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1 샤를 용담공(필리프 용담공의 증손)의 대문장(Great Coat of Arms). 중앙 방패에는 부르고뉴 공국의 문장과 함께, 플랑드르(금 바탕 검은 사자), 브라반트(검은 바탕 금 사자), 림뷔르흐(흰 바탕 붉은 갈라진 꼬리 사자)의 문장이 결합되어 있다. 주변에는 부르고뉴 공이 겸임한 저지대 영지들의 문장이 둘러싸여 있다.
저지대는 사회적으로 점차 독자적인 정체성을 만들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아직 조각조각 흩어진 땅이었다. 그 중 가장 크고 부유한 영지는 바로 플랑드르 백작령이었다.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 드 말(1330-1384)은 방대한 작위를 지니고 있었으나, 계승할 아들이 없었다. 유일한 딸 마르그리트(1350-1405)가 모든 유산을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루이의 영지는 플랑드르뿐만 아니라 느베르와 르텔, 더 나아가 아르투아와 프랑슈콩테(부르고뉴 자유백국)까지 뻗어 있어, 저지대에서 부르고뉴 지방에 이르는 방대한 영지의 향방이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 상속 문제에서 선택을 받은 사람은 바로 프랑스 왕 장 2세의 넷째 아들, 필리프 ‘용담공’(1342-1404)이었다. 그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아버지에게서 부르고뉴 공국을 왕자령으로 받아 발루아 왕가의 분가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을 창시한 인물이다.
저지대를 석권하는 선량공 필리프
부르고뉴 공국은 중프랑크 분할 때 서프랑크 왕국에 귀속된 부르군디아 일부에서 비롯했으며, 이름도 부르군디아의 프랑스어 형태다. 동쪽으로는 프랑슈콩테, 서쪽으로는 느베르와 맞닿아 있었다. 이 부르고뉴 공국의 주인이 마르그리트의 남편이 되면서, 저지대와 부르고뉴 각각의 조각들이 하나로 합해지기 시작했다.
용담공 필리프의 뒤는 용맹공 장(1371-1419)이 이었고, 또 다른 아들 앙투안(1384-1415)은 혼인을 통해 브라반트·림뷔르흐 두 공국을 다스리는 브라반트 공을 계승해 저지대에 또 다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씨앗을 뿌렸다.
용맹공 장은 백년전쟁기의 프랑스에서 부르고뉴파를 이끌며 아르마냑파와 대립해 프랑스 왕의 섭정 직위를 놓고 다투었기에 저지대에 남긴 자취는 많지 않다. 그러나 용맹공 장의 아들 선량공 필리프(1396-1467)의 시대가 되면 확연히 달라진다.

