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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2/26 20:39:44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일반] 선동하지 않는 대자보의 가치.
웹에 올라온, 혹은 오프라인에 붙은 자보를 다 읽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그게 가능하실 분도 거의 없으리라 봅니다. 첫 며칠 동안 자보를 읽는 데에 하루에 수 시간이 걸릴 정도였으니까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부터는 저 또한 다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저도 제 공부가 있고 생활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걸 읽어내려가는 건 꽤나 재밌는 경험이었습니다. 각자가 하나의 키워드를 이야기하면서, 또 다시 각자가 이야기하는 건 각자가 지금 그 순간 가장 중요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게 상당량이 모이게 되면 그 사람들이 공통으로 걱정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죠.

http://news.zum.com/zum/view?id=0022013122110635610&t=0&cm=newsbox&v=2

예컨대 대량의 대자보는 이런 분석들이 나올 수 있는 데이터가 되었습니다. 기사 내용을 보시면 알 수 있듯이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세상 사회 취업 노동 일자리 스펙 알바 비정규직] 등이었고, 자주 등장한 사회 이슈 또한 취업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그게 세대를 관통하는 공통의 관심사가 되어버렸다는 얘기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의 관심사라는 이유만으로는 이 문제가 왜 대자보에 저렇게 많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들이 그냥 자기 한탄인지, 혹은 사회 비판인지는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할 것입니다. 글쓴이가 그걸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사회 구조가 뒤틀린 탓으로 인식하는지에 따라 논조는 변할 것이고, 그 글을 읽는 이가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는 지에 따라 또한 해석은 변할 겁니다. 아랫글의 댓글들은 그러한 혼재의 장이었습니다.

https://soundcloud.com/ddanzi/8-7

전 그걸 당연히 사회적 맥락에서 쓴 글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글쓴이 자신도 그러한 의도로 썼으리라 판단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과 주변의 취업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건 시중에 흔히 나도는 자기계발서들이 내린 진단과는 반대의 궤적을 그립니다. '나'의 나태함, '나'의 능력 부족, '나'의 부족함에서 이 문제들이 비롯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일종의 의자 뺏기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거죠. 누구나 취직을 원하고 누구나 좋은 직장과 안정적인 생활을 원하지만 그 숫자가 한정되어 있음은 너무나 명확하고, 결국엔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배자가 양산될 수 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러한 의미로 저 분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오는 대자보 수십 장을 훑어보며 내린 결론이기도 합니다. 최초에 대자보 행렬이 시작된 이유에는 철도노조 파업으로 대표되는 현 정권에 대한 불만이 분명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대자보들이 그 이야기를 곁들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논의 전개에서 오히려 중심에 서게 된 건 취업 문제였습니다.

중요한 건 이러한 현실을 바꿔놓기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너무나 소소하고 미미해서, 실제로는 거의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나 다름 없다는 겁니다. 주식 시장의 개미들이 큰손들에게 하염없이 놀아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입니다. 총액수가 설령 큰손들보다 많다 해도 모래알 같아서는 영원히 휘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래알들이 엉길 수 있게 물을 한사발 부어보자는 내용들이 대자보엔 참 많았습니다.

https://ppt21.com/pb/pb.php?id=freedom&no=48873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제시된 대자보는 오히려 이 흐름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글입니다. 우리는 상대평가를 통해 상대와 나 중 하나만 앉을 수 있는 의자를 차지하려 아둥바둥해야 하고, 거기서 이긴 누군가는 분명히 장학금을 타갑니다. 다음 라운드에서 이기기 위해선 영어 점수라는 칼날을 가다듬어야 하고, 나를 채용해줄 갑들에게 내가 부리기 쉬운 인간임을, 다른 이들보다 더 요긴하게 쓰일 수 있음을 어필해야 합니다. 거기서 바라는 이외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이게 어떻게 사회현안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고함치지 않아서? 방향을 제시하지 않아서? 행동을 촉구 하지 않아서? 그래서 의미있는 대자보일 수 없는 건가요. 저 사람이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어야 저 글은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었나요?

