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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12/24 07:54:49
Name 라쇼
Subject [일반]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최후의 날 (수정됨)
에이로쿠 8년(1565년) 5월 19일 스산하게 비가 내리던 밤이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기거하는 니죠어소에 불길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죠. 미요시 요시츠구와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중심으로한 미요시 삼인방의 군사들이 쇼군의 거처를 급습한 겁니다.

아무리 쇼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해도 하늘 아래 어느 누가 감히 천하제일인의 목숨을 노릴 수 있었을까요. 하극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혼란스러운 전국시대라 하여도 미요시 삼인방이 저지른 에이로쿠의 변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만행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못한 뜻밖의 야습에 수비가 제대로 이뤄질리 없었습니다. 니죠어소의 근위병들이 갑옷도 챙겨입지 못하고 용감하게 적들과 맞서 싸웠으나, 병력의 차이를 메꿀 수는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미요시의 반란세력들은 외성과, 내성을 지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머무는 처소까지 들이닥칩니다. 절체절명. 도피하지 않으면 꼼짝 없이 죽고마는 상황이었죠. 쇼군의 가족과 가신들이 일단 니죠어소를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자고 설득하였으나, 요시테루는 거절합니다. 비록 미요시 패거리들에게 조종당하는 허수아비 쇼군이었으나, 자신은 일본 전국을 다스리는 정이대장군. 최후나마 쇼군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장렬히 싸우다 죽을 심산이었죠. 자기가 죽고나면 후사를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맡길 것을 부탁하고, 요시테루는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사세구를 남깁니다.

5월의 비는 이슬인가 눈물인가, 두견새여 내 이름을 구름 위까지 전해다오(五月雨は 露か涙か 不如帰 我が名をあげよ 雲の上まで)

처소에서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요시테루는 갑옷을 입고 쇼군으로 지내는 동안 수집했던 고금의 명검들을 하나씩 뽑아 바닥에 꽂아둡니다. 늘어선 명검이 비운의 쇼군의 묘비였으며, 적들의 피가 원통하게 죽어갈 자신의 원혼을 달랠 공양물이 될 것이었죠. 요시테루는 천하오검의 필두 도지기리 야스츠나를 허리춤에서 빼어들어 양손으로 거머쥡니다. 그의 주변을 미카즈키 무네치카, 오니마루 쿠니츠나, 쥬즈마루 츠네츠구, 오오텐타 미츠요  같은 나머지 천하오검들이 호위병처럼 지켜서고 있었습니다.

언제 적병이 달려들어도 단 칼에 베어버릴 임전태세를 마친 쇼군을 공격해 온 것은 창칼이 아닌 화살. 장지문을 뚫고 화살들이 날아왔으나 쇼군은 귀신도 벤다는 명검 도지기리 야스츠나로 화살을 베어냅니다. 명검과 갑옷으로 무장한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화살따윈 통하지 않았습니다. 검호 쇼군이라 소문난 요시테루의 무용을 두려워한 미요시 패거리는 화살을 쏴서 요시테루를 죽일 심산이었으나 그건 오산이었죠. 피와 시체가  강을 메우는 인명피해를 감수하지 않고서는 결코 검호 쇼군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부오오- 전장의 고둥소리가 울려퍼지며 악에 바친 함성이 주변을 가득 메웁니다. 요시테루의 목을 취하는 자에게 성주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미요시 요시츠구의 야비한 목소리도 들립니다. 고작 내 목이 성 하나 값어치 밖에 안 된단 말인가! 요시테루는 분노하며 정안의 자세를 잡습니다. 양대 검성 중 하나 츠카하라 보쿠덴의 유파 신토류의 자세. 온 정신을 칼 끝에 집중하여 일검에 거암을 베어버릴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쇼군, 각오!" 선두에 달려온 적병이 창을 찔러오자 요시테루는 일촌간파의 움직임으로 창을 피하고 적의 머리를 상단으로 내려칩니다. 수박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요시테루의 도지기리 야스츠나가 적병의 머리를 투구채로 갈라버렸습니다. 놀라운 무용! 이것이 츠카하라 보쿠덴이 자랑하는 신토류의 오의 히토츠노 타치(一之太刀)였습니다. 일검에 전심전력으로 살의를 담아 반드시 죽여버리고야 마는 필살검. 츠카하라 보쿠덴에게 사사받은 히토츠노 타치의 비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옷을 입었든, 방패를 들었든 그 어떤 방어구라도 귀기서린 도지기리 야스츠나의 칼날이 번뜩이면 무 썰리듯 두 동강 나버렸습니다. 요시테루의 일격필살의 검이 정확히 하나씩, 또 하나씩 목숨을 앗아가자 적들의 공세가 느슨해지는게 느껴집니다. 검술 수련에 매진해온 지난 날은 헛되지 않았다. 가슴 벅찬 보람과 함께 사지에서 살아 나갈 수도 있겟다란 희망이 샘솟자 요시테루는 용기 백배하여 더욱 기세가 올라갑니다. 적 병사들이 겁을 먹어 주츰하자 요시테루 쪽이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러던 찰나 사각에서 쇠사슬이 날라옵니다. 사슬이 칼에 칭칭 감기고 요시테루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적병들이 들이닥칩니다. 요시테루는 주저하지 않고 천하제일명검 도지기리 야스츠나를 손에서 놔버립니다. 검은 적을 베라고 있는 것. 너희들을 제사지낼 검은 얼마든지 있다. 요시테루는 다다미 바닥에 꽂아두었던 나머지 천하오검 두자루를 양손에 쥐고 원을 그리며 회전베기를 가합니다. 츠카하라 보쿠덴과 쌍벽을 이루던 신카게류의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전수해준 비검 월영(月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보름달을 보고 창안했다던 다대일의 상황에서 사용하는 검술이었습니다.

