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자취방 근처에 실내낚시터가 생겼다. 고기를 낚으면 무게를 재어 주인이 미리 정해둔 범위에 들면 해당하는 상품을 주는 식이었다. 나 같은 초보도 얼마든지 팔뚝만한 고기를 낚을 수 있었다. 괜히 옛날 생각이 나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이거 엄청 잘 잡히네요. 던지면 물어요.” 아버지는 무심하게 말했다.
뭔 재미여?
흔히 충청도 사투리가 어눌하고 순둥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내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은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나는 상당히 무뚝뚝한 편이라고 느낀다. 아마도 지리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영동은 아래로 추풍령을 넘어 경상북도 김천과 구미로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전라북도 무주와 맞닿아있다. 그래서 충청도 특유의 느릿한 말투는 그대로인데 대화의 호흡은 급한 편이라 말할 때 문장의 맥락을 많이 생략한다. 수박 한 통 잡숴보라고 가져다주면서 “션찮은겨.”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서는 이웃집 아저씨의 목젖에는 “6월 말에나 수확해야하는 수박의 꼭지가 상해서 조금 일찍 따본 건데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네.”라는 설익은 말이 머물러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가 내 안에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당황스럽다. 아버지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한 적이 없고 나는 그저 살면서 어머니께서 내게 문득문득 던져주었던, 아버지에 관한 구체적이지 않은 이야기의 파편들을 잊지 않고 한 조각씩 맞춰오기만 했다. 나는 지금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아버지라는 사람의 맥을 어설프게나마 짚어보는 셈이지만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마디마다 커다란 여백이 존재한다. 그러니 나는 그저 아버지는 충청북도 영동 사람이고, 나도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끊임없이 변명하면서 두서없는 글을 쓴다.
내가 다섯 살이 되기까지 우리 가족은 소방서 옆에 살았다. 소방공무원인 아버지의 직장 옆이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매일 소방차를 보면서 자랐다. 단 한 번 소방차 조수석에 타본 기억도 있다. 그 붉고 육중한 몸체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 올라서지도 못할 만큼 높았다. 하지만 읍내로 이사한 후에는 소방차는커녕 아버지조차도 매일 보지 못했다. 아주 오랫동안 아버지는 소방서에서 24시간을 보내고 다음날은 집에서 쉬는 생활을 반복했다. 설이나 추석은 3일 연휴 중 이틀을 쉬거나 혹은 명절 당일만 쉬고 전후로 소방서에만 있어야 했다. 나는 큰아버지 댁에서 차례를 지낼 때 아버지가 없어도 좋으니 차라리 이틀을 쉬길 바랐다. 그 이틀마저도 비상이니 뭐니 하면서 수시로 소방서에 들락거려야 했다.
그래서 세 살 터울의 여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쉬는 날 어디 나갈 낌새가 보이면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부터 신었다. 그 즈음의 기억이다. 아버지와 함께 스쿠터를 타고 셋이서 장을 보러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버지는 서둘러 스쿠터 운전대 가까이 앉고 그 뒤로 여동생과 나를 바짝 붙여 앉혔다. 그리고 입고 있던 기다란 나일론 코트 뒷자락을 우리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아버지는 반은 서고 반은 앉은 듯 엉거주춤한 자세로 코트에 양팔만 끼운 채 앞섶이 풀어헤쳐진 상태였다.
섬유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기운이 내 피부에 닿았다. 동생은 새카만 아버지의 등에 폭 기대었다. 나는 동생을 양팔 안에 넣고, 두 손으로는 아버지의 코트 자락이 너풀거리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아버지가 물었다. “좁나?”, “아뇨!” 그러자 드르릉, 털털털털… 50cc의 붉은 스쿠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스쿠터 바퀴 아래로 익숙한 아스팔트의 주름이 스쳐갔다. 나는 그 세밀한 결을 눈으로 더듬으며 우리가 집으로 향하는 길을 떠올렸다. 시장 입구에서 쭉 가면 큰아버지께서 하시는 만두집이 나왔는데 그곳이 로터리였다. 거기서 우회전하면 가장 큰 문구점이었고 더 가면 동네에 유일한 오락실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으로 서점이 보일 때 좌회전 하여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는 굴다리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면 군청으로 가는 언덕길이 보인다. 언덕길은 군청을 휘감으면서 더욱 가팔라지는데, 그 끝에 자리한 두 동짜리 작은 아파트에 우리 집이 있었다.
