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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18 13:53:33
Name kikira
Subject [일반] 애서가의 기쁨



애서가의 기쁨




얼마 전부터 집 근처 도서관에 다니고 있다. 새로 지었단 소문은 들었지만 와보니 기대보다 더 훌륭하다. 거창하다고 할 수준은 아니나, 그래도 읽고 싶은 책들은 대부분 찾아 읽을 수 있다. 지금처럼 마음껏 책을 읽었던 적이 또 있었나 싶다. 가히 요즘은 독서의 대풍년기다.


이렇게 독서가 풍성인 시절에 나는 잠시 애서(愛書)를 생각한다. 물론 애서가는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굳이 책을 펼치지 않아도, 의뭉스런 그들의 옆모습이나마 바라보며 흐뭇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독서(讀書)는 곧 애서(愛書)가 된다. 물론 금장 박힌 양장본 책들을 호사롭게 진열해놓고, 애서가니 독서가니 짐짓 연(然)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또 앨범 하나 가지지 않은 음악애호가를 상상하기 힘들듯, 책을 사랑하며 소장하는 일과 독서는 얼마만치 겹치기 마련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애서가는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책장을 어루만지는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굳이 책을 사 소장하는 이유는 그렇다. 책장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책을 항상 끼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책에서 얻은 의미를 음미하고 다시 떠들어 보기 위해 책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간의 오해와는 다르게 애서가는 장서 수에 연연하지 않는다. 몇 천권 몇 만권 되는 장서를 소유한 이의 노고와 경제적 가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걸음을 같이하며 며칠이라도 한 번씩 찾아볼 수 있는 애서의 양은 겸손하기만 하다. 내가 쓰는 책장 전부에는 대략 몇 백 권 정도의 책이 꽂혀 있으나 그중 나와 함께 사색에 빠진 애서들은 열 권을 넘기가 힘들다. 나보다 깜냥 좋은 사람이 바다의 모래알처럼 많겠지만, 수천 권의 책은 내게 가당치도 않다.


책장의 표정은, 내가 늙어감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간다. 새로운 애서에 곧바로 자리를 내어주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책장과 나이를 맞먹어가는 애서들도 있다. 그들은 나의 살갗과도 같다. 가만히 책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에게 하나둘 눈짓을 보내온다. 손길을 기다리며 앙탈부리는 녀석도 있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등돌린 친우도 있다. 살며시 다가가려 하면 좀 더 부딪힌 다음에, 좀 더 아파본 다음에 오라는, 한없이 너그러운 표정의 어르신도 있다.


독서가 쌓여 책장을 이루고 나는 그들과 함께 머문다. 그것이 단순한 '愛'로 한정지을 수는 없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것이다. 사랑하는 부부가 그러한 것처럼 책장과 나는 조금씩 닮아가기도 하고, 조금씩은 토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정직한 나의 (그리고 우리의) 초상이다. 그것에 미치지 못한 독서는 진한 아쉬움으로만 기억된다. 오늘 그들을 위해 작은 공간을 비워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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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타
11/06/18 14:41
수정 아이콘
외람된 질문이지만 프로필에 적혀 있는
I'm just curious what am I so good. <= 무슨 뜻인가요? 해석이 잘 안되서요
애이매추
11/06/18 15:10
수정 아이콘
아끼는 책을 잘보이는 곳에 두면, 그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 생각, 추억이 떠올라 좋죠.
그런데 반복해서 읽는 책은 그중 일부에 지나지 않아, 제한된 책장 탓에 어쩔 수 없이 버리거나 보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네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자책을 사거나 갖고 있는 책을 스캔해서 전자책으로 보관하게 됩니다.
실용서, 기술서들은 전자책으로 보는게 편리하고, 또 언제 어디서나 생각날 때 읽고싶은 책도 전자책으로 보는게 좋거든요.
글쓴 분 생각에 굉장히 공감하면서도, 요즘같은 때는 이런 즐거움을 어떻게 누려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하드디스크 어딘가 숨겨진 폴더에 한가득 들어있는 영상물에 뿌듯해하는 마음과는 분명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데.
abrasax_:JW
11/06/18 21:07
수정 아이콘
글이 정말 좋네요.
고등학교 시절 정말 바쁠 때 많은 책을 읽었고, 정작 대학생이 되어서는 그러지 않고 있네요. 아이러니합니다.
전 흔적 남기는 것도 싫어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이상하게 두려워하는 편인데 음반과 책만은 예외입니다.
츄츄호랑이
11/06/18 21:4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저도 아브라삭스(?)님처럼 바빠야 할 고등학교 때 정말 많은 책을 잃고 대학생이 되어선 책을 안 읽게 되는 거 같아요.
고등학생 시절에도, 대학생 시절에도 시간은 늘 남았는데......
11/06/18 22:57
수정 아이콘
글의 분위기가 정말 좋네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저도 한창 공부할 시기인 중,고 시절에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읽고 대학교에 와서는 전공이다 뭐다 해서 핑계를 대고 있네요. [m]
11/06/19 00:29
수정 아이콘
맞춤법과 어색한 부분을 조금 다듬었습니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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