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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23 02:17:57
Name 눈시BB
File #1 심하_전투.JPG (17.2 KB), Download : 65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2. 심하 전투



bgm이야 아실 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 아 전 와우 안 합니다(어라)

시작부터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이를 어찌할까요. -_-a 뭐 갈 때까지 가 보죠. 지도는 저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헤투알라가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야 되는 건지... 중국 지리는 영 약한데다 더 약한 만주 지리니 =_=; 제대로 알게 되면 수정하겠습니다.

1. 원정군
1618년, 광해군 10년 윤 4월 12일, 요동 군무 이유번은 자문을 보내어 병력을 파병할 것을 청합니다. 당연히 비변사 등 신하들은 그에 대한 준비를 논했죠. 비변사는 그에 답할 내용 및 준비할 것을 광해군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광해군의 대답이 특이하네요.

"무원의 자문으로 보면 거세게 나오고 있는 노추를 중국 조정의 병력으로도 일거(一擧)에 섬멸한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겠으니, 이번의 회자(回咨) 속에 ‘경솔하게 정벌하지 말고 다시 더 헤아려서 만전(萬全)을 기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는 등의 내용으로 말을 잘 만들어서 끼워넣어 보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이 날 중요한 일인데 신하들이 병을 핑계대고 나오지 않았다고 탄핵이 올라옵니다. 여기서부터 조짐이 느껴지네요. 다음 날 비변사가 아뢴 내용 중 일부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외번(外藩)이 중국 조정을 대함에 있어서는 사체(事體)가 지극히 엄격하고 군기(軍機)가 지극히 중대하고 은밀한 것인 만큼 소방(小邦)이 간여하여 논할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의 사리로 말한다면 그저 그들의 지휘를 받아 그때 가서 진퇴(進退)하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우리가 신하인데 감히 대국에 의견을 개진하냐는 거였죠.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이거였습니다.

"보내 온 자문의 뜻에 따라 칙유가 도착하는 날을 기다리며 병력을 정돈하고 지휘받을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광해군의 답이죠.

"만전을 기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은 그저 나의 소회를 개진해 보는 것일 뿐이지 중국 조정의 군무(軍務)에 간여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생각건대, 중국 조정과 우리 나라는 한 집안과 같은 점이 있으니 소회를 개진한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다시 더 자세히 의논한 뒤 말을 잘 만들어서 회답하도록 하라."

한 집안끼리 의견 나누는 게 뭐 어떻냐는 대답이었습니다. 그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나온 그의 요지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조선은 중국처럼 병농분리가 아니라서 군사의 질이 낮다. 이게 크게 도움이 되겠는가
- 그런 병력이 왜란으로 인해 더 약해졌다.
-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압록강을 굳게 지키는 것이 명에게도 조선에게도 좋은 일이다.
- 지금 온 것은 천자의 명이 아닌 요동의 장수들이 보낸 것이다. 그들이 어찌 조선의 사정을 잘 알겠는가 => 덤으로 조선을 잘 아는 양호에게 잘 보이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결론은, 왠만하면 보내지 말자는 거였죠. 이에 대해 윤 4월 24일, 박홍구, 유희분, 이이첨 등이 건의합니다. 앞부분은 우리 병력 약한 거 아주 잘 안다는 내용이었죠. 하지만...

"그러나 대국적으로 말하면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고 사적인 정리(情理)로 말하더라도 꼭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는 만큼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단연코 응원하지 않아서는 안될 입장입니다."

4월 26일, 왕은 이 일에 대해 2품 이상에게 의논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 역시 비변사와 같았죠. 광해군일기에는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비록 간사한 원흉(元兇)이라 하더라도 대의(大義)를 범할 수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 무리들은 이걸 몰랐으니)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요행이라 하겠다"

위에 건 주어가 없고 밑에 건 다른 이름들을 나열했지만... 모두 광해군을 향한 말이라고 봐야겠죠.

