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와 정약용의 첫만남
1783년 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증광감시에 합격한 정약용.
정조는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을 자신들 앞에 불러 한줄로 세움.
그리고 한명 한명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들게 했는데, 이제 막 성균관 유생이 된 22살의 정약용을 본 정조.
"네 나이가 몇이더냐?"
"임오생이옵니다만?"
임오년은 1762년 5월 바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억울하게 죽었던 해였음.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죽은 후 스무날이 지난 6월 16일에 태어남.
정조는 이런 인연을 깊게 생각하며 정약용을 기억함.
그러던 어느날 성균관에 정조가 나타남.
사실 정조는 평소에 성균관 유생들한테 숙제 내리는 것을 낙으로 삼았음.
그래서 어느날에도 나타나서 '중용'을 읽고 의문이 나는 점을 70개를 뽑아 논문 쓰라고 시킴.
... 차라리 오탈자 70개를 찾으라고 하지.
이 때 정약용이 구구절절 한가득 써서 갖다바친 글이 정조의 마음에 쏙 들게 됨.
니 생각이 곧 내 생각. 어떻게 이렇게 나와 생각이 같을 수 있지? 하며 놀라워 함.
정조 장학회 장학생 정약용
정조는 유달리 정약용한테 장학금을 많이 줌.
왕이 유생을 이만큼이나 아끼고 아낀것은 조선 유례에 없는 일이었음.
물론 성균관의 크고 작은 시험에서 거의 1등을 한게 정약용이라서 그러하긴 했지만,
약용이 1등을 할 때 마다 책을 사줌.
그래서 정약용은 이런식으로 팔자백선 대전통편 국조보감 병학통 등등 한권한권 정조로 부터 책을 받아 공부 함.
어떤 때는 흰 종이 100필을 받았는데 오늘날 길이로 환산하면 160미터가 넘는 길이임.
정조는 그 종이를 홀로 껴안고 궁궐문까지 걸어가라고 시킴.
이유는 정약용이 이렇게 똑똑한 자라고 광고 하려곸
그 외에도 정조는 약용이를 어떻게 하면 등용 시킬것인지를 엄청 고민했음.
얘가 이렇게 똑똑한데, 왜 자꾸 대과에서 애를 떨어트리냐고 노발대발하기도 했음.
정약용이 대과에서 자꾸 떨어지는 이유는 그가 남인이었기 때문임.
그래서 정조는 체제공을 시험관에 앉히고 특별과거를 열었음.
당연히 정약용이 그 시험에서 장원함.
알고보면 정약용은 정조 빽으로 관료가 된 케이스라 할 수 있겠음.
대과에 급제해 관료가 된지 6개월만에 정조는 정약용에게 한강을 건널 배다리를 만들라고 함.
아버지 사도세자의 시신을 수원으로 이장하는데 쓸 배다리였음.
그런 정조의 마음을 읽은 정약용은 신속정확하게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함.
그런데 정약용은 항상 정조가 주는 벼슬이 마음에 안들었음.
너무 낮아서 맘에 안드는게 아니라 자신이 큰 벼슬을 받으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임.
그래서 어느 날은 잠수 타버림.
사실 정약용은 잠수 탄 일이 한두번이 아님.
아버지 정재원이 돌아가시자 시묘살이 해야 한다며 고향으로 버로우 탐.
정조가 애가 타서 시묘살이 그만하고 성이나 빨리 만들어 달라며 불러 들이는 편지를 씀.
그래서 만든게 수원 화성.
정조의 성격
정조는 세손시절 부터 정적들에게서 위협을 많이 받았기에 조용한 성장기를 보냈음.
워낙 과묵해서 영조 조차 문안인사 받을때 답답해 했던 적이 많았다 함.
열살 어린나이에 참혹하게 아버지를 잃은 세손 이산은 철이 일찍 들고 영민 했음.
