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4/04/01 20:57:34
Name 신불해
Subject [일반] 고려 말 2차 요동 정벌 이전에 실제로 요동을 친 제 3의 사례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진 2차 요동 정벌은 1388년에 일어났고, 이는 원정군이 중간에 회군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그 이전에 벌어진 요동 원정 시도는 1370년으로, 이 당시 이성계 등은 일시적으로 요양을 점령했으나 이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으로 회군했습니다. 


yodongattack3.jpg


1차 요동원정 당시의 상황




이 두 사례는 각각 18년의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일이고, 이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가 대단히 급박하였던 만큼 두 상황을 곧바로 대입하긴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2차 요동원정 이전에 실제로 이루어진 일이 1차 요동원정이 유일한 만큼, 2차 요동원정의 가능성을 말할때 1차 요동원정을 살펴보는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참조 할 수 있는 제 3의 요동 공격이 있습니다. 다만 이는 고려가 아닌, 북원 세력의 공격이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관련 기록의 원문 - 


乙卯十二月,納哈出寇遼東。先是,上敕遼東都同曰:「今天寒冰結,虜必乘勢入寇,宜堅壁清野以待之,慎勿與戰,使其進無所得,退有後慮,伏軍阻險,扼其歸路,虜可坐致也。至是,果入寇,都指揮使馬雲等探知納哈出將至,命蓋州衛指揮吳立、張良佐、房皓等嚴兵城守。虜至,堅壁勿與戰,及納哈出至,見城中備禦嚴,不敢攻,乃越蓋州城徑趨金州。時金州城垣未完,軍士寡少,指揮韋富、王勝等聞虜至,督勵士卒,分守諸城門,選精銳登城以禦之。納哈出部將乃剌吾自恃其銳勇,率數百騎,竟至城下挑戰,城上發弩射之,乃剌吾被傷悶絕,遂獲之,虜勢大沮。富等復縱兵出擊,納哈出不利,慮援兵且至,引兵退走。以蓋州有備,不敢經其城,乃由城南十裏外沿柞河遁歸。都指揮葉旺策其將退,先引兵趨柞河,自連雲島至窟駝寨十餘裏,緣河疊冰為墻,以水淋之,經宿皆凝冱,隱然如城,藏釘板於沙中,設陷馬阱於平地,伏兵以待之,命老弱卷旗登兩山間,戒以聞炮即豎旗。馬雲於城中亦立一大旗,令定遼前衛指揮周鶚及吳立等嚴兵以候,四顧寂若無人。已而,虜兵至,旺等候其過城南,炮發,伏兵四起,兩山旌旗蔽空,鼓聲雷動,矢石雨下,納哈出愴惶北奔,趨連雲島,遇冰城,馬不能前,皆陷入阱中,遂大潰。雲於城中亦出兵追擊,至將軍山畢栗河,斬戮虜人馬及凍死者甚眾。旺等復乘勝逐至豬兒峪,獲其士馬無算,納哈出僅以身免。旺等相慶曰:「非主上明見萬裏,授以神算,何能有此!」旺遣人送乃剌吾至京師,群臣請戮之,上不許,命為鎮撫,賜以妻妾、田宅。(《太祖實錄》)- 國初群雄事略/卷12



http



지도에 동그랗게 표시된 부분은 나하추의 세력지, 금산의 위치





몽골이 급격하게 팽창하던 시기, 칭기즈칸의 주요 측근 중 한 사람이자, 칭기즈 칸이 서역 원정에 나선 무렵 실질적으로 중국 전역을 관할하였던 인물은 바로 무칼리(木華黎)라는 인물입니다. 무칼리의 여말선초 시기 후손이 바로 지금 말하는 나하추인데, 나하추의 이력에 어느정도 알려지기도 한 만큼 대해서는 아주 간단하게만 설명하겠습니다.