5월 2일, 광해군은 군문에게 답문을 보내는데 그 내용은 우리는 그냥 압록강에 병력 모았다가 돕는 게 나을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밝힌 병력은 7천이었죠. 이걸 본 양호는 열 받아서 다시 자문을 보냅니다. 6월 19일에 도착했죠.

"그런데 마침 국왕께서 독무(督撫)에 회답하는 자문을 갖고 도착한 홍문관 교리 이잠을 만났는데, 그 자문의 내용이 관망하는 듯하는 것이었고 뜻도 굳고 바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잠 또한 스스로 간절한 심정을 개진하는 정문(呈文) 하나를 바쳤는데, ‘앞뒤로 겨우 적을 막고 있다.’는 내용이 아니면 ‘서울이고 지방이고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으며 ‘국력이 넉넉치 못하다.’는 내용이 아니면 ‘교련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따지고 있죠 -_-; 이어 양호는 겨울에 진격할테니 같이 가고, 10일 안에 끝나니까 걱정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보낼 병력이 얼마인지, 대장은 누구인지, 요충지는 어디인지 등을 밝히고 근처 지도도 그려오라고 하죠. 이에 대한 비변사의 평가입니다.

"그리하여 만일 불측한 말이 성상께 가해지기라도 한다면 신들이 만 번 죽더라도 임금을 욕되게 한 죄를 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감히 이렇게 재계하면서 계속 번거롭게 해 드리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군부를 위한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윤허를 내리시어 여론에 답하소서"

요약하면 "괜히 뻗대다가 이 꼴 난 게 아니냐. 니가 뭔 잘못 있겠냐. 니 제대로 못 가르친 우리 잘못이지. 빨리 제대로 답 하자."입니다. -_-; 결국 광해군은 짜증났는지 이렇게 답 합니다.

"오늘 안으로 급히 강구해 정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임진년 때 무너졌던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국가에 그만한 다행이 없겠다. 나는 두 번 이야기하지 않겠으니 다시 더 상의해 선처함으로써 후회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연려실기술에는 책중일록을 인용해서 이 때 군문 왕가수는 4만을 청했지만, 양호가 조선 사정이 어려운 것을 잘 알아서 1만으로 줄였다고 적고 있고, 백사행장을 인용해서 광해군이 징병을 거부하고 이걸 따지는 자문이 오자 이항복이 울면서 "이제 우리 다 죽었다"고 하고 기절했다는 내용을 넣고 있습니다. 철저히 광해군에게 불리한 기록이죠.

광해군은 최대한 자기 사정을 황제에게 건의하려 했지만 계속 양호에게 막혔다고 합니다. 내외로 계속 가해지는 압박은 견딜 수 없었죠. 보내느냐의 여부는 뒤로 하고 얼마나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 역시 계속 된 상태였습니다. 예를 들면 자문이 온 직후 병조에서 보고한 게 있는데, 평안도의 속오군이 2만 5천 5백에 비전투병 1만 2천 5백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7천, 황해도에서 2천 5백, 강원도 2백 등을 뽑으면 되겠다고 했죠. 거기에 이들을 보내도 여유가 있고 부족하면 남쪽에서 뽑아 오면 된다고 했었습니다. 흐음...

7월 4일, 마침내 원정군이 뽑혀서 명에 보고하게 됩니다. 도원수로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 좌조방장 안여눌, 우조방장 이일원 등이었죠. 이 중 포수가 3천 5백이었고 사수가 3천 5백, 살수가 3천명이었습니다.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에서 가려 뽑은 총 1만의 병력이었죠. 이들은 압모두 평안도로 향합니다. 책중일록에는 3영의 총병력이 1만 1백명이고 두 원수의 부하(직할병력?)이 2천 9백여 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만삼천이라는 건 여기서 나온 거겠죠. 원정군이 구성된 이후에도 명은 계속 포수(조총병)를 요구했고, 이 때 포수가 오천명이라는 것으로 봐서는 계속 증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 때문에 신경전도 벌어집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지침을 내립니다.

"그대는 명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

1619년 2월 초부터 23일까지, 조선군은 압록강을 건넙니다.