"나야 말로 천하제일, 천하무쌍!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다!"

전투의 희열에 사로잡힌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모습은 그야말로 야차 그 자체. 저 멀리 서쪽 약탈자들이 숭배하던 광전사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수라가 되어버린 검호쇼군은 접근하는 적들을 가차 없이 베어 버립니다. 베고, 베고, 또 베고 분노로 미쳐버린 쇼군의 칼날은 단 한 명의 적들도 용서치 않고 삼도천으로 보내버릴 기세로 휘둘려졌습니다. 전투가 지속될 수록 기세가 더욱 달아올랐지만 칼이 따라주지 못하자, 날이 나가버린 검을 던져버리고 새 칼을 뽑아 다시 적들을 죽입니다.

후방에서 전황 보고를 듣고 있던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안색이 어두워 집니다. 쇼군의 암살 계획을 꾸민 것은 다름아닌 자신. 고작 검술 따위 잡기에 심취한 사내 하나를 잡는데 수십, 수백의 인명피해를 내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겁니다.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악을 써대며 병사들을 독촉합니다. 멍청한 것들 고작 한 명을 두고 무슨 추태냐. 다다미를 들어라, 다다미를. 죽더라도 요시테루를 붙들어라, 붙들고 붙들면 저놈도 결국 인간 쓰러지고 말 것이야!

히사히데의 명령이 떨어지자 적들의 움직임이 달라집니다. 요시테루의 검을 피할 생각을 하지도 않고 다다미나, 방패등을 들고서 수로 밀고 들어옵니다. 요시테루는 젖먹던 힘을 다 짜내어 발버둥을 쳐봤으나 죽여도, 죽여도 밀고 들어오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인간과 다다미, 방패의 벽에 에워싸여버려 꼼짝도 못하게 되자 창날이 고슴도치 비늘처럼 빽빽하게 요시테루를 향해 찔러들어 옵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피가 다다미를 적시고 진홍색으로 물들입니다. 전신에 수십 곳의 자상을 입은 요시테루는 원통하게 숨을 거둡니다. 검에 살고 검에 죽었던 검호 쇼군의 최후였습니다.


















위 본문은 무로마치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최후를 맞이한 에이로쿠의 변을 제가 조금 각색해서 쓴 글입니다.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김이 새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다미에 명검 수십 자루를 꽂아두고 적을 베다가, 칼날이 나가면 바꿔들고 숨이 멎을때까지 싸웠다란 전승은 사실 에도시대에 작성된 소설 같은 이야기에요. 사실이 아니란 거죠.

