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버지는 무척 부지런하십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는 매일 아침 운동을 하시는데 장대비가 쏟아지지않는 한 매일 등산을 하십니다. 주말에도 집에 있으면 심심하시다고 주말마다 밖에 나가시는데 그 덕분에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산, 바다, 강, 계곡 등등 안가본 곳이 없어요.
등산 후 발아래 도시들을 바라보며 싸가지고온 컵라면과 김밥먹기, 하산 후 배가 고파지면 산 아래 아무 도토리묵 집에 들어가 도토리묵+파전 먹기 가 제일 기억에 남네요.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개미만한 건물들을 가르키시며 저기는 무슨 동 무슨 동 하며 알려주셨죠.
제가 어렸을때는 밖에서 취사가 가능했었어요. 바다, 강, 계곡 갈때는 무조건 가스버너와 텐트를 챙겨가셨죠.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있으면 00아 밥먹어라! 를 외치세요 크크크크크크크 그럼 저는 가서 냠냠하고 삼겹살을 먹습니다. 그 맛은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죠 크크크크크
계곡에 있는 돌틈사이를 뒤지시다가 가재가 보이면 제 손에 올려주시고 돌위에 갈색의 긴 소라를 보여주시며 이건 다슬기라는 거야 하고 알려주셨죠.
바다에 갔을때도 돌틈을 뒤적 거리면 게, 성게, 고동 등등 반찬통에 담아다가 아버지를 보여드리면 어이구 우리 00이가 많이 잡았네~ 하며 웃어주셨죠.
하루는 저녁 6시에 갑자기 아버지가 바다에 가자고 하셨어요. 어머니는 잔뜩 짜증이 났지만 해맑게 웃고있는 저를 보며 아무말도 없이 가스버너와 밥과 삼겹살을 챙기셨습니다. 바다에 도착하고보니 너무 어두워서 후래쉬에 의지하며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엄마...ㅜㅜ
덕분에 저는 그런 기억들이 너무나도 많아요. 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죠. 그런데 커서 친구들과 대화를 해보니 유독 제가 그런 경험들이 많았던거죠.
그 시절.. 저희집은 차도 없었어요. 오롯이 부모님께서 텐트, 가스버너, 먹을거리를 들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제 손을 잡고 다녔던거죠. .
언젠가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제가 다섯살 무렵 새벽 다섯시 마다 저를 깨워 두분의 일터로 데리고 가셨다고.. 그 당시 부모님께서는 옷감을 재단하는 일을 하셨는데 그 먼지 날리는 곳에 어린 딸을 새벽같이 깨우고 데려가는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어요. 기억 난다고 ...
그 일터를 놀이터삼아 뛰어다녔고 아버지가 자투리 옷감으로 별모양, 동그라미 모양, 세모, 네모 모양으로 오려주시면 풀로 종이에 붙이며 놀았고 가끔 오는 점핑 말타기를 탔었고 회사앞 중국집 짜장밥이 참 맛있었고 그 모든 기억들이 재밌었고 행복했었어요! 라구요. 두분은 말없이 웃으셨지만 여전히 미안하셨나봐요. 그래서 주말마다 어디로 데리고 가셨는지도 모르죠.
그치만 전 진심으로 행복했어요. 그 모든 기억들이 제가 힘들때마다 버틸수있게 해주거든요. 나는 온전히, 너무나도 많은 사랑을 받았구나 그리고 받고 있는 사람이다 라고 깨닫게 해줘요.
다섯살 아들이 있는 지금 그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행복한지 알려주고 싶어서 주말이 되면 하다못해 집앞 공원이라도 나가려고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아이가 생기면 부모님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래요. 힘들지만 우리 아들도 저처럼 행복한 기억을 가질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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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의 소소했던 기억을 공유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때 그장소에 가있는마냥 감정이입되고 힐링됩니다. 인생의 행복이 무엇이라 정의내리는건 각자의 기준에 따른것이겠지만 그때의 잔잔한 물소리, 눈을 간지럽히는 나뭇잎 사이의 햇살이 평생의 기억으로 남는거겠죠. 다시는 돌아갈수 없기에 더 애절하지만 내가 할수있다면 이 기억과 행복한 느낌을 내리 전달하고싶은 마음이 있을겁니다. 그 느낌을 알고있는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공유할수 있다면 더이상 바랄께 없겠죠. 서로가 함께 있어 감사한 이 순간.. 그러면 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