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0/02/14 18:02:26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18세기 중국이 러시아에 파견한 사신단

1712년, 한 만주인 고위 관료가 러시아에 파견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툴리션(Tulixen)"으로, 팔기에 속하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었고, 강희제의 명을 받들어 몽골 사막과 시베리아 툰드라를 건너 러시아에 갔습니다. 

 

볼가 강 근처에 다다르자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 공은 그를 위해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를 알현하길 희망하였으나, 그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사실 수도 상크트페테르부르크 방문도 성사되지 못했는데 당시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부재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는 본래 외교적 목적을 달성하였고 귀국 후에는 중국 최초의 "러시아견문록"을 남기게 됩니다. 

 

당시 강희제가 툴리션에게 내린 훈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러시아에 가거든 그 나라의 예법을 따르라"

 

이와 같은 훈령은 중국 역사상 아마 전무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사신을 파견하는 행위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죠. 조공사절에 대한 회답사신은 있었지만, 어떤 외교적 목적을 위해 타국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 강희제는 왜 러시아와의 교류를 이토록 원했던 것인가?

 

사실 18세기 청나라 입장에서 가장 중요했던 문제는 오늘날 신장 지역의 몽골족이었습니다. 몽골족은 예부터 대단한 전투민족으로, 만주인들도 쉽게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명나라를 멸망시킨 것도 얼마 되지 않고, 만주국가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던 삼번의 난을 평정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부의 오이라트, 토르구트, 준가르 등 몽골족이 세력을 일으켜 만주인들의 국가를 위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 러시아는 무섭게 동부로 팽창하고 있었고, 만주족에게 패배한 많은 몽골인들이 러시아로 떠났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러시아와 접촉해서 그들과 동맹하여 몽골을 제압하고자 했고, 동맹이 불가하다면 최소한우호적 중립을 원했습니다. 

 

만주인들은 본래 중국식 "천자"의 개념보다 유목민 기마민족 사이에 통용되던 "칸" 개념에 더 익숙했습니다. 이에 강희제는 러시아를 같은 "칸"으로 인식하였고, 그들과 제휴하여 중앙아시아의 몽골족을 제압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러시아의 차르는 만주어로 "카간 한"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청나라 황제와 동급이었습니다. 

 

심지어 강희제는 베이징을 방문한 러시아 사절단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대의 황제는 방대한 영토를 보유한 위대하고 위엄있는 황제이다. 그대의 황제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여러 원정을 수행했다. (중략) 둘째. 비록 20-30명의 러시아인이 중국에 도망왔지만, 마찬가지로 러시아에 도망간 중국인들이 있다. 이러한 무법자들로 인해 양국 간의 관계가 훼손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대와의 견고하고 영원한 평화를 바란다. 


또한 우리 양국 간에 불화가 발생할 이유는 없다. 당신네 나라는 매우 춥고 멀기 때문에 우리가 군대를 보낸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아무 이득도 얻을 수 없다. 그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네 군대는 우리 기후에 익숙하지 않고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 양국 간의 전쟁은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렇다. 우리 둘은 모두 이미 많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강희제는 러시아를 완전히 "동격"으로 인식하고 이에 맞는 대우를 한 것입니다. 이는 중국의 "세계관"으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이죠. 

 

실제로 중국은 이후 한 차례 더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1734년 토시라는 만주인은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고 그곳에서 여왕 안나 이바노프나를 알현했고, 놀랍게도 그녀에게 삼배고두례를 했습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수개월간 머물렀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그가 어떤 기록을 남겼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18세기 만주인(중국인)이 보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감은 어땠을까요? 이에 대한 기록이 남지 않았다는 게 굉장히 아쉽습니다. 