2. 심하 전투
명은 이 때 40만을 동원하겠다느니, 명군만 14만이라느니 하면서 늘 그랬듯 큰소리를 뻥뻥 칩니다. 그 실제 병력은 7만 정도로 연합한 조선군과 해서 여진의 병력에 기대고 있었다고 하죠. 특히 화기가 극히 부족해서 조선의 조총병을 계속 요구했다고 합니다.

명군은 크게 넷으로 나뉘었는데 그 대장은 이여백, 두송, 마림, 유정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여백과 유정도 왜란에 참전했고, 마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양호는 이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서 진격시킵니다. 조선군은 유정 휘하에 속했죠.

진격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습니다. 조선군은 이미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보급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죠. 유정은 행군을 늦춰 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감독관을 파견해 감시했습니다. 이 때 강홍립이 광해군에게 보고했던 내용입니다.

"도독을 만나보고 각 방면 군사의 수를 물었더니, ‘서남 방면에 대병(大兵)이 일제히 전진하고 있고, 동쪽 방면의 군사는 내가 친히 거느린 장정 수천 명과 각 장수가 거느린 병사가 있을 뿐이니, 통틀어 1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동쪽 방면의 군대가 매우 고립될 텐데 대인(大人)은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습니까?’ 하고 신이 물었더니, 말하기를 ‘양 대인(大人)과 나는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반드시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고, 나도 나라의 큰 은혜를 입었으므로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직 벼슬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관전(寬田)에 남겨두고 온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왜 이렇게 빨리 전진하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병가(兵家)의 승산은 오직 천시(天時)와 지리(地利)를 얻고 인심을 따르는 데에 있을 뿐이다. 날씨가 아직 추우니 천시를 얻었다고 할 수 없고, 도로가 질척거리니 지리를 얻었다고 할 수 없지만, 내가 병권을 잡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답하였는데, 무척 기분이 나쁜 기색이었습니다. 신들이 그 진영에 나가 보니 기계가 허술하고 대포와 대기(大器)도 없었으며,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병력이 일만이 안 된댔으니 오히려 조선군이 주력인 상황이었고 -_-; 강홍립도 자기들만 믿고 있다고 보고했죠. 거기다 양호와 사이도 안 좋아서 지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임진왜란이 명의 멸망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을까... 하는 떡밥이 있지만, 이 때의 명나라 상황을 보면 딱히 임진왜란 없어도 망할 수밖에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3월 2일 조선군은 심하에서 후금군과 조우했고, 승리합니다. 이 병력은 600정도였다고 합니다. 작은 싸움에서 이겼지만 군량은 다 떨어졌고, 주변 부락을 뒤져서 죽을 끓여서 먹입니다. 그렇게 계속 진군하는 동안... 패전 소식이 들려옵니다.

당시 명군의 목표는 누르하치의 본거지 헤투알라였습니다. 누르하치는 이에 대해 각개격파로 응수하죠. 그 첫 목표는 좌익중로군 두송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급히 사르후에 도착한 후 성을 쌓기 시작했고, 이걸 본 두송은 공격합니다만, 유인에 이끌려 기습, 괴멸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좌익북로군 마림은 후퇴하여 진을 치고 대비합니다만, 전투 중 후방의 반종안이 마림과 사이가 안 좋아서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고, 둘 다 패전합니다 -_-; 이 소식을 들은 예허의 해서 여진 병력도 후퇴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양호는 급히 이여백과 유정군을 불러들입니다. 이여백은 무사히 후퇴하지만, 유정은 이미 늦은 상황이었죠. 이 때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주변 부락을 약탈하다가 기습당했다고 합니다. 유정 등 명군 지휘부는 화약포 위에 앉아서 불을 질러서 자살했다고 하는군요. 그 다음 목표는 조선군이었습니다. 그 수는 삼만이었습니다.

