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난 이 폐태자의 이야기 중에서 지금 내 상황에 썩 어울리는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그 폐태자가 어느 날 자기 방에 못질을 해버렸다. 궁내부원들이 보고 놀라서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내 미래가 밖에 있으니 밖으로 가겠다. 그러나 내 소중한 과거는 여기에 있으니 죽기 전에는 돌아오겠다. 과거 없이는 미래도 없으니, 그 때까지는 이 방은 불침이다.”
그리고 궁궐 밖으로 뛰쳐나갔고 그 날로 귀족원에 의해 폐위당했다.
역시, 어떠한 방랑자에게도 돌아올 곳은 있는 법이다. 뛰쳐나온 집이라든지, 고향이라든지, 설령 고아라 해도 그의 소중한 기억이 있는 장소는 있을 것이다. 그곳을 평생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으로 방랑을 계속할 힘을 얻는다. 거꾸로 말하자면, 자신의 과거를 못질하는 것은 험난한 미래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 이영도, 『드래곤 라자』中
“옛 영광에 취한 자는 죽은 자다.”
- 최연성
Tiving 스타리그 4강을 앞둔 인터뷰에서 이영호의 약점을 묻는 질문에 대해 정명훈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영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때문에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1경기에서, 정명훈이 세 부대에 육박하는 드랍쉽을 사냥하는 동안에도 이영호는 끝끝내 드랍쉽을 고집했고 패배하였다.
헌데 말이다. 그렇다면 정명훈은 어떤가?
이영호는 스스로를 믿을 줄 안다, 그리 말하는 정명훈은 스스로를 믿지 못한단 말인가?
답하련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랬을 것이라고.
인크루트의 4강에서, 최연성의 손을 뿌리치고 사용했던 한 번의 바이오닉이 처참한 실패로 끝났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을 의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크루트의 결승에서, 송병구에게 화려하게 패배하여 T1과 그 팬들의 기대를 배신했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을 의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택용을 3:0으로 추락시키고 그 많은 비난과 비아냥을 들었을 때, 나는 그가 자신을 의심했을 것이라 생각하며
박카스의 4강에서 이제동의 4드론을 알고도 막아내지 못했을 때, 나는 그가 다시 자신을 의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빅파일의 4강에서, 자신이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을 짜낸 그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나는 마침내 그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겨우 이 정도인가? 나는 나 혼자서는 그 무엇도 될 수 없는가? 지금 내가 선 이 자리는, 내가 있어도 되는 자리인가?
끊임없이 의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명훈은 스스로를 믿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국본이란 이름을 기껍게 여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승리의 공을 항상 임요환과 최연성에게 돌리면서도, 자신이 그들의 뒤를 잇는 자이며 테란의 주인, 인간들의 군주이노라 말하지 못했다.
그는 인형, 그는 마리오네트였다.
제국의 옛 영광을 마치 인형극을 하듯 이따금씩 재현하기 위한, 그는 인형이었다. 그가 인크루트의 로얄로드를 오를 때를 기억한다. 최연성과 임요환의 배역을 맡아 무대 위에 올랐을 때를 기억한다. “죽은 최연성이 산 대인배를 잡았다” 말하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정명훈의 연극에서 최연성과 임요환을 찾던 관객들을, 그리하여 그 가소로운 인형극이 실패로 끝나자 침을 뱉으며 자리를 뜨던 그 관객들을 기억한다.
정명훈은 그 때부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 방에 못질한 채 궁궐 밖을 나섰다. 인형은 적어도 인간이 되기 위해 가면을 썼고 국본이라 불리기보다 테러리스트라 불리길 원하며 스스로 그림자가 되었다.
그는 임요환과 최연성의 그림자에 숨었고, 김택용의 그림자에 숨었고, 이영호의 그림자에 숨었다. 바투의 4강, 08-09의 광안리, 박카스10에서 그는 가면을 쓴 채 제국의 적들을 베었고, 그 때마다 다시 그림자로 되돌아갔다.
단언컨대, 최연성과 임요환은 정명훈을 그림자 밖으로 끌어내려한 적이 없다.
