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10/13 03:47:16
Name 존콜트레인
File #1 14306343_2EA0_4005_BD28_C435DA0CFFBA.jpeg (364.6 K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계획없이 미역밥 먹은 이야기 (수정됨)


굉장히 시끄러웠지만 별 일 없이 태풍이 지나간 후에 혹시 편의점이 열었나 싶어 나와보았다. 역시 편의점도 전부 문을 닫아서 마침 집 앞에 피난대피장소로 지정된 학교가 있길래 궁금해서 들러보았는데, 1층에는 자원봉사자들 여럿이서 예보를 틀어놓고 밤을 새고 있었다. 그 중 한 아줌마가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난 편의점도 닫혀있고 해서 물 한잔만 얻을 수 있을까 와 보았다고 했더니 아저씨들이 아 그러냐고 물 한병 들고갈래? 하면서 아리수같은 디자인에 구청에서 뿌렸을 것 같은 페트병을 들어보였다. 난 그냥 한 잔이면 됐다고 하자 그 분은 종이컵을 주고 물을 따라 주셨다.

배고프면 밥도 있으니까 먹어도 된다고 해서 보니까 아저씨들이 야참을 만드는 중인지 물 부어서 만드는 즉석미역밥같은게 있었다. 뭐가 들었나 이리저리 보고있으려니 왠 하이바를 쓰고 있는 할아버지가 모처럼인데 다 경험이라고 이런 밥도 한번 먹어보라면서 미역밥 한봉지 해 주길래 먹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가 많이 어려보여서 그렇게 말했겠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난 재해 피난소에서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카고시마에서 태어난 한 아저씨는 그 동네에선 태풍이 정말 일상이었다고 했다. 거의 태풍 전문가였는데, 태풍들의 수치나 주의사항, 경험등등을 얘기해주셨다. 자긴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정말 바람이 셀 때는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걷지 않으면 뼈대째로 날아간다 뭐 이런 듣지 않았으면 평생 몰랐을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태풍이 막 올 때는 비가 엄청나게 내리거든. 그러다 갑자기 비도 멎고 바람도 멎고 소름돋게 고요해지면 그게 태풍의 눈에 들어온거야. 몇 분 정도 지나면 아까보다 더 센 바람이 몰아치는데.. 그러니까 태풍이 올 때는 비를, 갈 때는 바람을 조심해야 돼. 그런데 말이야, 눈 안에 있는 순간은 정말 파란 하늘이 보인다니까? 그럼 아저씨네 농사짓던거 비닐 걷어서 다 날라가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그냥 뭐.. 희생해야지 어쩔수 없다고 했다.

나는 사실 한국에서 왔는데 한국은 지진도 별로 없고 태풍도 이렇게 큰게 계속 오진 않는다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응? 한국사람이라고? 그래그래.. 일본을 거쳐서 가니까 좀 약해지겠지. 일본도 수도권에 이렇게 큰 태풍이 오는게 많지는 않아. 무서웠겠구나. 하면서 또 세금물을 따라주셨다. 이제 목이 마르진 않았지만 난 그냥 넙죽넙죽 또 받아마셨다. 이번 달부터 2% 더 내니까 한잔정도 더 마셔도 괜찮겠지.

피난해온 사람이 있나요? 하고 묻자 위엣 층에는 200명정도 피난해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 동네는 사실 별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중이었고 실제로도 별 일이 없었는데도 200명이나 와 있다니 하고 좀 놀랐지만, 어찌됐든 피해가 예상이 된다면 차라리 호들갑을 떠는 편이 낫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재해가 생활인 일본이라 험한 꼴도 많이 겪어봤을테고... 지붕이 날아가고 땅이 꺼지고 집에서 수영하는 걸 겪어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이게 호들갑이니 뭐니 하는 생각조차 굉장히 무엄한 잘못을 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계획이 없는데. 어제밤에 집 근처 마트가 다 털린 다음에 암것도 없길래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나 하나 사온게 다였는데.
그걸 본 헝가리 친구는 나에게 그거 전기나가면 어떻게 먹을거냐며 자기는 칩스를 사 두었다고 웃었었다. 그래, 다 계획들이 있구나.