그림 2 부르고뉴 공국과 선량공 필리프 3세가 1419~1467년에 획득한 영토 및 연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홀란트·제일란트·에노 백작을 지내는 비텔스바흐 가문과도 혼맥을 맺어, 바이에른-슈트라우빙 공이자 홀란트·제일란트·에노 백 빌럼 6세(Willem VI, 1365-1417, 에노 백으로는 기욤 4세Guillaume IV de Hainaut, 바이에른 공으로는 빌헬름 2세Wilhelm II. von Bayern-Straubing)가 용담공 필리프의 딸 마르그리트(1374-1441)와 결혼했으나 아들은 없었고, 딸 한 명 야코바(Jacoba van Beieren, 1401-1436, 프랑스어 이름은 자클린Jacqueline)만 두었다. 빌헬름은 바이에른은 동생 요한 3세(1374-1425)에게, 홀란트·제일란트·에노는 자클린에게 물려주었으나, 요한 3세는 조카 자클린의 영지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클린은 위에서 언급한 앙투안의 아들인 브라반트 공 장 4세(Jean IV de Brabant, 1403-1427, 네덜란드어 이름은 얀 4세Jan IV van Brabant)과 혼인해 요한 3세에 맞섰으나, 많은 빚을 진 장은 요한 3세에게 매수되어 아내를 배신했다. 이에는 장의 막료들이 대구파에 기울어져 있었고, 자클린은 갈고리파의 지원을 받고 있던 정치적 차이도 한 이유가 되었다.
선량공 필리프는 이름과는 달리 외교와 정치적 술수에 능한 인물이었고, 고종사촌 여동생의 위기를 곧바로 자신의 기회로 삼았다. 먼저 아들이 없던 요한 3세에게 접근해 요한이 이대로 죽을 경우 요한의 저지대 영지를 물려받기로 약속했다. 요한 사후에는 저지대를 물려받은 친사촌인 장 4세와 자클린 부부의 불화를 이용해 장에게서 공동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이에는 필리프가 대구파와 손을 잡고 에노·홀란트·제일란트에서 영향력을 넓히면서 장의 신하들도 필리프를 지지하게 된 것도 한 요인이었다.
자클린은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이혼 절차를 밟고 잉글랜드의 글로스터 공 험프리를 새 남편으로 삼아 요한 3세와 필리프와의 싸움을 계속했고, 갈고리파 민병대의 활동으로 필리프에게 일정 부분 반격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와 동맹 관계에 있던 부르고뉴를 대적하기 위해 자클린이 잉글랜드 귀족을 끌어온 것은 자충수에 가까웠고, 요한 3세와 필리프가 모두 교황청에 혼인 무효를 주장한 것이 수용되어 자클린의 외부 원조는 끊기고 말았다.
결국 자클린은 패배를 인정하고, 필리프와 1428년 델프트 화약을 맺었다. 조약에서는 자클린의 작위를 인정했으나 그 영토의 관리는 필리프가 맡도록 했고, 자클린이 후사 없이 죽으면 그 뒤를 필리프가 잇도록 했다. 또 자클린은 필리프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으니, 필리프가 자클린의 후계자임을 공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클린이 프랑크 판 보르셀러와 결혼하자, 필리프는 프랑크를 감금한 뒤 조약 위반을 이유로 자클린에게 영토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도록 했다. 1433년, 헤이그 조약으로 자클린은 이를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브라반트 공 장이 죽은 후 그의 뒤를 이은 동생 필리프(1404-1430)는 사촌 형 필리프의 마수를 벗어나고자 앙주 공 루이 2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 욜랑드와 혼인해 자식을 낳으려 했으나, 요절하면서 허사로 돌아갔다. 그렇게 브라반트와 림뷔르흐를 물려받은 필리프는, 자클린 사후 홀란트·제일란트·에노까지 물려받았다. 이에 앞서서, 1429년에는 나뮈르의 장 3세에게서 나뮈르를 구입해 병합하기도 했다.
필리프의 저지대 확장은 멈추지 않았다. 1443년 그는 괴를리츠의 엘리자베트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룩셈부르크 공국의 행정권과 상속권을 확보한 뒤 이를 접수하여 부르고뉴 영토에 편입했다. 이어 1456년에는 위트레흐트와 리에주 양 주교후국의 주교 자리에 각각 자신의 사생아와 조카를 앉혔다. 이렇게 헬러 공국과 프리슬란트를 제외한 저지대 대부분이 필리프의 손아귀에 들어왔으나, 아직은 하나의 나라라고 하기보다는 여러 영토들이 결합한 ‘부르고뉴 복합국’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부르고뉴 복합국의 저지대를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왕국의 확장 전략을 그대로 저지대에 구현하고 있었다. 결혼·상속·매매를 통한 진입, 영향력 확대, 그리고 프랑스 왕실에 편입. 도피네도 프로방스도 그렇게 프랑스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에 흡수되기를 거부했고, 독자적인 왕국을 만드는 길을 선택했다.
발루아
-부르고뉴 가문
, 독립의 길로

그림 3 Rogier van der Weyden, 《Jean Wauquelin presenting his 'Chroniques de Hainaut' to Philip the Good》, 1447–1448, 브뤼셀 왕립 미술관 소장. 선량공 필리프가 후원한 플랑드르파 화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작품으로, 부르고뉴 궁정의 문화와 정치가 만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선량공 필리프는 백년전쟁 중에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균형추 노릇을 했으며, 1435년 아라스 조약을 체결해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청산하는 대가로 사실상 프랑스에서 독립을 인정받았다. 저지대 영지들의 군주가 된 필리프는 부르고뉴와 저지대를 묶는 경제·사회·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필리프의 대표 작위는 부르고뉴 공이며,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는 디종이다. 그러나 필리프는 디종보다는 주로 저지대의 브뤼허, 브뤼셀, 릴, 겐트를 순회하며 수도로 삼았다. 이는 당대 유럽의 순회 궁정 전통에 따른 것이자, 필리프가 여러 저지대 영토들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땅으로 결합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1464년에는 필리프와 그 아들 용담공 샤를(Charles le Téméraire, 1433-1477, 네덜란드어 이름은 카럴Karel de Stoute)이 참석해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각 영토를 대표하는 신분제 의회가 처음으로 소집되어, 저지대를 통합하는 의회 기구의 시초가 되었다.
또 필리프는 프랑스의 궁정 제도를 부르고뉴 복합국에 도입해 부르고뉴 궁정을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호화 궁정으로 만들었다. 이는 필리프의 부를 과시할 뿐만 아니라 부르고뉴와 저지대의 귀족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 필리프가 창설한 황금양모 기사단도 마찬가지로 부르고뉴 복합국의 귀족들을 아우르는 정치적 장치였으며, 또 외국 군주들에게도 기사단의 훈장을 주어 외국과 교류하는 외교 통로가 되기도 했다. 필리프는 얀 판 데이크,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등 당대 유럽을 대표하는 플랑드르파 화가들을 후원했고, 부르고뉴 궁정에 모인 음악가들은 부르고뉴 학파를 형성하는 등 부르고뉴 복합국은 문화적으로도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필리프는 자칭 ‘서부 공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국제적으로 인정된 칭호는 아니었으나 이는 필리프가 프랑스 왕국의 부르고뉴 공일 뿐만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 서부를 다스리는 통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필리프는 프랑스 왕에게도 신성 로마 황제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표방하였다.
1465·1467년 두 차례에 걸쳐 리에주에서 일어난 반란은 저지대의 자율성에 간섭하는 부르고뉴 공과 시민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필리프는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하면서도, 부르고뉴와 저지대의 귀족과 도시민들을 포섭하고자 노력했다. 필리프는 법률가와 재정가 계층을 궁정에 불러들여 귀족으로 만들어, 귀족과 비귀족을 아우르는 엘리트 층을 만들었다. 프랑슈콩테 지방의 돌(1422)과 브라반트 공국의 뢰번(1426)에 대학을 창설해 남부와 북부 모두에 지적 거점을 세움으로써, 학문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부르고뉴 군주가 남북을 아우르는 후원자임을 각인시켰다.
용담공 샤를
, 스러진 왕의 꿈

