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1/07/05 00:19:31
Name dlwlrma
File #1 14.png (18.1 KB), Download : 63
Subject [일반] [14]선지 해장국


21년 7월 5일부로, 정확히는 가득 채운 13년 그리고 14년차의 시작입니다.
아래글처럼 학생이었던 제가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네요.
뜨거운 여름, 장마철이지만 모두 힘내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
우리 아빠는 사장님, 엄마는 사모님이었다.

해장국집의.

가게특성상 24시간 영업이라 12시간씩 2교대를 하셨으며,

엄마 혹은 아빠 한 분은 어둠을 지키기 위해, 낮에는 늘 주무시고 계셨다.

당시 어렸던 누나와 나는 배가 고파질때면 주무시던 부모님을 깨워 밥을 달라고 졸랐고

부모님은 단 한번의 싫은 내색 없이 밥을 차려주시곤 묵묵히 돌아가 잠을 청하셨다.

누나는 선지 해장국을, 나는 뼈 해장국을 좋아했다.

#
평소와 다름 없이 학교를 마치고, 혹시라도 잠드신 엄마가 문여는 소리에 깰까 조심히 문을 열고 까치발로 방에 들어왔다.

당시 디아블로2가 유행이었으며, 어린나이지만 알리바바와 탈라셋을 끼고 앵벌이를 하며 trade-xx방의 이곳저곳을 누리고 다녔다.

몰컴인지라 키보드, 마우스 소리가 방안에 퍼지는 것이 무서웠고,

엄마가 깨는 즉시 컴퓨터를 끄고 방에 들어가 숙제를 해야했으므로... 안들키고 독차암을 모으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9시가 훌쩍 넘은 시각, 저녁도 잊은 채 열중했지만 한가지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집은 너무 조용했으며, 엄마의 코고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심증만 있던 와중 따르릉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병원이었고, 누나가 많이 아프다고 한다.

"저녁은 식탁위에 국 데워먹고... 엄마는 오늘 못갈거 같으니까 내일 학교 늦지않게 가고..."

처음 느껴보는 올나잇이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알겠다 하고 전화를 끊자마자 컴퓨터로 달려가 새벽 늦게 까지 게임을 하다 지쳐 잠든 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향한곳은 학교가 아닌 삼성병원 장례식장 102호였다.

#
검정 옷을 입혀주는 엄마의 손은 떨렸으며, 단 1초도 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고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유하진 않지만 형편에 맞게 스스로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갑진 않아도 누구보다 서로를 아껴주는 가족이었다.

누나는 우리 가족의 윤활유이자 가장 큰 톱니바퀴였다.

나에게 있어서는 부모님과 친구 사이의 그 어떤 존재였으며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똑똑했다.

'누나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돼??' 라는 질문에 소피의 세계를 건내주던 누나였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1 다음 000이 종로 출생 이라는것도 누나가 알려줬었다.

하지만 이젠 국화꽃들 사이에 환히 웃는 누나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같이 울었다.

조문객들은 울먹이며 나의 손을 잡고, 엄마를 안으며 펑펑 울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누나가 쓰러졌던 약국 앞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고, 무쏘를 무서워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일선물로 준 TATE 반팔티셔츠를 못버리고, 그 뒤로 디아블로를 하지 않는다.


#
며칠 전, 우리 부부에게 새 생명이 찾아왔다.

산부인과를 나오는 길, 해장국 집에 들러 선지 해장국을 먹던 와중에 울컥 차올라 펑펑 울어버렸다.

아직 내 마음 속 중학생인 누나가 조카를 안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뭐가 그리 급해 빨리 갔냐고, 고모가 친조카 유모차는 사줘야 하지 않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마도 미안..하다고 했겠지.

다 큰 남자가 우는게 민망했는지 아내는 그렇게 감동적이냐고 물었지만, 아무말도 할 수 없이 눈물이 나와 고개만 끄덕였다.

나에겐 너무나도 소중했던 생명이 떠나가고, 찾아왔다.

보낼 사람은 보내고, 찾아올 사람을 맞이해야 한다던데

나는 그냥 차곡히 하나씩 위에 쌓아가고 싶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무언가
21/07/05 01:58
수정 아이콘
먹먹합니다.. 잘읽었습니다 ㅠㅠ
진산월(陳山月)
21/07/05 02:44
수정 아이콘
저도 손위 누이가 있었다는데 너무 어렸을 때인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기억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본문을 읽으니 가슴이 너무나 아프네요.

