니다. 그래서 동양은 서양과 달리 사계절 언제어디서나 일정한 오늘날의 스탠다드 좌표와 같은 적도좌표계를 사용했습니다.이래야 추적이 가능하거든요.

이렇게 추적된 항성과 행성들의 위치를 적경과 적위를 가지고 쭉 나열하다보면 일정한 규칙이 생깁니다. 이것을 표로 만들어 놓고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처음에는 오차가 미미하다가 나중에는 그 오차가 너무 커져버리게 되는 거죠. 지금이야 초기조건만 바꾸고 다시 컴퓨터를 돌리면 되겠지만 당시로선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합니다.

거기에다 변수도 오차가 있었죠. 태양의 일회전주기값은 100년만 지나도 몇일정도의 오차는 나는 값이었으니까요. 선명력이 이때까지 쓰이고 있었다면 적어도 300년가까운 시간이 지난 것이니 오차는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니 태사국관리들이 억울한 면은 있었죠. 문종도 그런 형편을 이해한 듯합니다. 관대한 처분을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요. 하지만 어사대가 누굽니까? 어떨때는 검찰이 되기도 하고 어떨땐 감사원이 되기도 하고 어떨땐 조선일보가 되기도 하는 존재였죠.

결국 어사대의 요청대로 두명의 태사국관리는 옷을 벗었습니다. 일식의 오보는 왕에 대한 하늘의 벌. 그렇다고 왕이 옷을 벗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문종은 어질고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고려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임금답게 합리적인 군주였나봅니다. 보다 근본적인 대책에 대해 고민한 거 보면 말이죠. 태사국 관리를 벌주는 것은 매우 쉬운 대책입니다만, 그것은 예보의 정확성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이미 낡은 역법이 모든 것의 원인이었던 것이죠.

몇 년 뒤 왕은 태사국에 새로운 역법의 제작을 명령합니다. 이에따라 김성택이 십정력, 이인현이 칠요력, 한위행이 현행력, 양원호가 둔갑력, 김정이 태일력을 지었습니다. 이 달력들이 기록상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최초의 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달력으로 이듬해의 재앙을 막았다고 하는데, 이듬해에는 혜성이 출몰했고 일식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을 훌륭히 예보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종 때 만든 달력은 순수한 의미의 역법은 아니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름에 이미 둔갑이란 말이 들어간 것으로 보아 주술서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죠. 아마 당시 고려 천문학 수준으로는 개력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십정,칠요,현행,태일은 모두 천문학적 용어들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한 교정달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현종때부터 벌어진 태사국의 비극도 끝이 나게 됩니다.

**덧붙이는말

올해는 유난히 자연에 대한 겸허함을 많이 배우는 듯 합니다. 엄청난 녹조, 무더위, 그리고 태풍...
이 세가지 기상현상은 언제나 있었지만 올해 더 유난스럽고 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은 이것들 모두가 서울과 관련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위정자들이 몸을 떨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류의 분노는 당장 표출되지 않고 잠재해있다가 서서히 에너지를 모아 한순간 열대성저기압 즉 태풍으로 변신하는 ‘잠열’과 같은 것이니까요.
이에 대해 과거에는 늘 임금은 스스로 몸을 낮춰,금식을 하거나 반찬가지수를 줄이거나 심지어 소복을 입고 자연에 빌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이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예보하고, 그래서 대처하게 하고, 사후에 피해자에 대해 구제하고 위로할 뿐이죠.

그런데도 이런 천재지변에 올 여름 더 국민들이 휘둘렸던 것은 왜일까요?

오늘 조선일보의 ‘기상청 조작’관련 기사는...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 미묘합니다. 데이터 조작은 그것도 국가기관에서의 조작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일벌백계해야 합니다. 용서할 수 없죠. 과학자로서도 공직자로서도....



개인적으로는 ....여러가지 이유로, 기상청의 무능보다는 (내부의)정치적 이유의 조작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___________
(혹시해서 덧붙이는데요...조작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는 얘기입니다......기상청 내부의 문제는 언젠가 해결좀 해야한다고 생각하기도 해서....다른 기관보다 더 능력치가 커져야 된다고 봐서요. 어떻든 제일 좋은 결말은 조선일보의 뻘짓이었다이긴 합니다만...조선일보가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저는 조금은 알거 같아서요.)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9-1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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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란시느
12/08/30 16:26
수정 아이콘
뭐, 천재지변은 어디까지나 천재지변이겠죠. 그걸 다 아는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것이고, 안다해도 막을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일테고요. 이번 일은 일단 기상청에서도 반론이 나왔고, 어느쪽이 옳을지 판단하는건 비전문가로서 쉽지 않으니 유보하렵니다. 정치니 뭐니 이런건 나중에 생각하더라도요.
happyend
12/08/30 16:36
수정 아이콘
제가 말하고자 한 정치는 다른 거라서....괜히 함부로 말하기 그래서 뭉뚱그려 '정치'라고 말했더니 오해의 소지가 크네요.죄송합니다.
타마노코시
12/08/30 16:31
수정 아이콘
조작이라고 보기 아직 그런 거 같은데요..
happyend
12/08/30 16:36
수정 아이콘
결론이 나긴 할까요?흠.....
루크레티아
12/08/30 16:44
수정 아이콘
세상이 바뀌려니 하늘도 변화를 주려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전통적으로 급격한 자연의 변화 현상은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어서 이용하려는 정치적 세력의 머리굴림이라고 여겨져 왔는데, 요즘 같아선 진짜 하늘이 뭔가 바꿔버리길 소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happyend
12/08/30 16:52
수정 아이콘
그렇게 따지면, 사실 제일 겁날 사람은 김정은?....
루크레티아
12/08/30 17:27
수정 아이콘
제발 좀 그랬으면 싶기도 하고요...;;
Je ne sais quoi
12/08/30 17:18
수정 아이콘
정말 역사는 반복되는군요. 잘 읽었습니다!
12/08/30 17:32
수정 아이콘
늘 잘 읽고 있습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수준의 디테일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문장의 호흡에, 늘상 편안하게 감탄만 하고 갑니다. PGR그만와도 되겠다 싶다가도 또 몇몇 분들 글들보면서 차마 탁 끊질 못하네요^^

날씨 예보는 이제는 좀 맞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런 부분이 좀 민영화 돼서 공무원 냄새 좀 걷어냈으면 좋겠는데 막상 민영화하면 삼성화재가 덥썩 물어가서 날씨 정보가지고 돈을 벌어가려나요^^? 관료제는 썩고 자본주의는 독과점으로 가고 이건 뭐^^
AraTa_JobsRIP
12/08/30 18:11
수정 아이콘
오랜만입니다~
잘 읽었어요~
저글링아빠
12/08/30 19:00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12/08/30 20:37
수정 아이콘
happyend 님의 글은 늘 술술 읽힌단 말이죠 신기하게도......
잘 봤습니다. 생각해볼게 많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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