그림 4 부르고뉴 공국의 후계자 시절의 용담공 샤를 초상화. 목에 걸린 칼라는 황금양모 기사단의 것이다. 로히에르 판 데르 베이던 작, 1454년경.
필리프가 죽자, 그 뒤를 이은 용담공 샤를은 부친이 못다한 저지대 통합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헬러 공국에서는 공작 아르놀트(1410~1473)와 아들 아돌프(1438~1477) 사이에 공위 내전이 벌어졌는데, 샤를은 여기에 개입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결국 헬러 공국을 부르고뉴령으로 편입했다. 이제 저지대 영지들 중에서 부르고뉴 공의 지배를 받지 않는 곳은 프리슬란트만 남게 되었다.
샤를은 프랑스 왕 루이 11세(1423-1483)와 여러 차례 충돌하여 프랑스 내 입지를 강화했고, 부르고뉴와 저지대를 분리하고 있던 로렌 공국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러한 공세에는 그가 정비한 중앙집권 체계와 군제 개혁이 큰 힘이 되었다. 샤를은 저지대와 부르고뉴 각각에 고등법정을 설치해 행정적 통합을 꾀했으며, 강화된 중앙집권으로 거둔 세금을 바탕으로 쇠뇌병·총병·파이크병이 포함된 혼성 상비군을 조직했다. 이는 유럽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근대적 상비군 가운데 하나였다.

그림 5 용담공 샤를 시기(1467~1477)의 부르고뉴 복합국 최대 영토.
샤를은 프랑스라는 강대한 적에 맞서기 위해 스코틀랜드부터 사보이아 공국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동맹망을 형성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도 연을 맺어, 마침내 ‘부르고뉴 왕’(때로는 ‘프리지아 왕’으로도 불림)으로 1473년 11월 25일 트리어 대성당에서 샤를의 대관식을 열기로 합의했다. 돌연 프리드리히 3세가 도주했기에, 부르고뉴와 저지대를 아우르는 새 왕국의 탄생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샤를은 강압적인 중앙집권 정책과 끊임없는 전쟁으로 주변 제후들과 도시들을 적으로 돌려놓았다. 샤를이 알자스와 라인 중류 일대로 세력을 뻗치자, 라인 중류 자유도시들과 무역하는 스위스 서약동맹 도시들은 무역 차질을 염려해 부르고뉴 공과 싸우기로 했다. 이에는 샤를에게 로렌을 빼앗긴 로렌 공 르네 2세, 알자스를 저당 잡힌 티롤 백 지기스문트, 여타 라인 중류의 도시들도 가담했고, 샤를에게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한 적이 있는 루이 11세도 뒤에서 함께했다.

그림 6 낭시 전투 후에 발견된 샤를의 시체. Augustin Feyen-Perrin 작. 1865년.
이 부르고뉴 전쟁에서 샤를의 군대는 마침내 강력한 적수를 만났다. 샤를은 1476년 그랑송 전투와 모라 전투에서 연이어 대패한 뒤, 1477년 낭시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참패했고, 이전에 스위스 포로들을 학살한 보복으로 전장에서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부르고뉴 복합국의 마지막 공작 샤를의 죽음 이후 저지대의 통합 과제를 이어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두 지배자,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를 비교하고, 그들의 통치 차이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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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룩스 3국을 빚다: 부르고뉴 국가와 카를 5세 제국
중세 저지대의 경제·사회 발전
그림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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Тѳм277, CC BY-SA 4.0.
그림 2: 위키미디어 공용 (commons.wikimedia.org/wiki/File:Karte_Haus_Burgund_3.png),
Marco Zanoli (sidonius), CC BY-SA 4.0.
그림 3: 위키미디어 공용 (commons.wikimedia.org/wiki/File:Rogier_van_der_Weyden_-_Presentation_Miniature,_Chroniques_de_Hainaut_KBR_924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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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위키미디어 공용 (commons.wikimedia.org/wiki/File:Charles_the_Bold_146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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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위키미디어 공용 (commons.wikimedia.org/wiki/File:Karte_Haus_Burgund_4_EN.png),
Marco Zanoli (sidonius), CC BY-SA 4.0.
그림 6: 위키미디어 공용 (),
퍼블릭 도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