기운내시고, 이쁜 아기 건강하게 잘 키우시길 기원합니다.
임시회원
21/07/05 04:4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할러퀸
21/07/05 06:59
수정 아이콘
제게는 소울메이트라 할 수 있는 동생들이 있는데..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참담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 별을 위해서
21/07/05 07:30
수정 아이콘
생명이 있는 글이군요
잘 읽어습니다.
지니팅커벨여행
21/07/05 07:35
수정 아이콘
출근길에 눈물 겨우 참았네요
21/07/05 10:2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일찍 떠나보낸 친동기는 좋은 일이 있을 때 더욱 생각나더군요...
가노란 말도 못다 이르고 떠난 형제...가슴 속 응집된 그리움과 슬픔은 서서히 옅어지긴 하더군요.
예쁜 아기와 행복한 나날, 기원합니다.
21/07/05 11:41
수정 아이콘
읽고 울었습니다.
떠나간 누이와, 찾아온 아기와 함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봄
21/07/05 13:39
수정 아이콘
선지해장국 좋아해서 들어왔는데 이런 글이 ...ㅠㅠ 진심이 듬뿍 담긴 글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21/07/05 14:08
수정 아이콘
저랑 같은해에 가입하신 동기분이시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아빠되신것 축하드려요.
21/07/05 16: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21/07/05 23:29
수정 아이콘
월요일 밤 감동적인 글이었습니다. 행복하세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2424 [일반] 코로나19와 공존해야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거 같습니다. [64] 김은동17955 21/07/06 17955 22
92423 [일반] 아 차 사고 싶어라 2 (투싼 vs 스포티지) [82] 길갈17124 21/07/06 17124 2
92422 [일반] 다시 확진자 1000명이 넘었네요 일반탭입니다.. [410] 김경호27681 21/07/06 27681 12
92421 [일반] 이소룡 딸, '아버지 비하' 타란티노 감독에 "지겨운 백인 남성" [44] 及時雨19002 21/07/06 19002 3
92420 [정치] 슬슬 미친 사냥개에 재갈을 물리는 여야 정치권 [100] 나주꿀25195 21/07/06 25195 0
92419 [일반] 14차 글쓰기 이벤트 결과 안내입니다. [16] clover9537 21/07/06 9537 9
92418 [일반] 안보면 인생 손해인 웹툰-당신의 과녁 [31] lasd24117237 21/07/06 17237 7
92417 [정치] 백신 접종률 순위가 일본과 바뀌었습니다 [55] 네이비크림빵16083 21/07/06 16083 0
92416 [일반] 정말 괴물같은 드라마 괴물(노스포) [27] 이쥴레이13389 21/07/06 13389 0
92415 [정치] 또 하나의 가족, 애완동물과 관련 정책 이야기들 [27] 나주꿀11608 21/07/06 11608 0
92414 [정치] 보고 있으면 뭔가 웃긴 대선 후보 지지도 [106] 일간베스트19372 21/07/06 19372 0
92413 [일반] 보고 있으면 뭔가 웃긴 맛집유튜버 [35] 판을흔들어라20915 21/07/06 20915 4
92412 [정치] 뉴스버스가 김건희씨 모녀 관련 의혹을 상세보도했습니다. [281] echo off22638 21/07/06 22638 0
92411 [일반] [역사] 원도우11이 출시되기까지 / 윈도우의 역사 [36] Its_all_light21737 21/07/05 21737 11
92409 [정치] 건강을 이유로 재판 못나간다던 전두환,혼자서 골목산책 [60] TWICE쯔위16883 21/07/05 16883 0
92408 [정치] 국민의힘 대변인 선발 토론배틀이 끝났습니다. [29] 피잘모모18131 21/07/05 18131 0
92407 [일반] 포경수술과 성기능과의 상관관계 [113] 그리움 그 뒤22489 21/07/05 22489 26
92405 [정치] 대선시즌이 오니 여당내에 시빌워가 벌어지더라 [80] 나주꿀20862 21/07/05 20862 0
92404 [일반] 코로나 병동... 벌써 반년 [57] WOD19966 21/07/05 19966 121
92403 [일반] [14]선지 해장국 [12] dlwlrma14248 21/07/05 14248 69
92402 [정치] 지금의 한국 좌익이 오버랩되는 '파시즘의 특성들' [62] 이는엠씨투18337 21/07/05 18337 0
92401 [일반] 디디추싱 개인정보 문제로 중국정부 앱 제거명령 [53] 맥스훼인15712 21/07/05 15712 2
92400 [정치] 북한군 실 병력은 50만명? [121] Aimyon22231 21/07/04 22231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