 


출처: "Russia's Special Position in China during the Early Ch'ing Period", Immanuel C. Y. Hsü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크레토스
20/02/14 18:24
수정 아이콘
뭐 강희제 본인대에 삼번의 난 진압하면서 청나라의 중국지배가 완전해졌으니까요. 중국화 될 시간이 없었죠. 강희제의 불과 70년 뒤에 건륭제가 영국 사절단에게 보여준 태도 보면 순식간에 중국화..
20/02/14 20:03
수정 아이콘
언제나 믿고보는 아우렐리우스님 역사글 먼저 댓글 추천하고 정독해야겠네요.
다크 나이트
20/02/14 23:13
수정 아이콘
이분의 역사글 or 해외글 과 한국글의 퀄리티를 보자면 역시 사람은 자기가 잘하는게 어느정도 나뉘어져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해외거주와 한국 거주자의 인식및 개념의 차이를 느끼게 됩니다. 분명 역사글이나 해외쪽 이야기는 퀄리티가 굉장한데 한국 내용으로만 오면 뭔가 그 퀄리티가 낮아진다고 해야하나요? 인식의 차이 이전에 그런게 느껴지긴 합니다.
홍차밥
20/02/15 00:13
수정 아이콘
해외 거주자였나요? 한국 거주자인줄 알았는데...

