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연회를 즐기는 황제. 제멋대로 사람을 죽이는 황제의 장인. 자의적으로 지방관을 중복 파견하는 중신들. 경시정권은 시작부터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야기
전한과 후한 사이, 짧게나마 다시 일어난 한나라가 있었다. 그 황제는 경시제 유현, 후한을 세운 광무제의 팔촌 형이다. 농민 반란군 녹림군에서 추대되어 즉위한 그는, 유력한 경쟁자이자 유능한 장수였던 광무제의 형 유연을 제거했다.
이후 녹림군은 장안 인근에서 봉기한 세력과 손잡고 신나라의 왕망을 죽여 한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각지에는 아직 독립 세력들이 할거하고 있었음에도, 경시제는 공신들을 왕과 제후로 삼아 달래는 조치를 취했다.
무능의 전형, 경시제
후한 묘지에서 발굴된 부부 연회 모습을 그린 그림.경시제는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가? 《후한서·유현전》에서는 제후왕들을 세운 이후의 경시제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경시제는 조맹(趙萌)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총애하였다. 이에 정사를 모두 조맹에게 맡기고, 밤낮으로 부인들과 후정(後庭)에서 술 마시며 연회를 즐겼다. 신하들이 정사를 아뢰려 하면, 그는 늘 술에 취해 만나주지 않았다. 부득이하게 할 경우에는 시중(侍中)을 휘장 안에 앉혀 대신 말하게 했는데, 여러 장수들은 황제의 목소리가 아님을 알아채고 나와서는 모두 원망하며 말하였다.
“성패도 아직 알 수 없는데, 어찌 벌써 이렇게 방종할 수 있는가!”
한부인(韓夫人)은 특히 술을 좋아하였다. 언제나 술자리에 시중들고 있는데, 상시(常侍)가 와서 일을 아뢰면, 곧 노하여 말하였다.
“황제께서 지금 나와 술을 마시고 계시는데, 어찌 하필 이때에 일을 들이느냐!”
그러고는 일어나 문서를 올려놓은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후략)
지금까지 유현전을 검토해 보았을 때, 범엽은 유현전에서 유현을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정사를 다스리지 않고, 내정을 일임한 이송과 장인 조맹 중에서도 특히 조맹에게 의존했으며, 여러 부인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고 술에 취해 지낼 뿐이었다. 이는 경시제뿐만이 아니라 유현이 총애하는 부인인 한부인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 한부인은 경시제가 왕망의 목을 받았을 때 경시제의 곁을 지킨 인물로, 경시제가 조맹의 딸을 새로 들여 총애했다고 함에도 여전히 경시제의 부인들을 대표하고 있다.
성패를 아직 알 수 없다는 장수들의 말도 주목할 만하다. 이미 각지에서 왕을 자칭하거나 경시정권의 관직을 사칭하는 등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지방 세력들은 물론, 신나라 시절 일어난 농민 봉기군과 도적들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북을 순행하러 보낸 유수는 초기의 악전고투를 딛고 왕랑과 싸워 성과를 거두고 있었으나,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그러나 술과 여자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한다는 것은 군주의 무능을 묘사하는 상투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실제 정권의 움직임은 어땠을까? 《후한서·유현전》을 더 살펴보자.
경시정권 안팎의 혼란
낭관을 죽이려는 경시제와 조맹 상상화.조맹은 권력을 제 마음대로 휘둘렀고, 상벌을 제 뜻대로 하였다. 어떤 낭리(郎吏)가 조맹의 방종을 비판하자, 경시제는 노하여 칼을 뽑아 그를 찌르려 했다. 이로부터는 더 이상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맹이 시중을 개인적인 원한으로 끌어내어 참수하였는데, 경시제가 나서서 구원하려 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 무렵 이일(李軼)·주유(朱鮪)는 산동에서 멋대로 명령을 내리고, 왕광(王匡)·장앙(張卬)은 관중에서 횡포를 부렸다. 이들이 임명한 관직을 보면, 모두 천한 소인배나 장사치들이었고, 심지어는 부엌의 요리사나 잡역부까지 있었다. 이들은 수놓은 옷과 비단 바지, 화려한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장안 사람들은 이를 풍자하여 노래했다.
“부엌 밑 하인이 중랑장이라네.
양 위를 굽는 자가 기도위라네.
양 머리를 굽는 자가 관내후라네.”