그들은 정명훈을 위해 참으로 많은 것을 선물했다. 그닥 뛰어나지 못했던 그의 바이오닉을 대신해서 메카닉의 저그전을 선물한 것이 최연성이고, 리쌍을 격침시킨 센터 배럭-전진 팩 따위의 비수를 벼려주었던 것은 임요환이었다. 정명훈은 이영호에 비했을 때 참 많은 것을 갖지 못하고 난 테란이었고, 최연성과 임요환은 그를 채워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들은 그들의 비열함과 무도함, 나약함과 불완전함, 교활함과 뻔뻔함, 그 모든 것을 정명훈에게 투사하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건대, 최연성과 임요환은 정명훈을 그림자 밖으로 끌어내려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오직 정명훈 뿐이다.
오로지 정명훈 뿐이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웃는 것이다.”
-임요환
왜 사람들은 13년 전 임요환을 ‘황제’라고 불렀을까.
그 시절의 사람들은 왜 오늘날 우리가 이영호를 부르듯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임요환은 그 등장과 함께, 이 세계의 역사를 갈아엎었고, 이 판의 역사에서 거의 절반 가량의 시간 동안 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는 사상 최강의 제국을 건설했고, 네 조각 하늘의 일각을 차지한 하늘의 주인이었으며, 위로는 ‘마법사’ 기욤부터 아래로는 ‘신’ 이영호에 이르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그의 칼을 받았다. 일천의 전장을 가로질렀고, 일백의 적장을 아로새겼으며, 마법의 가을과 마지막까지 싸운 자였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를 ‘황제’라고 - 인간들의 군주라고 불렀다.
결국 그 이름처럼, 그는 마법의 가을과 세 번 싸워 세 번을 모두 패했고,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결국 신화로 끝나지 못했다. 그는 끝끝내 패배자인 채 새로운 바다를 건넜다.
인간들의 군주로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마쳤다. 그는 최후에 웃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분해하면서,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는 그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이다. 그것이, 인간들의 군주라고 불렸던 자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래. 정명훈이 그토록 두려워했고,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던 제국의 모습이란 그런 것이다.
홍진호가 천재적 저그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기록은 거의 없으나, 임요환은 그렇지 못했다고 묘사하는 기록은 의외로 많다. 한빛 - 코크의 임요환은 뛰어난 컨트롤과 행운을 가진 게이머였으나, 그와 견줄만한 이들은 김정민과 임성춘을 비롯하여 테란과 다른 종족에 몇 명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초대의 군림자, 인간들의 군주가 된 까닭에 대해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첫째로, 그는 남보다 지기 싫어하는 게이머였으며. 둘째로, 그런 그가 홍진호와 만났기 때문이다.
홍진호의 천재성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맹렬한 공격성이 아니라, 살을 주고 뼈를 끊는 천부적 감각에 있었다. 이 무렵 홍진호가 즐겨 쓰던 전법은 상대의 주력을 피해 상대의 본진 혹은 핵심 멀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상대는 회군하여 방어하거나, 아니면 엘리전을 벌인다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전자일 경우 홍진호는 입힐 피해를 모두 입히고 또다시 방어 병력을 생산하며, 후자일 경우 저그의 빠른 생산력을 통해 방어에 집중하고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이것이 홍진호의 승리공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요환은 - 오직 임요환에게만은 그것이 통용되지 않았다. 그는 SCV를 동원하고 건물을 띄워가며 필사적으로 방어하면서, 더욱 더 강한 카운터를 날렸다. 상대의 뜻대로 따라가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으니까.
그것이 임진록이다. 피투성이 인간들의, 피 튀기는 크로스카운터의 향연, 그것이 십 수년 간 사람들을 매료시킨 임진록의 정체 - 낭만 시대의 핵이다.
정명훈은 이영호의 멀티가 맵 전역으로 뻗어나갈 때도 개의치 않았고, 이영호의 벌쳐와 드랍이 자신의 멀티를 물어뜯을 때 적의 본진으로 진격했다. 수천의 자원이 쌓이는 동안에도 전투에 집중했으며, 그래서 끝끝내 이영호를 바스러뜨려 놓았다.