16세기 일본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본인의 저서 '일본사'에서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최후를 기록해 두었는데, 검 대신 나기나타로 무장하여 미요시의 군사들에게 대항했다고 전합니다. 검호 쇼군의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장도를 들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하니 관우나 장비처럼 만인지적의 위용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검술에 많은 관심을 두었는데 양대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과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를 초청하여 검술 시범을 관람했다고 합니다. 두 검성에게 검술 지도를 받고 면허개전을 받았다 라는 설도 있긴한데 직접 모든 오의를 전수 받아 면허개전을 받았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네요. 미요시 삼인방의 눈치를 보느라 세력을 확대할 수 없었기에 자신의 몸이라도 지키고자 검술을 수련했던 쇼군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쨋든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그 비장한 최후 때문인지, 드라마나 만화 게임 같은 창작물에 종종 얼굴을 비추곤 합니다. 최고 권력자이면서도 검의 달인이었고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생애가 자못 매력적으로 비추어 졌는 지 현대 창작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셈이었죠.

제가 검호 글을 올리면서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분이 계셔서 몇자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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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beralist
20/12/24 08:19
수정 아이콘
검호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저도 참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이 양반 인생역경을 대략 요약하자면 최소한 오자양장 급의 무력을 갖춘 헌제이니... 신장의 야망 시리즈 잡을 때마다 늘 가장 먼저 플레이할 정도인데 이렇게 커뮤니티 글로 접하니 반갑습니다 흐흐;;

ps. 본문 내용과 관련해서는... 사실 요즘 일본 사학계에서는 요시테루 죽음에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관여하지 않았다가 정설입니다. 당시에 히사히데 입장에서는 요시테루가 죽어서 얻을 이득이 하나도 없었다고...
20/12/24 08:23
수정 아이콘
말씀하신대로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요시테루를 죽이는데 관여하지 않았다 쪽으로 학설이 바뀌었죠. 이미 쇼군을 죽이는 음험한 간신 이미지는 씌워질대로 씌워졌는데 히사히데 입장에선 엄청 억울할거에요 크크크크.
Liberalist
20/12/24 08:30
수정 아이콘
(수정됨) 해당 학설은 요즘 방영되는 NHK 드라마인 기린이 온다에서도 반영이 되어 있죠.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인공이다보니 아시카가 쇼군가의 분량이 꽤 있는데, 거기서의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제가 상상하던 요시테루 그대로였습니다. 흐흐;;

마쓰나가 입장에서는 뭐... 간신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게 어떻게 보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행적으로는 그냥 주군 눈에 들어 벼락출세한 유능한 문신 1 인데, 이 정도로는 난세에서 별달리 눈에 띌만한 캐릭터성을 갖기가 힘드니까요. 간신 이미지로 강렬하게 남은 덕택에 전국시대물 뭘 봐도 은근히 비중 높은 조역 자리를 차지하게 된게 다행 아닐까요 크크크
20/12/24 08:43
수정 아이콘
히사히데 이 양반은 최후도 워낙 강렬한지라 간신 이미지가 딱 어울리긴 하죠. 항복권고하는 노부나가의 사자한테 명품 다기 히라구모를 네놈 같은 촌뜨기에 주느니 부셔버리겠다 하고 화약에 불질러 폭사해버렸으니까요. 요즘 학설대로 유능한 문신 보다는 한 성깔 하는 간신 이미지의 히사히데가 더 멋지긴 합니다. 간지폭풍이죠 크크.
휴머니어
20/12/24 08:49
수정 아이콘
뭔가 배가본드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글이었습니다. 몰입력이 후덜하네요
Respublica
20/12/24 08:53
수정 아이콘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크크. 정말 글을 재미있게 잘 쓰시는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뒷산신령
20/12/24 09:36
수정 아이콘
멋있네요. 저시대이야기를 좋아하는지라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
20/12/24 11:15
수정 아이콘
크 좋은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참 멋있는 최후로 그려지는 인물이라
검호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입니다 흐흐
yeomyung
20/12/24 11:57
수정 아이콘
어떻게하면 읽기 좋은 글을 쓸 수 있을런지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영호충
20/12/31 22:37
수정 아이콘
재밌습니다. 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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