나하추는 중국의 원말명초에 시기에 당초 세력을 확대하던 주원장에게 붙잡혔으나, 주원장은 나하추를 살려 주어 북쪽으로 돌아가게 했고, 이후 나하추는 지도에 표시된 금산 부근에 자리를 잡고 세력을 확대합니다. 이 과정에서 고려에 눈독을 들인 적도 있으나, 1362년 벌어진 고려 공격은 이성계의 맹활약에 의하여 격퇴되었고, 이성계의 이 승리로 고려는 동북면 영토에 대한 원나라 침략의 위협에서 어느정도 확고하게 탈출하게 되고,(이후 최유와 덕흥군의 침입이 있었지만 이는 영토보다는 왕위와 관련된 부분) 나하추 역시 이후 고려에 대해 무력보다는 외교적인 수단에 의존하여 상대하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당초에 나하추의 세력은 아주 강력하지 않았지만, 북원의 요양행성평장정사(遼陽行省平章政事) 유익(劉益)이 명나라에 항복한 이후 남은 북원 세력은 요동의 나하추를 중심으로 규합되기 시작했고, 이후 나하추는 무리 10만을 거느리며 상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 나하추의 세력에 대해, 명사 달단전 등에서는 이후 항복할 무렵에 20만 정도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하추는 이렇게 강력해진 세력을 바탕으로 명나라에 대해 공세를 펼치게 되는데, 게중에 1372년의 우가장 공격은 명나라 병력을 무려 5,000이나 참살하는 상당한 성과였습니다. 이렇게 세력을 떨친 나하추였지만 점차 명나라 공격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고, 이윽고 1387년 명나라 장군 풍승, 남옥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자신의 세력지 금산을 압박하자 전력의 압도적인 열세에 결국 항복을 결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사례는, 바로 이 나하추가 1375년 명나라를 공격한 사례 입니다. 이때 나하추가 공격한 곳은 다름 아닌, '요동반도' 입니다.





바로 이 지역. 보통 우리 입장에서 요동을 공격한다고 하면 북벌의 이미지지만, 나하추 근거지를 본다면, 이 당시 나하추는 남하하여 요동 반도를 공격한 것입니다. 



만일 고려가 요동을 공격한다고 한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상대하게 될 적은 요동 반도의 명나라 병사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례는 생각하자면 대단히 흥미로운 일 입니다. 고려의 2차 요동 정벌에 13년 앞서, 고려가 아닌 제3의 세력은 어떤 성과를 거두었을까?



1375년의 전역에서 나하추가 남하하여 공격한 곳은 개주, 금주 등입니다. 이 중에서 개주는 현재의 잉커우시에 있고, 금주는 여기서 더 깊숙히 들어간 다렌 시 입니다.(금주의 경우는 다렌 시의 거의 남서쪽 끝자락 부근 입니다.)


파일

잉커우 시 



파일:Location of Dalian Prefecture within Liaoning (China).png


다롄 시(금주 지역은 다렌 시 끝자락 귀퉁이가 튀어나온 부분으로 들어가기 전 바로 앞 정도 부분)



요동 반도의 위에서 남하하여 반도의 거의 끝까지 진격했던 이 당시 나하추의 공격은 어떤 결과를 맞이했을까?




1375년 12월. 나하추의 남하 소식을 접한 명나라 도지휘사 마운(馬雲)은 나하추의 습격을 가장 먼저 받을 수 밖에 없는 요동 반도 동쪽의 개주(蓋州)의 군대에 성을 빈틈없이 지키라고 지시합니다. 


이후 개주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명나라의 대비 탓인지 나하추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자 나하추는 개주를 지나쳐 아예 요동 반도 더 깊숙히 들어가기 시작했고, 이윽고 금주(金州)를 공격하게 됩니다.


당시 금주는 성벽의 튼튼함이나 군사들의 숫자에서 부족한 부분등이 있었음에도 전력을 다하여 나하추의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이때문에 나하추는 근심 걱정이 있었는데, 심지어 여기에 더해 곧 구원병까지 이르게 되자 초조해진 나하추는 결국 퇴각을 결정 합니다.


원정이란것은 불리할 수 있으니 바로 퇴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문제는, 퇴각하는것조차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하추가 진격해 왔던 길인 개주의 방비는 이미 대단히 견고해져 있었습니다. 이에 나하추는 개주성 남쪽의 직하(柞河)를 경유해서 빠져나오려 시도합니다.


헌데 명나라의 도지휘 섭왕(葉旺)은 이러한 나하추의 의도를 꿰뚫어보고 먼저 작하로 이동했고, 연운도(連雲島)와 굴타채(窟駝寨) 10여리에 걸쳐 얼음을 겹겹히 쌓아 벽을 만들고, 모래에 못과 널판지를 숨겨 늘어놓고, 평지에 함정까지 깔아놓아 매복 작전을 벌입니다.


