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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5 00:45
무왕이 이름지을때 의롭고 자애로운 왕이 되라고 저렇게 지어줬나보죠.
온조왕 이름이 부여온조이고 무령왕 이름이 부여사마듯이 의자는 그냥 이름이지 후대에 평가받은 시호나 묘호는 아닙니다.
12/11/15 01:27
의자왕이 마지막 백제 부흥을 이끌었던 왕 아닌가요? 마지막 혼을 불태워서 정복사업을 벌이는 도중 나당 연합군에 멸망.. 했다고 알고 있는데;; 잘못 알았나??
12/11/15 02:15
근데.. 삼천 궁녀는 아닐지라도 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은건 사실일까요? 삼천명이니 아니니 하는 논쟁보다도 오히려 궁녀가 바위에서 떨어져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의 사실여부를 가리는게 먼져라 생각합니다.
12/11/15 08:59
3천 궁인에 대한 다른 가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조선시대 문인의 감상+일제에 의한 날조 설 외에)
3천 궁인에 대해 사비에 살던 귀족집 여인들과 그에 딸린 하녀를 포함한 여인들의 투신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삼국전쟁은 '인구'수집과 영토획득을 위한 전쟁이라서 부녀자 겁탈이 거의 없었습니다.(전혀는 아닐 것입니다.성범죄자 확률만큼 존재) 그런데 당나라 군사는 서부지역부터 전쟁을 치르면서 온 '용병'개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약탈과 겁탈개념이 일상화되었고, 이 때문에 백제 귀족의 부인과 하녀들이 궁지에 몰린 나머지 투신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의자왕의 방탕함으로 표현된 왜곡은 그 이후 역사가 '승자'의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만...적어도 조선시대 문인이 낙화암의 전설을 채록할 때까지는 투신에 대한 근거있는 설화가 존재했을 거라고 보는 것이 하나의 가설입니다. (원래는 글을 하나 준비하던거라 조금 더 쓰면) 왜 낙화암인가... 이곳이 바로 백제 귀족들의 기도처였기 때문입니다. 백마강은 일종의 피안과 대안을 가로지르는 강물(말하자면 요단강)로 여겨서 강너머에 사찰을 짓습니다. 정사암의 위치나 왕흥사의 위치를 보시면 백마강을 끼고 있습니다. 낙화암이 있는 암자는 왕흥사의 '부처'를 향해 기도할 수 있는 곳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다른 이름이었을 것입니다만...그곳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른 여인들의 투신으로 그런 이름이 지어졌을 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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