3. 조선군, 전멸
3월 4일, 진격 중이던 조선군은 명군의 전멸 소식을 듣게 됩니다. 강홍립 등 조선군은 각기 세 곳의 언덕을 점령해서 이에 대비하죠. 하지만 좌영이 벌판에서 언덕으로 이동하기 전에 적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 때의 서술이 약간씩 다릅니다. 실록의 경우 좌영을 이끄는 김응하가 들판에 진을 치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애초부터 평지에서 싸우려 했고, 한 차례 화포로 적을 많이 죽였다가 후퇴하려 할 때 서북풍이 불어 화포를 쓸 수 없는 상황에 적이 돌격해서 패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때 김응하가 혼자 큰 활 3개를 번갈아 쏴서 적을 많이 죽였고, 적이 뒤에서 찔러서 전사했다고 했죠. 그럼에도 잡은 활을 놓치 않아 적이 "이런 자가 두어 명만 더 있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다"고 하며 "의류 장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연려실기술이 인용한 책중실록의 경우 언덕으로 가려다가 적이 가까이 와서 여의치 않아 그대로 맞서 싸워야 했고, 총을 재장전하기도 전에 적이 들이닥쳤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에 강홍립이 우영을 보내 구원하게 했지만 둘 다 전멸했다는 거였죠.

+) 책중실록은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이민환이 지은 책입니다.

뉘앙스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조선군은 적을 벌판에서 맞아 싸워야 했고, 적이 빠르게 기습해 왔으며, 좌우영이 모두 전멸한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여기서 김응하, 이계종 등 대다수의 장수가 전사했고, 우영장 이일원은 중영으로 도주합니다.

이어 강홍립은 적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항복하죠. 이 때 적이 역관 하서국을 불러 강화하자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책중실록에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에는 하서국 대신 역관 황연해를 보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 때 적이 "우리는 너희와 원한이 없다. 왜 우리를 치러 왔느냐" 했고, 황연해가 "우리도 원한이 없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고 응답했고 강화가 이루어졌다고 하죠. 연려실기술의 경우 책중실록과 용강 포수 김충남이 증언한 것을 합쳐서 기록했다고 했는데 다만 여기에는 적이 한 말이 빠져 있어서 마치 조선군이 먼저 화친을 청한 느낌이 난다... 고 한명기 교수가 말했는데 저는 이런 느낌 못 받겠네요 =_=; 애초에 인용한 부분이 책중실록 + 돌아온 포수의 증언인데요.

이렇게 심하 전투는 끝납니다. 일만이 넘는 조선군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간 자는 천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후금군에 편입되거나 각지로 흩어져서 농사에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이 전투 전체를 살리호, 혹은 사르후 전투라 부르며 각 전투가 있었던 지명을 들어 두송이 패한 전투를 사르후 전투, 마림이 패한 전투를 상간하다 전투, 유정이 패한 전투를 상간하다 전투라 부르고 조선군이 패한 전투는 부차 전투라고 부릅니다. 조선의 경우 그냥 "심하 전투"로 통칭해서 불렀구요. 명군은 이 전투로 314명의 장수가 전사하고 4만 5870명의 병력이 전사했다고 평가받으며, 명청교체기의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됩니다.

4. 심하 전투의 영향
이 전투를 통해 명은 더 이상 후금을 공격할 힘을 잃게 되었고, 요동이 계속 먹히면서 그 곳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후금에 흡수되거나 조선으로 도망옵니다. 인구가 부족했던 후금은 이들 역시 최대한 흡수했죠. 21년에는 선양(심양)을 점령해 그 곳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중원을 노릴 위치에 있게 되었죠. 누르하치의 다음 목표는 명나라 최후의 명장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이었습니다.

한편 조선에는 많은 한인들이 피난 왔는데, 이들이 계속 말썽을 부려서 조선은 큰 곤란을 겪게 됩니다. 이들 중에는 선양을 지키던 모문룡이 있었습니다.

명과의 육로가 완전히 끊긴 상황, 일만에 달하는 조선군이 전멸했고 더 이상 명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은 조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후금의 성장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고, 조선은 이 위협에 완전히 노출돼 버렸습니다. 지금까지의 일들과 심하 전투는 예고편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본편이 시작되는거죠.

