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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산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과 횡성군 안흥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1120m 산의 능선이 거칠고 봉우리가 높아 장흥면에서 보면
스핑크스같이 산이 우뚝 솟아있고 모양이 특이한 산이다. 바로 이곳 사자산 입구에 적멸보궁 법흥사가 있다.
원래 절 이름은 자장율사가 적멸보궁을 만들때 흥녕사라고 이름 붙였지만 이곳은 소실되고 다시 짓고 소실되어 한동안은 거의 절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천년정도 소찰로써 명맥만 존재하다가 1902년에 비구니 대원각이 중건하면서 법흥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내가 적멸보궁들을 다니면서 깨달은 건데 자장율사가 정말 풍수지리에도 능하구나라고 생각이 든것이 어떻게 한국의 수많은 지역과 산중에서 가장 빼어난 산의 빼어난 위치에 적멸보궁을 지었다는 게 여기 사자산 법흥사에서도 느껴졌다.
사자산은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여러 산의 절에서 수행했지만 이곳 사자산만큼 사계의 변화를 힘있게 표현하는 산이 없다고 할 정도로 뚜렷한 계절을 표현하는
산이라고 한다. 우리 일행이 사자산법흥사를 갔을때는 봄이었는데 사자산은 군데군데 아직 겨울티가 채 없어지지 않았지만 초록빛 생명력이 온산을 물들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5대적멸보궁을 만든 자장율사는 어떻게 이렇게 명산 명당을 기가 막히게 찾아서 지었을까?
예전에는 교통도 불편하고 지도도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았을텐데 오직 부처님의 힘으로 남들이 무시하는 여자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영원히
수호하고자 하는 일념이 얼마나 강했길래 이렇게 힘들게 돌아다니면서 절을 지었을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멸보궁이 있는곳은 자연 그자체로 훌륭하고 가볼만하다고 생각이 든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안타깝게도 법흥사가 우리일행이 갔을때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이 공사중이어서
적멸보궁을 갈수가 없었다. 법흥사에서 마중나온 스님은 미안했는지 대신 법흥사에 있는 비공개로 된 패엽경(고대 인도의 불교의 가르침을 나뭇잎에 기록한 초기불교의 기록)과 여러가지 법흥사가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보게 해주었다.
패엽경과 여러 불교보물들은 종무실 한쪽 책상에 앉아있는 세콤 보안요원에게 말해서 종무실 안쪽 문의 세콤을 해제하고 들어가니 갑자기 영화에서나 나오는 최첨단 보안시설로 보호가 되어있는 박물관 같은곳이 나왔다.
조명도 영화에서 보던 그런 밝은 노란색조명이었고 나는 무슨 미션임파서블의 탐크루즈가 침투한 땀한방울의 무게가 떨어져도 보안시설이 발동하는
그런느낌의 빡빡한 보안시설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분명히 절의 공간으로 들어갔는데 이런곳이 나와서 공간이 주는 느낌이 신기했다.
적멸보궁은 신라시대때부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서 수많은 재물을 공양했고 그 때문에 도적떼와 반란 전쟁이 났을때 높은 순위의 타겟이 되어 그때문에
여러번 파괴되고 불타고 약탈되는경우도 많았는데 이곳 법흥사도 그때문에 1000년동안 거의 폐사지처럼 있다가 비구니 대원각이 중건해서 규모가 다시 복원되었다. 적멸보궁들은 다른 절과 비교할수없을 정도로 공양과 시주가 들어와서 지금도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온다고 했다.
이곳 법흥사의 최첨단 보안시설도 돈을 전혀 아끼지 않고 보안수준을 최고급으로 투자한것이 느껴졌다.
특히 법흥사의 스님은 패엽경을 매우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게 느껴졌는데
스님이 패엽경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기원전 400년 부처님이 생존해있을때 80세 무렵에 바이샬리 지역에서 대기근으로 체력이 많이 약해져있을때 누군가 공양한 상한 음식을 먹고 극심한 설사와 복통에
시달리다 결국 제대로 누울수 없을정도로 몸이 약해져 허리가 너무 아파 옆으로 누워서 시간을 대부분 보냈다고 한다.
부처의 열반이 거의 거까워졌을때 늘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던 아난다가 뒤에 나무로 가 혼자 묵묵히 눈물을 흘렸다. 아난다는 스승을 따라다닌지 25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는데 이제 스승마저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막막해서 눈물을 흘린것이다.
이걸 알아챈 부처는 아난다에게 내가 죽고 난 뒤 얼마 뒤에 너는 깨달음을 완성할것이다라고 했다.
여기까지 들은 나는 눈물이 나왔다. 늙은 스승을 모시고 홍수가 나고 대기근이 닥쳐서 스승의 밥을 구하러 대기근에서 여기저기 동냥을 구하러
다닌 아난다가 25년동안 믿고 의지한 큰 스승이 그만 병이나 몸이 쇠약해져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을때 마지막까지 스승에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나무뒤에서 우는 그 아난다와 그런 아난다를 애석하게 여겨 마지막까지 아난다 너는 내가 죽고 난 후에 반드시 깨달을것이다라고 말해주는 늙고 병든 부처가 눈 앞에 그려지는것이었다.