이후 나하추는 군대를 이동하다 명군의 천둥같은 기습을 받았으며,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돌세례에 대단히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분통하고 놀란 심정으로 간신히 말을 달려 북쪽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전투에서는 처절할 정도로 당했던지라, 명군은 포로와 전리품을 수도 없이 거두어 들였고, 나하추에게 있어 이 타격은 거의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이때의 싸움을 보면 명나라는 하북 지역이나 몽골 전선을 통해 중국 전역을 휩쓸던 수십만 대군이나 서달, 남옥같은 쟁쟁한 중원의 맹장들을 파견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요동 반도에 있는 명나라의 전력으로만 총 세력이 20만에 달하고 북원 세력의 한 축이라는 나하추를 상대한 것인데, 나하추는 요동 반도 여기저기에서 명나라의 방어선을 뚫지도 못했으며, 하나의 성을 공격하더라도 이내 당도하는 명나라의 구원병에 눌러야 했으며, 심지어 회군을 결정하고 나서 요동반도라는 지옥에서 다시 빠져나가는것조차 거의 불가능 했을 정도였습니다.



1375년의 이 패배 이후 나하추는 더 이상 왕성한 군사적 활동을 두 번 다시 보여주지 못합니다. 중국을 통일한 명나라의 그저 한 쪽 귀퉁이 세력에게 이렇게 눌렸던 나하추는, 1387년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명성이 천하에 자자한 명나라의 풍승과 남옥이, 나하추의 전 세력의 숫자인 20만에 달하는 숫자를 '원정군' 으로 끌고와 금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소식 입니다. 이에 대한 나하추의 반응은 명사 달단전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勝遣玉往受降。使者見勝軍還報,納哈出仰天歎曰:“天弗使吾有此衆矣。”遂率數百騎詣玉納降。


풍승이 남옥을 파견하여 (나하추의)항복을 받으라고 하였다. 나하추의 사자가 풍승의 군대를 보고 돌아와 보고하자, 나하추는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말하기를, “하늘 이 나에게 이 무리를 거느리지 못하게 하는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수백의 기병을 이끌고 남옥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결국 나하추는 이 20만 대군을 보는것만으로 모든 희망을 상실해버리고, 결국 명나라에 항복합니다. 이는 북원 세력에게 치명타가 되어 1388년 명나라 장군 남옥은 15만 대군을 이끌고 3월에 출발, 포어아해에서 북원 세력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니, 포로만 8만이었으며, 전리품으로 얻은 가축은 15만에 달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중국 북방의 위협을 모조리 분쇄하게 됩니다.