그와 별개로 소재에 따라 글 느낌이 다르다는 건 동의합니다.
다크 나이트
20/02/15 00:15
수정 아이콘
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님의 이야기 들으니 갑자기 거주지가 어디신지 제가 잘못 된건 아닌지 싶네요.
거주지에 대해선 저도 가물 가물 합니다.
오렌지꽃
20/02/15 01:35
수정 아이콘
한국 거주자 십니다
VictoryFood
20/02/14 20:28
수정 아이콘
대체 중원에는 뭐가 있길래 중원만 먹으면 모든 왕조가 다 중국화 되는 걸까요.
20/02/14 20:39
수정 아이콘
몽골 같은 경우 원제국의 황제라는 중화 타이틀보다 대몽골 제국의 카간이란 타이틀이 일반적으로 앞서긴 했습니다. 근데 청의 경우 적법한 중화제국의 계승자란 포지션을 자처해서 다른 정복 왕조보다도 한화가 빠른 감이 있죠.
醉翁之意不在酒
20/02/14 20:50
수정 아이콘
뭐 지방태생이라도 서울에 한 십년 살면 서울 사람되는것과 비슷한 이치 아닐까요
20/02/14 21:14
수정 아이콘
결국 인구수떄문이지 않을까요?
정복왕조 어디든 본인보다 피지배층(한족)의 인구수가 훨씬 많고 문화적 차이도 커서 원나라같은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한화가 안될 수가 없긴 했..
뜨와에므와
20/02/14 20:51
수정 아이콘
문화도 문화지만 한족과 만족의 쪽수차이를 생각하면 북경 차지하고 앉아있다고 해서 먹힐 수가 없는 구조였다고 봅니다.
결국 초원부족이 농경기반의 정착생활을 하게 된 셈이니
자기들의 원래 생활방식대로 사는 게 불가능하기도 한것이고...
팔기군같은 것도 오랜기간 평화에 찌들고 당나라화되면서 건국이후 지속적으로 약화되기만 했었고...
만족정권하에서 패망한게 결과적으로는 한족들이 정신승리할 수 있는(나라는 망했지만 우리가 망한건 아님...)
기반을 마련해준 것도 재밌는 일이죠.
無名堂
20/02/14 23:09
수정 아이콘
본론의 내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만 한나라 때 장건이 서역으로 파견된 바 있듯, 중국사상 사신을 외교적 목적으로 먼저 파견한 적이 없다는 말씀은 사실과 다르다고 봅니다.
CapitalismHO
20/02/15 06:26
수정 아이콘
제가 역사에서 젤 좋아하는 나라가 청나라인데 누르하치-청태종-순치제-강희제-옹정제-건륭제로 이어지는 황금 황제라인의 이야기는 뭘 골라잡아도 흥미진진한거 같습니다. 역대급 황제가 연달아서 나온 것은 청나라를 200년간 동아시아 세계의 최강자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단단한 체제였기에 제때 망하지 못해 서구열강한테 당했다는 생각도 조금은 듭디다. 항상 좋은글 잘 읽어갑니다.
antidote
20/02/15 14:51
수정 아이콘
청나라가 굉장히 동양사에서 특이한 제국인 편에 드는건 맞습니다.
저런식의 여러 왕 / 황제 / 대칸 등을 겸하는 것이 서양쪽에서는 간혹 보이지만 동북아에서는 워낙 중화질서가 강하다보니 중국의 황제가 굳이 오랑캐들의 패자의 호칭을 갖고자 하지 않았는데
청나라는 여진에서 시작한 제국이라 그런지 황제가 이민족들의 패자를 겸하는 것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거부하지 않았죠.
뭐 서양을 보면 영국의 여왕이자 무굴제국의 황제 이런식으로 무슨무슨 왕이자 무슨무슨 대공, 무슨무슨 종교의 지도자 이런식의 호칭을 여러개 가져가는 모습이 꽤 나오는데 중국은 청나라 때나 이런 모습이 보이니까요. 그리고 청나라가 그런식으로 중국제국을 확장시켜서 지금의 중국이 더 넓은 강역을 가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4411 [일반] 남극 기상 관측 사상 최초로 기온이 영상 20도를 넘었답니다 [38] VictoryFood15999 20/02/16 15999 2
84410 [일반] [실화] 초콜렛을 받았습니다......... [57] 신류진46551 20/02/16 46551 11
84409 [일반] 스토브리그 - 그럼에도, 우리는 드라마를 원한다. [19] 꿀꿀꾸잉11542 20/02/16 11542 53
84408 [일반] [팝송] 펫 샵 보이즈 새 앨범 "Hotspot" [12] 김치찌개5260 20/02/16 5260 5
84407 [일반] 직장인의 삶이란 [35] 무색취9970 20/02/15 9970 16
84405 [일반] 우리가 '그' 크루즈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 필요 없네요. [111] 아이군14748 20/02/15 14748 0
84404 [일반] 다시 진정한 공산주의(?)로 회귀하려 하는 중국 [29] 훈수둘팔자13218 20/02/15 13218 2
84402 [일반] 일본 크루즈선 슈마이 도시락 4000개 행방불명 [77] 키리기리16983 20/02/15 16983 0
84400 [일반] 아마존 파이어 태블릿 HD 2019 후기 [43] 잠잘까22831 20/02/15 22831 3
84399 [일반] 유튜브 알고리즘이 인도해준 농학생들의 현실. [9] kien10435 20/02/15 10435 9
84398 [일반] 브레이브 건(Brave Gun)의 해설 [8] 성상우11631 20/02/14 11631 0
84396 [일반] [역사] 18세기 중국이 러시아에 파견한 사신단 [14] aurelius8034 20/02/14 8034 13
84395 [일반] 5년전 발렌타인데이 때 차인 이야기 (Feat. 결혼정보업체) [25] BK_Zju14760 20/02/14 14760 25
84389 [일반] 어머니는 고기가 싫다고 하셨어요 [27] 이부키8197 20/02/14 8197 14
84388 [일반] 작은 아씨들 후기(스포) [18] aDayInTheLife6685 20/02/14 6685 0
84387 [정치] 선게 오픈을 맞아 해보는 2016년 20대 총선 여론조사 복기 [23] bifrost13061 20/02/13 13061 0
84385 [일반] 조던 피터슨 근황 [26] Volha15002 20/02/13 15002 2
84384 [일반] [코로나19] 점점 악화되는 일본의 문제 [134] 오프 더 레코드18678 20/02/13 18678 4
84383 [일반] 일하다가 성질이 뻗치는 요즘입니다 [9] 비타에듀7649 20/02/13 7649 1
84381 [일반] ....... [37] 삭제됨12828 20/02/13 12828 0
84380 [일반] 선거게시판 오픈 및 모바일 제한 안내 [15] jjohny=쿠마7372 20/02/13 7372 4
84379 [정치] 손학규때문에 깨질 위기인 바른미래, 민평,대안신당 통합작업 [42] 강가딘9527 20/02/13 9527 0
84378 [정치] 선관위, `안철수신당` 이어 `국민당`도 사용 불허 [85] 강가딘12132 20/02/13 1213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