얼마뒤 부처는 마지막 유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 비구들이여
조건 따라 움직이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방일하지 않음으로 너희들이 해야할일을 완벽하게 하라. 라는 말을 하고 대열반에 드셨다.
큰 스승이 열반한 이후 불행하게도 종단은 여러세력 여러사람들로 분열이 심했으며 서로 자기의 말이 부처님의 말이다라고 갈등이 생겨났고
결국 제자 마하가섭이 주도하여 1차 경전 결집대회를 열어 부처님의 말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려고 회합을 열었는데 거기서 서로 들은 것을 크로스체크하는
방식으로 최대한 부처님의 말을 그대로 옮기려고 했다.
그래서 이와같이 들었다 ,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나는 언제 어디서 이와같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때 같이 들었던 제자가 확인함으로써 그러면 부처님이
남긴 말로 인정하자 이런 방식으로 부처님이 남긴 말을 최대한 후대에 전파하려고 하였다.
그때는 기원전 400년정도라 아직 기록수단이 없어 말에서 말로 옮기는게 전부였던 시절이라 무려 500년을 그렇게 이와같이 들었다로 시작한 암송으로
후대에 전파하게 된것이다. 다행히 500년의 암송기간을 거쳐 드디어 야자잎에다가 기록할수있는 방식이 생겨났고
그것이 최초의 나뭇잎에 기록된 불경이다.
이 법흥사의 최첨단 보안구역에 있는 패엽경은 그 최초의 기록된 불경이 전해진것이다.
어쩌면 현대판 적멸보궁은 이렇게 돈을 많이 들여서라도 최첨단 보안시설로 지키는게 더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패엽경과 오래된 불상 불화들을 우리 일행만이 관람하는 특권을
누린뒤 회장보살과 우리는 아쉬움에 법흥사를 한바퀴 산책하기로 했다.
적멸보궁입구에 사자모양을 한 돌조각에서 약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회장보살이 약수맛이 좋으니 마시고 가자고 했고 때마침 목이 마르던 찰나에
바가지로 약수를 마셨는데 물맛이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느껴져서 맛이 좋았다. 집에서는 왠만하면 코카콜라나 웰치스포도맛을 마셔야 맛있는 음료를 먹었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 이 법흥사의 약수는 목마를 찰나에 마셔서 그런지 코카콜라보다 웰치스보다 더 맛있다고 느껴졌다.
영험한 사자산 속에서 흘러서 나오는 물의 정수가 이 법흥사의 약수다라고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점심이 되기 전이었는데 날씨는 따뜻했으며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유독 공기가 맑아서 법흥사주위를 걷는데 봄날의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나풀나풀 거닐며 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법흥사주위를 걷다가 적당히 그늘진 동산에 돌로 의자에 다 모여앉아서 회장보살의 강연을 들었다.
회장보살이 말했다.
불교의 8고중 하나인 원증회고는 사람들이 그저 세상 살면서 직장생활하면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과 헤어져서 또다른곳에 가서
또 다른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고 하는것이라고 생각을 많이 하지요. 그것도 원증회고이지만 그런 인연은 내가 스스로 헤어짐을 결정할수 있지만
내 피붙이나 1촌관계처럼 아무리 미워도 쉽게 돌아설수 없는 관계도 있습니다. 그럴때 유일하게 바뀔수 있는건 미워하는 상대방이 아니라 미워하는
상대방에 대한 나의 마음만이 유일하게 바뀔수 있습니다. 그것을 찬찬히 잘 관찰해야 합니다. 쉽게 헤어질수 없는 관계이니 어쩔수 없이 내 마음을
조절하는 수 밖에요...
이때의 나는 대학졸업이후 계속해서 방구석에서 인간관계를 두절한채 게임과 인터넷만 하느라 강하게 미워하는 사람이나 원수가 없었다.
다만 사람자체를 만나는것을 두려워해서 아무리 게임을 하더라도 식사할때는 딱 식사시간을 지키고 새벽에 몰래 나와서 도둑밥먹고 방에 들어가는 행동을
하지말라는 아버지의 말에도 반감만 조금 가지고 지키지 않을뿐 미워하는 사람이나 원수가 존재하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대단한게 낮에는 방에서도 일체 나오지 않고 새벽에 아무도 없을때 몰래 나와서 밥을 후다닥 먹고 다시 방문을 잠근채 게임에 몰두하는 나를 위해
꼭 밥이랑 국을 부엌에 항상 준비해놓았고 반찬도 꼭 챙겨놓았다)
그래도 굳이 시간을 되돌려 가장 근래에 미워했던 사람이 있다면 대학다닐때 동기인 A였다.