빗길에 셋이나 태운 스쿠터는 아주 천천히 달렸다. 로터리를 막 지날 때였을까,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캄캄한 코트 안에서도 그 웃음이 우리를 향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햇빛이 아닌 비를 가리기 위해 썬캡을 쓴 아버지의 등줄기에는 나와 내 동생의 머리가 혹처럼 불뚝했다. 아버지는 비를 맞으며 걷는 낙타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이왕이면 망토를 휘날리며 날아가는 슈퍼맨처럼 보이면 좋으련만. 나는 아버지 등 뒤에 바짝 숨었으면서도 괜스레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부끄럽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철없던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유난히 작아보였던 때를 떠올려본다. 어느 가을, 읍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의 양쪽 주차장에 수많은 주점이 들어섰다. 고향에서 해마다 열리는 축제의 야시장이었다. 그 날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대하소금구이를 먹었다. 아버지는 지인이 거쳐 갈 때마다 소주를 한두 잔씩 곁들였고 금세 얼굴이 얼큰하게 달아올랐다. 자리에 아주 오래 앉아있었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아버지의 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무얼 하고 사느냐는 아주 뻔한 질문으로 시작한 대화는 중간 중간 실없는 이야기가 끼어들 때를 제외하고는 결국 다시 먹고 사는 문제로 돌아갔다. 아저씨는 자꾸 신이 났고 아버지는 자꾸 말수가 줄어들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보며 어머니는 아버지가 승진도 못한 마당에 잘 나가는 친구를 만나서 그런 거라고 일러주었다. 어른의 말이었기에 나는 얼른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것이 내가 목격한 아버지의 첫 실패라는 것만은 눈치로 알았다.
물론 그것은 정말 작은 실패였다. IMF가 어쩌구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구호를 하루에 한 번 이상 보거나 들었던 때였다. 텔레비전은 연일 무너지는 회사와 가정과 그리고 가장에 대한 슬픈 고발을 반복했다. 그러나 우리 집은 IMF 이전이라고 딱히 잘 살았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후 급격하게 가세가 기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 즈음 나는 학교 가정환경조사서에 우리 집을 ‘중산층’으로 표기했다. 최하층, 하층, 중산층, 상층의 구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린 나는 평범하면 중산층인 줄 알았다. 아버지가 치과의사였던 친구를 제외하고 매일 같은 옷을 입는다고 놀림 받았던 친구를 제외하면 다 고만고만한 중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일상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은 아버지의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몰랐다.
고백컨대 나는 머리가 자랄수록 아버지에게 존경보다는 연민을 느꼈고 동시에 답답하게 여겼다.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능숙하게 표현하지 못 하는 성격이었다. 하다못해 따뜻한 애정을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로 바꾸어 던지는 요령도 없었고, 단단한 말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을 누르는 경우도 드물었다. 말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내 눈에 아버지의 묵묵함은 억척스럽지만 영리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사춘기인 내가 버릇없이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따져 물을 때에도 아버지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저 “그랴.”하고 말 뿐이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내 고향의 말투였다. 나는 곧 인구 5만 명을 지키기도 버거운 소도시를 지겨워했고, 동시에 아버지로부터도 정서적으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보기도 했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등장인물에 투영하는 방식이었는데, 스스로 아버지에 대해 깊이 알고 있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만든 인물이 알고 보니 아버지와 닮지 않았더라도, 잠깐 죄책감을 느낄지언정 영원히 나만의 비밀로 묻어두면 될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얕은 이해를, 그러나 더욱 이해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딴에는 영리한 방법으로 풀어보려던 셈이다. 그 글을 얼마나 썼더라. 중년과 청년 남성이 어떤 술집(실제 읍내에 있던 술집의 이름을 살짝 비틀었다)에서 이야기하는 장면을 인쇄해보니 A4용지 한 쪽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그것을 잠깐 텔레비전 위에 두었는데 그 사이 아버지가 집에 들어왔다. “네가 쓴겨?” 아버지의 웃음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나는 질색을 하며 종이를 낚아챘다. “아니에요.” 이후에 그 글은 마저 쓰지 않았다.
때때로 아버지에게 “저랑 탁구 한 게임 치실래요?”라고 묻기도 했다. 내 딴에는 꽤 성의가 있는 접근이었다. 사춘기 이후로 아버지와 무얼 하는 것이 많이 어색했으니까. 탁구를 굉장히 잘 치는 아버지는 그러나 단 한 번도 나를 상대해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내게 오로지 스윙 연습만을 권했다. “손목은 움직이지 말고, 팔꿈치 그대로 왼쪽 눈썹까지, 그냥 지나간다고 생각하고.” 아버지는 내가 연습하기 좋게 공을 넘겨주었지만, 내가 친 공을 다시 받아치지는 않았다. 탁구공은 아버지에서 내게로, 그리고 나에게서 허공으로 날아가기만을 반복했다. 그건 아버지와 나의 관계와 닮아있었다.