난 잘 먹었다고 인사하고 한 20분 앉은 의자를 돌려다 놓고 수고하세요~ 하고선 3분거리 떨어진 집에 돌아왔다.
오늘차 롤드컵이 끝나가고 있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VictoryFood
19/10/13 13:04
수정 아이콘
피해가 없으셨다니 다행입니다.
여름별
19/10/13 13:07
수정 아이콘
조용히 올라가는 추천수.. 제 개인적인 감상은, Cookin' & Relaxin' 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아닌밤
19/10/14 03:46
수정 아이콘
태풍 속의 한일교류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미역밥 맛은 어떠셨나요? 궁금합니다.
존콜트레인
19/10/14 04:08
수정 아이콘
그냥 국물 없는 미역국밥같은 느낌이라 맛없진 않았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83109 [정치] 요즘 일본의 불행이나 재해를 보면 조롱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102] 그랜즈레미디14740 19/10/13 14740 0
83108 [일반] 초등학교 3학년때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았습니다. [54] 나이는무거운숫자11914 19/10/13 11914 17
83106 [일반] 홍콩 여행기 [18] Tzuyu8561 19/10/13 8561 6
83105 [일반] 복수는 했으나....(더러움 주의) [21] 이순10894 19/10/13 10894 26
83104 [일반] 지금도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경찰에게 당한 폭력 [169] 겸손한도마뱀14510 19/10/13 14510 21
83103 [일반] NBA 판타지 롤링스톤즈 리그 드래프트가 완료되었습니다. [4] 능숙한문제해결사6680 19/10/13 6680 1
83102 [일반] "내 주변은 그렇지 않은데 왜 인터넷에서는..."에 대한 대답 [304] Volha20764 19/10/13 20764 44
83101 [일반] 계획없이 미역밥 먹은 이야기 [4] 존콜트레인6950 19/10/13 6950 17
83100 [일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25] swear12578 19/10/13 12578 16
83099 [일반] <슈퍼맨 각성제> 당신은 뿌리칠 수 있을까 [23] 일각여삼추12732 19/10/12 12732 1
83097 [일반] [일상글] 주말에 아내와 함께 만끽하는 와인 [7] aurelius7791 19/10/12 7791 11
83096 [일반] 일상의 남녀커플 그들의 데이트는 평화롭다. [46] 루덴스11229 19/10/12 11229 31
83094 [일반] [일상글] 이번주에 구매한 도서 목록 [8] aurelius8040 19/10/12 8040 3
83093 [정치] 흥미로운 문재인 정부의 (WEF가 평가한) 국가경쟁력 순위. [35] kien17255 19/10/12 17255 0
83092 [일반] 전 정말이지 여성혐오란 단어가 싫습니다. [54] 김아무개11109 19/10/12 11109 4
83091 [정치] [게임] 블리츠청 제재와 블리자드의 대응에 대해 [55] 러브어clock9705 19/10/12 9705 0
83090 [일반] 서문표(西門豹) 이야기 [28] 신불해13644 19/10/12 13644 43
83088 [일반] 모태솔로, 번탈남, 인셀 등의 단어가 욕설로 쓰이는 세상. [141] Volha24740 19/10/12 24740 38
83087 [일반] [일상,스포X]어제 조커를 보고 집에 가다 느낀공포.. [10] 파쿠만사9029 19/10/11 9029 4
83086 [정치] 대법원이 허가한 리얼돌 계속 금지하겠다는 관세청 [192] VictoryFood22737 19/10/11 22737 0
83085 [일반] 홍콩 시위 참석한 15세 소녀 변사체로 발견+홍콩경찰의 만행 [76] 파이어군17703 19/10/11 17703 19
83084 [일반] [단상] 러시아의 화려한 귀환 [49] aurelius13290 19/10/11 13290 12
83083 [정치] 여상규의원의 x신과 이은재의원 그리고 국회 속기록 [13] 능숙한문제해결사11319 19/10/11 11319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