이후 몽골의 잔당은 나중에 세력을 회복하여 다시 명나라의 우환거리가 되지만, 당장은 오이라트와 타타르의 무리가 서로가 서로를 참살하며 주도권을 잡기 위한 경쟁에 빠지면서, 다른 곳에 신경을 쏟을 수 없는 형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남옥이 포어아해에서 승리를 거둔 4월의 말 무렵, 고려의 서경에서는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의 요동 원정군이 출동 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바스테트
14/04/01 21:08
수정 아이콘
만약 저대로 고려군이 5만으로 요동에 꽝 부딪혔으면 명나라손에 끝장났을 지도 모르겠네요-.-
anic4685
14/04/01 22:23
수정 아이콘
1명으로 100명분을 하면...
我無嶋
14/04/01 22:57
수정 아이콘
그래서 우왕이 최영 사저에 갔다가 몰래 사열하면서 일당백인가 일당천의 용사라고 했나보군요 (정도전에서..)
anic4685
14/04/01 23:15
수정 아이콘
5만의 척준경이면 그까이 명따위 응?
14/04/01 21:17
수정 아이콘
통일된 중화 제국의 힘이란건 무섭군요...마음만 먹으면 수십만이니...
14/04/01 21:20
수정 아이콘
러일전쟁에서의 뤼순요새, 203고지(일본황군 지휘역량 클라스 때문이기도 하지만)사례를 따져보면 다롄은 死地인걸로....
요정 칼괴기
14/04/01 21:28
수정 아이콘
솔직히 그쪽은 황군 클라스가 컸죠. 203고지의 방어력이 좋은 거지 뤼순 자체는 방어가 당시 잘된 곳은 아니었죠.
사실 203고지도 나머지 방어진지 다쓸고 난후 유일한 러시아군의 거점이 된 상태에서 끝났구요.(가장 먼저 공략해야 하는데
결국 가장 늦게까지 남아버린 거점)
홈런볼
14/04/01 23:28
수정 아이콘
고려는 무슨 생각으로 요동을 치려 한거죠?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5만으로 부딪힌들 승산이 없어 보이고 역공으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어보이는데요. 국외에 대한 정세 파악이 그리도 안될 수 있나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위화도 회군을 굉장히 애석한 순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이건 거의 자멸 수준의 출병으로 보이는데 말이죠. 그 당시 자세한 외교관계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원명 교체기에 방어가 허술한 외딴 지방에 대한 공격이라면 몰라도 명이 미리 선점한 곳에 대한 도전은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나하추가 개박살 난 상황을 지켜보고도 말이죠. 위의 글을 보니 위화도 회군이 여러모로 납득이 가는군요.
G드라군
14/04/01 23:43
수정 아이콘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걸 안타까워 한 게 아닌가요?
홈런볼
14/04/02 00:11
수정 아이콘
아 맞네요. 제가 착각을 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
꽃보다할배
14/04/02 11:11
수정 아이콘
스팀업하고 마린 4기 들어간 벙커에 꼴아박는 발업 저글링 2마리 or 풀업 베틀쿠르져 12기에 꼴아박는 스컬지 4마리
14/04/02 16:57
수정 아이콘
요즘 정도전 때문에 이 떄의 역사가 굉장히 흥미로운데 정말 좋은 글입니다, 많은 것을 배웠네요
14/04/02 17:00
수정 아이콘
이영호라면 처럼 이성계라면 어떻게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가본적도 있았잖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3601 [일반]  떠오르는 태양과 저물어가는 달, 명조와 북원의 대격전 [11] 신불해9895 14/09/03 9895 13
53239 [일반] 이성계가 호바투를 무찌르고 동북면을 구원해내다 [8] 신불해8231 14/08/16 8231 11
53104 [일반] '역사' 라는 주제를 다루며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느꼈던 순간 [39] 신불해9458 14/08/07 9458 32
51849 [일반] 역사에 길이 남을 농구협회와 농구연맹의 무능 [31] 신불해8705 14/05/20 8705 4
51657 [일반] 국내 역사상 희대의 졸렬 군주, 고려의 충렬왕 [17] 신불해13986 14/05/10 13986 27
51225 [일반] 역사의 IF 시나리오 - 달려라, 이성계! 머나먼 저 대륙으로! [33] 신불해14870 14/04/22 14870 32
51222 [일반] 나폴레옹, "나에게는 사람 100만명의 목숨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11] 신불해9883 14/04/22 9883 4
51054 [일반] 쿨가이 이성계, 밭 갈던 사람을 친병대 사령관으로 삼다. [31] 신불해8352 14/04/15 8352 7
50964 [일반] 진격의 이성계 [30] 신불해10310 14/04/09 10310 10
50900 [일반] 정도전 - 늙은 호랑이와 젊은 용의 대결 [39] 신불해9445 14/04/05 9445 10
50868 [일반] 장수 대 장수의 회담이 대규모 전투로 돌변한 이성계 vs 나하추 [12] 신불해7472 14/04/04 7472 7
50824 [일반] 고려 말 2차 요동 정벌 이전에 실제로 요동을 친 제 3의 사례 [13] 신불해10173 14/04/01 10173 5
50776 [일반] 19세기 초 어느 한 인물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점 [10] 신불해6438 14/03/31 6438 2
50758 [일반] 이번 주 정도전 클래스.JPG [29] 신불해12046 14/03/29 12046 7
50752 [일반] 조선시대 판 언더 커버 보스 [13] 신불해10324 14/03/29 10324 4
50668 [일반]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는 위화도 회군 [59] 신불해10349 14/03/25 10349 8
50609 [일반] 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사 역사상 최악의 졸전들 [14] 신불해9194 14/03/22 9194 8
50604 [일반] 패망 직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왜구와의 일전, 해풍 전투 [10] 신불해7596 14/03/21 7596 16
50380 [일반] 위화도 회군 당시 고려 조정이 컨트롤 할 수 있는 병력은 어느정도 였을까? [36] 신불해11948 14/03/10 11948 11
48976 [일반] 고려, 30년에 걸친 왜구의 사슬을 끊어내다 - 이성계의 황산대첩 [14] 신불해8191 13/12/29 8191 4
48971 [일반] 강희제 아저씨에 대한 서양 예수회 선교사들의 반응 [14] 신불해7753 13/12/29 7753 6
48968 [일반] 대동법으로 생각해보는 대중적인 역사 인식의 문제 [32] 신불해7250 13/12/29 7250 20
48318 [일반] 감히 황상의 총기를 어지럽히려 들다니, 무엄하도다! [19] 신불해9281 13/12/08 9281 1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