A는 취미가 헬스인데 몸은 살이 많이 쪄서 덩치가 크고 키가 컸는데 나는 같은 나이인데도 왠지 A가 나를 무표정으로 쳐다보면 괜시리
내가 잘못한것이 있지 않나 목소리가 절로 가늘게 나오곤 했는데 A는 늘 나를 이용하거나 다른 여자후배나 여자 동기들 앞에서 나를 놀리거나 하대하는
말을 해서 말이나 티는 내지 않았지만 한번씩 그런 일을 당하게 될때마다 며칠을 속으로 끙끙 앓았지만 다시 학교에서 만나면 쓴웃음으로 넘기곤 했었다.
사실 대학다닐때 교양과목을 정하거나 시간표를 짤때도 A와 안겹치게 하는것이 듣고싶은 과목보다 더 우선이었다.
A와 같이 대학을 다닐때는 A가 그렇게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이고 나날이 손상되는 내 자존심과 마음속으로는 수도없이 보복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번도
맞대응을 못하는 나약한 내 용기에 더 괴로움도 느꼈었다.
그런데 이곳 아름다운 사자산의 동산에서 봄날의 시원한 바람에 슬쩍 들려오는 산새소리 이름모를 꽃향기를 맞으며 그 A를 떠올리고 A의 악행을 아무리 증폭
시켜도 해사시하게 자꾸 흩어지고 마는것이었다. 실로 이곳은 아름다운 봄날의 룸비니동산이다.
시간이 지나서 기억이 재편집되어 과거가 아름답게 저절로 미화되는것일까?
아니면 A와 더이상 만날 일이 거의 없어져서 마음이 저절로 평온해진것일까?
이곳 사자산 동산이 주는 공간과 봄날의 시간의 힘인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법흥사 주위를 여기저기 구경하기로 하고 나는 살짝 땀이 나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였다.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다 거울을 보니 문득 대학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A가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고 일부러 여러 여자동기나 후배들앞에서 나를 살짝 모욕주거나 놀릴때 맞받아치지 못하고 그냥 끄응 앓다가
도저히 못참겠다 싶어서 A에게 따끔하게 맞받아치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서 괴롭히는 사람에게 맞받아치기나 만만하게 보는 사람에게 만만해보이지 않기
이런것을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거울을 보며 일부러 눈에 힘도 주어보고 욕도 연습해보고 하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의 얼굴은 어딘가 기가 눌려있고 내 스스로의 모습이 미워보이고 싫었는데... 지금 여기 법흥사 화장실에서의 내 얼굴은 최근에 집에서 거울을 볼때의 내모습과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듯 온얼굴에 행복감이 번져있는 미소를 띄고 있어 신기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지?
나는 화장실을 나가서 천천히 걷는 일행에 합류했고 우리는 징효대사탑비를 보러갔다.
징효대사는 법흥사의 옛이름인 흥녕사를 크게 발전시킨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탑비는 그가 입적한뒤 신라 왕실에서 시호를 내리고 비문을 짓게 하였으나
나라가 혼란기에 접어들어 44년뒤인 고려 혜종원년이 되어서야 비가 지어졌다.
탑비는 징효의 출생에서 입적할때까지의 행적이 적혀있다.
탑비를 보러가는데 한눈에도 범상치 않는 노승이 종이컵을 들고 탑비에서 내려오고 있었고 회장보살과 일행들은 다들 길 한편옆으로 비켜서서 합장하며 인사를 했다. 노승은 걸음이 빨라서 나는 인사 타이밍을 놓쳐 노승이 내려가고 나서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하게 되었고 회장보살은 나에게 말했다.
"큰 스님에게 인사할때는 계단 위에서 인사하면 안되고 밑에서 인사를 하는게 예의입니다."
회장보살의 말투는 왠지 모를 화가 실려있는 듯 했다. 일행들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노승이 뒤돌아서 우리를 보며 살짝 웃으며 말했다.
"커피가 참 달다."
신기하게도 갑자기 분위기가 싸악 바뀌었다. 회장보살과 일행은 다시금 합장을 하고 노승은 가던길을 갔다.
잠깐 냉랭했던 분위기도 다시 따뜻한 봄날로 바뀌었다.
그 노승의 분위기와 말 말투 아우라를 어떻게 글로 표현할수 있을까?
적멸보궁 여행을 하면서 또 회장보살의 적멸보궁에서의 깊은 인연으로 내가 살면서 절에 가서 그저 경치나 구경하고 대웅전에서 수박겉햩기로 갔다 오던것과
달리 정말 대단하다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 잠깐 스쳐지나가는 노승도 그중 하나이다.
뭔가 말한마디 표정하나로 주위의 공기를 바꾸고 집중하게 하는 그런 신기한 힘이 있는데 살면서도 그 노승같은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후회하게 되는데 이름이라도 알아둘껄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이 높은 고승 그런 것을 역사속 글에서 많이 보곤 하는데 실제로 만나면 저 노승이 바로 그런 덕이 높은 고승의 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흥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이름모를 노승이 자꾸 생각났다. 절은 우리 인생의 END LINE 바깥에 있는 세상 같았는데 조금만 깊이 그 안을 들여봐도
거기도 또다른 사람사는 세상이고 뭔가 더 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