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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4/13 01:16:27
Name
Subject [일반] 사랑, 강함, 죽음에 관한 세 편의 시
새/심보선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아주 밝거나 아주 어두운 대기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달빛을 받아 은회색으로 반짝이는 네 귀에 대고 나는 속삭인다.
너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너는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가.

사랑해. 나는 너에게 연달아 세 번 고백할 수도 있다.
깔깔깔. 그때 웃음소리들은 낙석처럼 너의 표정으로부터 굴러떨어질 수도 있다.
방금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미풍 한 줄기.
잠시 후 그것은 네 얼굴을 전혀 다른 손길로 쓰다듬을 수도 있다.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러 번 만났다.
우리는 그보다 더 여러 번 사랑을 나눴다.
지극히 평범한 감정과 초라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사랑을.

나는 안다. 우리가 새를 키웠다면,
우리는 그 새를 아주 우울한 기분으로
오늘 저녁의 창밖으로 날려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웃었을 것이다.
깔깔깔. 그런 이상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눌 때 서로의 영혼을 동그란 돌처럼 가지고 논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정작 자기 자신의 영혼에는 그토록 진저리치면서.

사랑이 끝나면, 끝나면 너의 손은 흠뻑 젖을 것이다.
방금 태어나 한 줌의 영혼도 깃들지 않은 아기의 살결처럼.
나는 너의 손을 움켜잡는다. 나는 느낀다.
너의 손이 내 손안에서 조금씩 야위어가는 것을.
마치 우리가 한 번도 키우지 않았던 그 자그마한 새처럼.

너는 날아갈 것이다.
날아가지 마.
너는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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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김상혁

강함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비좁은 보행로를 걸어가는 권투 선수의
펼쳐진 왼손처럼, 건널목에 서게 되면 건널목만을 생각하는 머릿속처럼
무심하고 고양되지 않는다.
눈빛이 마주칠 때 무서운 건 무엇인가.
실제로 아무런 싸움도 나지 않는데

이렇게 등을 돌리고 누우면 강함은 너의 침묵 속에 있다.
고요함은 나에게 네가 울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눈빛이 마주치지 않는데 깜깜한데
내일의 너는 멀고 무더운 나라
낯선 이웃들이 자꾸 인사하는 어떤 문밖에 서서
우리의 침대를 태우고 있거나 그런 비슷한 종류의 모든 문밖에 계속 서 있을 것만 같은.
실제로 아무런 눈물도 흘리지 않는데
앞으로는 너의 교외가 슬퍼질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너에게 나는 웃는 사람인가.
네가 나에게 등을 돌릴 때 나는 너에게 강한가.
내가 주먹을 내지른 공간이 건너편 방의 침묵 속에 쓰러져 있다면
그것의 인내는 언제까지인가.
등을 돌리고 강해지는 우리들.

두려워도 상대의 눈에서 눈을 떼지 마라. 어쩌면 다음을 위한
이런 규칙을 깨야 할 때
사소한 거짓말을 시작할 때 나는
고요한 나에 대해 얼마나 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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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얼룩/이병렬

옆에서 심하게 울고 있는 사내가 있다.
살아야 하겠는 것

누구나 울 수 있는 면허를 가지고 있는 병실

바깥의 어둠이 저희들끼리 하도 몸을 감아서
어제인가는 옆 침대에 누운 나도 잠시 울었다.

어느 병실이나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깊은 밤
한 존재가 운다.
오늘 그가 심장의 무게를 많이 덜어냈으니 누군가 조용히 하라 해도 소용이 없겠다.

퇴원하고 찾은 바닷가,
한 노인이 앉아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주와 북어 한 마리 놓고
한 노인이 눈발 속에 눈물 속에 굳어 있었다.

얼룩도 아니고
고단한 것도 아니며
딱딱하여 불안한 것도 아닌
왜 눈물들은 모든 것의 염분인지

새들은 알까.
눈을 밟고 지나가면 자신들의 자국이 남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바다에 새 두 마리 어울려 춤을 추다 간 듯 보이는 발자국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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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시들을 소개해보았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각각의 시들에 제 나름의 추억들이 얽혀있어 읽고있으면 당시의 기분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저 역시 새를 키워본적은 없으며 같이 새를 키우자 속삭이던 연인과의 기억도 없습니다만
언제나 느끼며 되풀이하는 사랑의 허망함과 잔인함이 잘 드러나는 시입니다.
오붓한 분위기에 연인과 단둘이 앉아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사랑을 속삭일 때가 있는데
가끔은 그게 진심이 아닌것 같아 스스로에게 구역질이 날때도 있지요

군대 있을때 싸움이라는 시를 참 좋아했는데요
꼭 저 시를 제 상황에 대입하여 생각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닥치는 많은 인생사와 더불어 진정 강하다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게 도와준 시입니다.
결국은 갈망과 체념, 그리고 끊임없는 견딤 아닐까요..

마지막 시는 수능이 끝나고 자주 읽던 시입니다.
당시 대입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기에 스무살의 치기어린 감정,
무언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생각,
인생에서 큰 고꾸라짐을 겪었다는 한탄 등과 어우러져 생의 근원을 탐독하는 시가 끌렸던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았는데 여전히 좀 아린 감정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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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술생
20/04/16 22:13
수정 아이콘
참 좋은 시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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