아버지는 종종 작은 나를 차에 태우고 읍내를 벗어났다. 금강 줄기를 따라 낚싯대를 드리울 곳이 많았다. 우선 개천의 작은 다리 위에 내 자리를 잡아준 아버지는 그 아래 더 험한 곳으로 내려가 여러 개의 낚싯대를 설치했다. 콘크리트 난간보다도 키가 작았던 나는 난간 가운데에 뚫린 구멍으로 개천과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내 발밑에서 저 앞으로 흐르는 물결을 따라가면 아버지가 있었고 그보다 더 멀리에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붉은 볕이 알게 모르게 물살을 거스르는 동안 아버지는 수시로 나를 올려다보곤 했다.
주로 아버지를 통해서만 낚시를 접했던 나는 민물낚시란 원래 별다른 성과도 없이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것인 줄로 알았다. 기다림 끝에 무엇이 있었더라. 언젠가 까만 밤이 덮은 강가에서 나는 아버지가 멋지게 낚아 올리는 월척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잘 시간이었는데도 나는 아버지의 등 너머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야광찌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졸린 눈을 끔벅할 때마다 연초록빛은 물에 잠길 듯 말 듯 위태로운데, 그러다 어느 결에 두 개로, 세 개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곧 내 주변에 금방이라도 꺼질 듯 연약한 빛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처음으로 본 반딧불이였다. “이거 반딧불이에요! 엄청 많아요!”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기억 중 하나다. 우리는 그 날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음에도.
돌이켜보면 기다림의 결실이 꼭 날카로운 바늘 끝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무디고 둥글어 보였던 아버지의 중년도 꼭 무언가를 낚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이를 어느 정도 먹고 나서야 아버지나 가장이라는 존재가 왜 모날 수 없는지를 깨닫는다. 치열하고 고된 것이 으레 그렇듯이.
지금 아버지 차의 트렁크에는 낚싯대가 없다. 대신 내가 대학을 진학한 이후 비어있는 방에 기타와 악보가 놓여있다. 휴대전화로 음악도 자주 들으시는 모양이다. 예비군 훈련도 받을 겸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더니 아버지는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를 사용할 때 불편했던 것들에 대해 물었다. “로그인부터 해야죠.” 아버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20년 전과 같다. 우리 집에 처음 인터넷을 설치했을 때 나와 내 동생을 앉혀놓고 우리 가족의 이니셜을 따서 만든 그대로. 나는 아버지가 원하는 노래를 재생 목록에 정리해드렸다. 구형 휴대전화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내 마음은 조약돌
비바람에 시달려도
둥글게 살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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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추천만 올라가는 글들이 다 그렇듯이 참 뭔가 댓다는게 쉽지 않습니다.
먹먹한 감상이나마 공유하고픈 욕구는 가득하나,
어울릴만하게 써 내려갈 어휘는 부족하고,
글쓴분께 표현하고픈 감사 한 줌,
좋은 글 솜씨에 대한 부러움 반 줌,
자책 약간 존경 약간 섞여서 복잡한 마음으로 응어리지다가,
결국 추천 버튼만 클릭하고 뒤로가기 일상이네요.
(수정됨) 뿌듯해져서 자꾸 보다가 감사하다고 더 표현하고 싶어서 댓글 수정하게 되네요. 사실 6년 전에 쓴 글이라 많이 부끄러운데, 좋은 감상으로 읽어주셨다니 진심으로 맘이 즐겁습니다. 글 안 쓴 지 꽤 됐는데 예전에는 이런 댓글 하나하나가 기뻐서 글을 썼었지 싶기도 하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글빨?쩐다고 하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거죠?
음.. 생각할수록 아버지란 존재는 특별하죠.... 참 많은 감정이 떠올라요
엄마,와이프,자식들에게 느끼는 감정들과는 결이 좀 다르달까..
슬픈 발라드를 어지간히 불러봐도 눈물이 안 나는데 싸이의 '아버지'는 불러볼 때마다 울컥하게 돼서 도저히 부를 수가 없더라고요...
다른 의미로 저에겐 '노래방금지곡'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