자 이제 이건 독해능력의 문제가 됩니다.

일기에 불과할까요, 대자보에 걸맞는 글감이었을까요.
단순한 승자의 독백일까요, 그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소회일까요.
제 과대평가일까요, 아니면 다른 분들의 과소평가일까요.





김훈이 쓰던 '거리의 칼럼'이라는 코너가 오래 전 한겨레에 있었습니다. 그 첫 글을 여기 옮깁니다. 칼럼의 제목은 라파엘의 집입니다.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34/2002/03/005100034200203072122111.html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불우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아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아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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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이리
13/12/26 21:08
수정 아이콘
과대평가건 과소평가건, 역치를 넘기지 못하면 이 모든 것은 한때의 유행으로 남을 겁니다. 반대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면, 치졸함과 어리석음조차 열정으로 남겠지요. 사실 평가는 지금 해봐야 별 의미가 없지요. 우리가 작문 선생들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인간실격
13/12/26 21:17
수정 아이콘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지금까지의 지난 역사가 말씀하신 바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제가 의식해서 그런 건진 몰라도 선동이라는 단어 아주 많이 보이는군요 참. 요 몇 달간 팩트팩트 하던 것만큼...
jjohny=쿠마
13/12/26 21:22
수정 아이콘
'안생겨요' 류 드립은 이미 겁나 식상하지만, 진정성의 역치를 가볍게 넘겼기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의 심금을 울려오고 있는 거죠.
여태까지 그래 와꼬, 아패로도 개속.
13/12/26 21:48
수정 아이콘
맞는 말씀 같은데 노코멘트 드립은 반응이 왜 그렇죠?
jjohny=쿠마
13/12/26 21:49
수정 아이콘
노코멘트
be manner player
13/12/26 21:18
수정 아이콘
https://ppt21.com/pb/pb.php?id=freedom&no=48873 이 대자보 보고나서 든 생각이 글쓴이와 다르다면 뭐 자동으로 인사동 지식인이라도 되는건가요.
'라파엘의 집' 칼럼이 이 글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근매니아
13/12/26 21:20
수정 아이콘
아뇨.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메세지를 말하는 문장이 없더라도 훌륭한 주장글이 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정육점쿠폰
13/12/26 21:38
수정 아이콘
허이고. 독해능력의 문제로까지 몰고 가시네. 자기가 해석하는 방향으로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난독증이라도 되는가 보군요?
오만하군요 아주.
초식성육식동물
13/12/27 09:11
수정 아이콘
이전 대자보 글의 일기장 운운하는 덧글들은 솔직히 말씀드리면, 쿨내로 포장한 공감능력제로 그 이상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냉철한 의심과 이성만이 완벽한 인간을 이루는건 절대 아니죠.
13/12/27 11:27
수정 아이콘
남의 글을 개인 일기장에 써야 할 글로 해독하는 독해능력에 미치려면 한참 멀었다고 봅니다.
13/12/26 21:50
수정 아이콘
저도 김훈 작가의 라파엘의 집이 생각이 나더군요. 대자보 보고서요.
nicdbatt
13/12/27 00:30
수정 아이콘
공분이고 뭐고를 떠나서 투쟁심의 최대 원동력은 개개인의 안녕하지 못함아닌가요~??
라는 측면에서, 링크의 대자보는,
내 안녕하지 못함을 일깨워주고,
또 대다수가 안녕하지 못한 현실을 바라보게 하여 사회 변혁에 대한 의지를 고취 시키는 것이 충분히 고도로 선동적인 것 같습니다(나쁜 의미로든 좋은 의미로든)
그런데 뭔가 알 수없는 이유로 댓글 란이 아수라장이 된 과정은 정말 알 수없네요...
인간실격
13/12/27 09:57
수정 아이콘
뭐가 아수라장이란건지 알 수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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