5. 광해군 vs 인조
결국 여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광해군의 정책이 얼마나 옳았느냐는 것입니다. 보통 중립외교, 실리외교라는 평을 듣지만 최근에는 거센 반론을 받고 있죠. 특히 오항녕 교수의 경우 이걸 기회주의라고 거세게 비난했고, "그냥 시간만 질질 끈 것 뿐이었다"는 평가도 받고 있죠. 무엇보다 인조 정권이 후금을 배척했다고 하지만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거의 이어받았고, 그런데도 두 차례나 호란을 당했거든요. 누르하치와 달리 홍타이지는 조선을 적대했고, 단지 이 둘의 성향 차이였을 뿐 광해군이 있었더라도 청은 쳐들어 왔을 거라는 것이죠.

실제 광해군이 외교 및 국방에 최선을 다했냐 하면 그렇게 보기 힘들기도 합니다. 당시 광해군이 집중하던 것은 궁궐 재건 및 신축이었고,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느냐"는 말과 함께 "궁궐 짓는 것 땜에 그러냐"는 말도 숱하게 들었거든요.

결국 이 연재의 상당부분과 결론은 여기에 할애될 듯 합니다. 광해군이 잘 하고 인조가 못 해서 인조 때 쳐들어 왔느냐, 광해군이었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들이죠. 최종결론은 마지막에 가서야 내릴 수 있을 듯 하네요.

시작부터 계획과 다르게 한 편이 더 나와 버렸습니다만... 이제 본격적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다음 편이 진짜 [고려처럼 : 빛과 어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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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ne sais quoi
11/06/23 03:03
수정 아이콘
인조가 광해군의 정책을 이어받았나요? 그 부분은 몰랐는데 이렇게 또 하나 배우네요. 어떻게 그랬는지는 좀 궁금한데 앞으로 나오겠죠? 계속 잘 읽겠습니다~
11/06/23 08:43
수정 아이콘
이번 편은 빠르시네요. 감사합니다~
Amunt_ValenciaCF
11/06/23 12:01
수정 아이콘
심하 전투가 뭐지...해서 봤더니 사르후전역이었군요. 제가 지난번 댓글에 달았던, 육군에서 나온 관련 책자를 더듬어보면 "전력 자체는 명나라가 나쁘진 않았지만 병참을 캐무시하고 자기 전력에 알맞은 전술 및 병력배치를 간과하였기 때문에 청나라의 승리가 당연하다" 정도로 평했던 것 같습니다. 명군이 대포병+창병이다보니 기동력 우수한 청나라 기병대가 포병대 사격만 통과하면 질래야 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기억하네요.

그나저나 전 참전한 조선군이 사르후 전투 결과를 보고 모두 항복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요즘으로 치면 파병나갔다가 이국 땅에서 전사한 옛 선조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11/06/23 14:00
수정 아이콘
병자호란자체는 실록을 좀 읽어본 적이 있는데, 전후사전을 알고 보니 훨씬 더 이해하기가 좋네요.

그런데 대체 왜 명은 수비에 집중하지 않고 후금을 직접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던 걸까요?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아닌 거 같고 내부적으로 어떤 응집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떻게봐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보였는데요.

결과론적으로 보니 그런 거지 당시엔 상당히 승산이 있다 생각했던 걸까요?
구국강철대오
11/06/23 23:32
수정 아이콘
쌍령도 그러하지만 사르후도 전반적인 조선의 총덕질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우왕 조총이 짱이셈! 이러다가 탱 없이 딜러만 즐비한 파티가 닥돌에 전멸한 케이스랄까요.
백마탄 초인
11/06/24 13:37
수정 아이콘
좋은 연재 언제나 감사합니다.
진 전쟁이든 이긴 전쟁이든 민족의 역사에 커다란 사건의 전쟁이니 만큼 관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눈시BB 님이 쉽게 풀어 주셔서 늘 잼있게 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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