특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노론세력들 사이에서 세손은 말을 아끼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며 최대한 무표정하게 자람.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50발을 활을 쏘고,
자기 전 자신을 암살하려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듣기 위해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오로지 얌전히 동궁에 들어앉아 책과 씨름하고, 무술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
보통 학자군주라 하면 세종대왕을 떠올리지만,
세종이 보았던 것 보다 더 많은 책을 정조는 읽었고,
심지어 자신의 전담 어의를 꾸짖을 수 있을 정도로 의학서적에 매우 밝았음.
거기다가 백동수를 시켜 무술 책을 펴게 하고, 병법서를 읽어 자신의 전용 호위대인 장용영을 설치하기도 했음.
어쨌든 세손 이산의 마음 속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한이 서려 문드러졌겠지만,
겉으로는 학문을 좋아하고 무술을 운동삼아 하는 모습이 전부였음.
남이 볼땐 그냥 얌전하고 말 없는 세손인줄 알았을거임.
그러나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고 말함.
그리고 그동안 말을 못해서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을 정도로 속사포로 말을 하기 시작함.
조정대신들 앞에서 신하들을 엄청 잘 꾸짖었음.
욕도 엄청 잘함.
뿌리깊은 나무 세종의 우라질 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거임.
그리고 한지 워리어라는 별명이 생긴 만큼 신하들한테 박대하기 이루말할 데가 없었는데,
오직 정약용한테만은 매우 달랐음.
정조는 정약용 덕후
특히 정조는 정약용한테 과외를 시켜줌.
남 보고 시킨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가르침.
얼마나 총애가 한가득이었는지-
정약용이 성균관 유생일때 정조는 정약용의 시험지를 직접 채점함.
그냥 채점만한게 아님. 가끔 시험지에 수고했다. 잘했다. 라고 써주기도 했음.
그리고 정약용을 자신 앞에 앉혀 놓고 자기는 담배를 피우면서 시를 하나 써보라 함.
그래서 정약용이 얼른 시를 지어서 올리자 정조는 활짝 웃으며 칭찬하고 시문옆에 점수를 3배로 써줌.
오늘날의 100x100 이정도 되겠음.
어느날은 병법서를 던져 주고 공부하라고 시킴.
그리고 정조가 활도 가르침.
처음 활을 잡을 때는 서툴고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던 정약용이었지만,
얼마나 스파르타로 가르쳤으면 문신인 정약용이 무과 시험관으로 감독까지 했겠음?
한번은 임시로 병조참의직에 앉혀서 화성행차때 약용일 데려감.
그리고는
숙직 때 정조가 백운시(행이 백개)를 써내라고 함.
그래서 백운시를 쓰는 정약용 때문에 상관인 병조참판은 안심할 수가 없어 안절부절하면서 왔다갔다 했다 함.
여튼 어찌나 정조가 정약용한테 이것저것 가르쳐 댔는지 정약용은 '규장각 초계문신' 출신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었음.
정조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 중 인재들만 모아서 엘리트 그룹을 만들었는데, 규장각 초계문신 그룹이 그 그룹.
그 제 1대 인물이 정약용임.
성균관은 본래 전원 기숙사제인데, 정조가 자꾸 야밤에 정약용을 불러냄.
자꾸 승지한테 성균관에 가서 정약용을 데리고 오라고 시킴.
주로 1:1 독대를 하는데 이 때엔 사관도 없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름.
다만 정약용이 일기 처럼 남긴 시문들을 통해 분위기만 대충 알 수 있음.
밝은 촛불 삼경 밤에 비단을 비추는데,
유생의 차림새로 왕 앞에 이르노니,
진지하신 칭찬말씀에 밤은 깊어가고,
보배로운 서책들을 하사 하시니 그 책이 향기를 머금었네
정약용의 이 시를 보면 정조가 야밤에 불러서 밤이 깊어가도록 약용을 칭찬하고,
진귀한 책들을 잔뜩 안겨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정조는 또 정약용한테 선물을 많이 주었음.
여름에 연꽃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주었는데, 정약용은 이 부채가 꽤 맘에 들었음.
그래서 일기에 부채에 대해 묘사한 글을 쓰고 나서 덧붙여 이렇게 써 놓음.
"부채를 만든 사람은 왕실화사 김홍도다."