언제나 필요한 것은 적의 목에 한 치 칼끝이 닿기 위한 여력 뿐.
그것을 정명훈이 알고 있었다.
“예상은 예상일뿐이고, 예상대로 된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와 주셨겠습니까?”
- 정명훈
제국의 유산, 인간들의 군주로서 등에 져야하는 것은 불굴이란 두 글자뿐이다.
그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시간, 전설, 자기 자신, 신과 같은 적이라 하더라도, 끝끝내 불복하여 반역하는 것, 피투성이가 되고 살점을 뜯겨도 끝끝내 굴복치 않고 적의 목을 향해 한 치 칼끝을 두려움 없이 내찌르는 것.
설령 그 칼끝이 닿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이, 알량한 아집과 오기, 만용과 고집을 부리며 싸워나가는 것이 인간들의 군주가 갖는 자격이다.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사람들이 낭만 시대를 사랑한 이유, 임요환을 끝끝내 사람들이 인간들의 군주로서 남겨두고 싶어 했던 까닭이다. 필멸을 긍정하지만 불복하는 자, 그들이 인간들의 군주이다.
정명훈은 그 모든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콩라인의 후계자이며, 가을의 전설의 두 번째 적수였다. 임요환과 홍진호, 위대한 양각의 좌절을 잇는 자인 자이기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출발이, 그의 과거가, 그의 현재가 이미 그러하다. 패배도 좌절도 알지 못하는, 스스로를 의심해본 바 없는 신과 같은 영웅들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그렇기에 미래 또한 그만이 가지리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그들이 우리에게 질문했다.
군림Flash인가, 반역FanTaSy인가?
그리고 인간Terran은 마지막에 반역을 선택했다.
그 결과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고,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에 잠깐 당황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았다.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묻건대, 신과 같은 NaDa에게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던 것은 누구였으며, 마침내 그를 물러나게 만든 것은 또한 누구였는가?
이제동과 김택용의 ‘본좌’를 빼앗은 것은 누구였으며, 이영호의 ‘최후’를 빼앗은 것은 누구였는가?
신과 같은 택뱅리쌍의 처형인 : 마지막 재판관은 누구였는가?
첫 번째는 황제이다. 두 번째도 황제이며, 그렇기에 세 번째도 황제이다. 제국은 반역하는 자가 만들었고, 반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제 우리 황제, 인간들의 군주가 돌아왔으니, 임요환의 사람들과 최연성의 사람들 모두가 당신의 이름을 노호할 것이다. 제국이 당신을 위해 창을 쳐들고, 발을 구를 것이다. 마지막 순간의 앞에, 약속을 지켜 돌아온 당신을 위해, 제국이 노래할 것이다.
돌아온 폐태자이며, 공포Terror의 주인이고, 시대 살해자.
해묵은 못들을 뜯어내고 당신 옛 방의 문을 열라.
제국의 여명과 황혼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비로소 우리는 최후에 웃으리라.
마지막 전장에서 정명훈이 이영호를 무너뜨림으로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다.
- 이영호의 다전제 13연속 1세트 승리 기록 종료
- 이영호의 다전제 10연승 기록 종료
- 스타리그 사상 최초 4회 우승자 탄생 좌절
- 임요환 이후 햇수 11년 만에 전승 결승 진출자 탄생
- 임요환, 스타리그 최다승 기록 달성
- 스타리그 사상 최초 2연속 결승 리매치
- 정명훈, 스타리그 테테전 연승 신기록 (13연승)
- 정명훈, 이영호와 공식전 상대전적 동률 (9:9)
- 정명훈, 스타리그 결승 진출 횟수 공동 2위 기록 (1위 임요환, 2위 박성준과 동률)
- 정명훈, 택뱅리쌍 4명 중 3명 상대로 3:0 셧아웃 기록 달성
- 스타리그 최후의 테란, 정명훈.
- 데일리e스포츠의 <트윗문답: 최연성편>을 참고하였습니다.
- Kimera님의 <황제와 폭풍의 여명>을 참고하였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8-06 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