그리고 정조가 직접 책에 꽂아놓고 쓰던 책갈피도 너 쓰라고 줌.
사소한거 하나하나 정약용이 필요한거 같으면 자기가 쓰던거라도 다 내어줌.
또 봄에는 문득 정약용에게 '봄이 춥다' 라며 비단도포를 선물로 줌.
선물공세도 모자라 정조는 정약용을 위기에서 몇번이나 구해줬음.
사실 좀 더 사실에 입각하자면, 병주고 약주고나 마찬가지임.
정조는 사도세자의 추존에 대해 엄청난 열성을 올리는데,
이러한 모든일에 정약용의 팔방미인적인 뛰어난 재능이 빛을 발함.
노론은 정조가 사도세자와 관련된 일을 꺼낼때 마다 깜짝깜짝 놀람.
그런데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그의 개혁을 돕는 정약용이 눈에 좋게 보일리가 없음.
노론은 정약용의 셋째형인 정약종이 천주교신자라는 것을 빌미로 삼아 정약용가문을 척출해내려 함.
하지만 정조는 천주교는 그냥 학문일뿐이라며 콧방귀도 안 뀜.
그리고 오히려 정약용의 둘째형인 약전을 관직에 앉힘;
근데 이 약전이라는 자가 인물이 참 좋았는데, 거기다 말술이기까지 해서 비슷한 주당인 정조가 술친구로 아낌.
약전도 약용만큼 학식이 뛰어나서 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마치 약용과 나누는것과 같아서 매우 좋아했다 함.
"네가 약용이 보다 낫구나. 술도 잘마시고."
뭐 이랬다나 뭐라나?
그리고 영남인물고라는 책을 편찬하게 함.
그런데 노론도 노론이지만, 남인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공서파가 등장하게 됨.
이 공서파는 서학과 천주학을 반대하는 파인데 같은 남인들 중에서 천주교를 믿는 같은 남인들을 밀고했음.
그러나 이번에도 정조는 정약용을 감쌈.
탄핵상소가 수십 수백개나 올라오지만 귓등에도 신경 안씀.
원래 관직에 있을때 물의가 일어나면 사임하는게 관례인데,
정약용은 이에 사임하겠다고 하고 정조한테 말하고 나가려고 하나 정조가 붙잡음.
정조는 어떻게든 정약용을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지만,
약용은 신하가 군주에게 자주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공과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을 구해주는걸 엄청 싫어함.
그래서 정조가 궐을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약용은 사임 소장을 써서 제출해버리고 궐을 나가버림.
승정원에서는 약용을 붙잡아 놓으라는 왕명에 의해 잡아놨어야 했는데 약용이 홀로 나가버려서 멘붕이 왔음.
정조는 약용의 사임 소장을 읽고 내던짐. 그리고 약용을 데려와 공초를 받으라고 했는데,
약용은 끝내 궐 안에 안들어 옴. 대신에 소장을 한장 더 올림.
자기 사임 소장을 빨리 받아 달라는 그런 내용이었음.
"뭐라? 감히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 소장을 또 올려? 정약용을 유배 보내도록 해라!"
열 받은 정조. 결국 정약용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게 되자 약용을 해미로 유배를 보냄.
그런데 이것도 다 정조의 신의 한수.
국왕이 불렀음에도 말단 신하가 소장을 써서 떼를 쓰는 것은 봐줄만은 했지만,
노론쪽에서 정약용을 봐준다고 할게 뻔해서 아예 그냥 확실히 보내버리자고 맘 먹은거임.
그런데 정약용은 유배를 가면서 그냥 산천유람하듯 해미로 갔음.
공서파와 노론은 정약용이 유배를 갔다는 소식에 난리 부르스를 떨어댔으나 정약용은 그때 지방 유람중이었다긔.
게다가 해미에는 정약용의 집안의 친척이 있어서 그냥 방문겸 해서 들르기도 함.
결국 정조는 열흘 후에 다시 정약용을 불러들였음.
실망하는 노론과 공서파.
한마디로 그냥 휴가 준거나 마찬가지였던거임.
정조는 돌아온 정약용에게 다시 예문관 일을 맡겼는데, 정약용은 물의를 빚은 자리라서 못 받겠다 함.
그러자 정조가 오히려 승진을 시켜줌.
정조 사후
정약용은 정조의 엘리트 교육 때문에 의학, 율학, 법학, 기상학, 지리학, 법학, 자연과학 등 지식에 대한 범위가 매우 넓었음.
정말 박학다식 했고, 팔방미인이었음.
정조가 죽지 않고 정약용이 재상까지 올라갔다면, 정말 조선의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거라 생각함.
그러나 현실적으로 정조가 재위하는 동안 정약용은 노론 벽파 때문에 내직과 외직을 오가며 어려운 관직생활을 했음.
그래서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 약용이 가장 높이 올라갔던 벼슬은 동부승지임.
사실 28살에 대과에 급제하고 30대에 아무런 정치적 연고 없이 정 3품까지 오른것은 엄청 대단한 일임.
그런 정약용을 가르켜 정조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다라고 말했음.
얼마나 아꼈던지 정조는 잠수를 타 버린 정약용에게 당시 검서관이던 유득공을 보냄.
둘이 규운옥편의 의례를 함께 상의하라는 정조의 명을 받고 유득공이 정약용을 찾았던 것인데,
그것은 정조가 정약용이 뛰어난 학자와 교류할 수 있길 바랐던 스승의 마음에서 한 일이었음.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니, 그믐께쯤에 궁에 들어와서 경연에 나오거라."
정약용은 00년 6월에 정조가 보낸 책과 서찰을 받았음.
그 내용중에는 보낸 책 10권 중에 5권은 집에 남겨두고, 5권은 책의 제목을 써서 다시 들여보내란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정조가 약용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그의 글씨라도 얼른 보고 싶은 정조의 마음이었음.
약용은 정조의 마음에 감동해서 얼른 책 제목을 쓰고 조만간 입궐할 준비를 하던 차에 갑자기 정조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됨.
이때 나이 정조 48세, 정약용의 나이 38세였음.
정조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정약용은 믿을 수 없는 맘으로 한달음에 궁궐 앞까지 달려감.
믿을 수 없게도 홍화문 앞에서는 신하들이 땅을 치며 통곡을 하고 있었음.
그제서야 정약용도 실성을 하듯 울기시작했음.
그 일만 생각하면 눈물이 옷깃을 적셔
곧 바로 따라죽어 지하에서라도 임금을 뵙고 싶었으나 그러지를 못하였네.
이 시가 정조가 죽고 정약용이 귀양을 가 수십년이 지나서인데,
그때도 정약용은 자신의 유일한 주군이자 스승이고 벗인 정조를 그리워했음.
정조가 서거한 후,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약용 일가를 축출하기 위해 신유박해에 연루시킴.
이에 정약용과 그의 둘째형 정약전, 그리고 셋째형인 정약종이 연루 되는데,
정약용과 정약전은 비신자임이 밝혀저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 됨.
그러나 정약종은 장형을 맞는 도중에 죽음을 맞이함.
정약용은 년간 경상도 장기, 전라도 강진 등에서 유배기간을 보냈고,
이 기간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를 썼음.
그리고 형 정약전은 물고기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책을 남김.
유배지에서 형 약전이 죽고,
정약용은 년 순조 에 귀양이 풀려 승지에 올랐으나 3개월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음.
자신의 주군이었던 정조가 없자 그다지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던 것 같음.
그렇게 세월을 보내던 차 혼인 60주년을 맞이한 아침인 1836년 음력 2월 22일에 자택에서 별세했음.
요즘 피지알에 올라온 강희-옹정제 시리즈를 재밌게 봤는데
정조시대를 전후해서 우리나라도 참 천재가 많았던 거 같네요.
저 두분도 그렇고 정약용이 천재라 칭하던 무불통지 이가환이라는 먼치킨스러운 분도 계셨다하고
홍대용, 최한기도 빼놓을 수 없는 분들이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