(후략)
경시정권은 중앙과 지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있었다. 이일과 주유가 관동을, 왕광과 장앙이 관중을 다스리고 있었고, 경시제가 신임하는 조맹의 권한은 궁궐 안에 국한되었다. 경시제는 조맹의 횡포를 말리지 못했고, 조맹을 비판하는 관리를 죽이려하기까지 했다. 경시제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조맹을 처벌하는 것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시제는 조맹의 횡포를 방조하기까지 했다.
유현전을 더 따라가면, 이일·주유·왕광·장앙 등은 경시제의 허가 없이 제멋대로 주·군의 관리들을 임명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더욱이, 이들이 임명한 관리들은 관할 구역이 중복되고 교착되어 사람들이 어떤 관리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경시정권의 녹림 출신 공신들은 서로 관할 구역을 나누는 기본적인 권력 배분조차 못 하고 있었다.
경시정권의 한 장군인 이숙은 경시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녹림 출신들이 중용되면서 전쟁에서 공을 세운 미천한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지적했다. 위의 장안에서 돌던 노래도 이러한 경시정권 인사들의 낮은 신분을 비꼬고 있어, 표면적으로는 녹림군의 낮은 계급과 교양 수준을 문제 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녹림을 창설한 왕광과 왕봉은 처음에 사람들의 분쟁을 조정하던 경험이 있었고, 이일은 남양의 사대부 출신으로 통치 계급에 필요한 교양과 지식을 익힌 사람이라는 점에서 낮은 계급이라는 이유로 변명하기 어렵다. 그리고 하층민 출신이라고 통치 능력이 없다는 것은 편견이다. 한나라를 세운 사람들 중에는 유현의 조상이기도 한 창업 군주인 동네 백수 유방, 그 유방을 섬긴 하급 관리 소하와 조참, 도축업자 번쾌, 마부 하후영, 비단 장수 관영 등 녹림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항우를 이겨, 2백 년 지속된 새 왕조를 만들었다.
유방과 유현 모두 협객 출신으로 시작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방은 영포와 같은 자신과 동격인 인물조차 자기 명령에 순순히 순종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고집만 센 독불장군도 아니었다. 옳은 말과 그른 말을 구분하여 듣고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현은 시작부터 다른 녹림 장수들의 휘하에서 출발했고, 황제로 추대된 것도 리더십을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리더십이 없어서 녹림 공신들에게 휘둘리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이는 경시제 개인의 인사 관리에 문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한 나라임에도 통합적인 체계가 없다는 취약성을 만들어 냈다. 경시제의 중신들이 서로 관리 임용에서조차 꼬이는 난맥상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상황에서는 군공에 따른 승진마저도 공평하게 진행된다는 근거가 없다. 공적대로라면 당연히 억울하게 죽은 유연이 중신으로 남았을 것이다. 유연은 지나치게 공이 커서 제거되어야 했다 하더라도, 신나라를 무너뜨릴 때 중요한 공적을 세운 등엽과 우광도 부한장군과 보한장군으로 인정받았으나 경시정권의 중핵에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이는 경시정권이 녹림과 경시제의 근신들 위주의 폐쇄적인 정부였음을 암시한다.
또 한 가지는 군공과 정치 능력은 별개라는 것을 경시정권이 충분히 고려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유방은 공적을 세운 사람들에게 작위를 주어 보상하고 그들 중에서 중신을 뽑았으나, 나라를 다스릴 능력도 중요하게 보았다. 유방은 죽을 때 왕릉·진평·주발 등의 인품을 정확하게 간파해 승상을 맡겼고, 그들은 각자 자기 능력대로 여씨 정권을 무너트리는 데에 기여했다. 그리고 자신이 경멸한 유학자 숙손통도 통일 이후에는 등용했다. 유현은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도탄에 빠진 백성
풍연의 진언에 근거한 경시정권의 약탈 현장 상상화.경시정권의 어지러운 통치는 유현전에만 묘사되지 않는다. 경시제는 즉위 후 각지에 지방관을 파견하거나 신(新)의 지방관을 귀의시켜 통치 체계를 세우려 했고, 그 가운데 포영(鮑永)은 상서복야로 발탁되어 행(行) 대장군사(事)로 하동·병주·삭방을 진무하는 임무를 맡았다.
서기 24년 포영이 출발할 때, 풍연(馮衍)이 올린 진언은 《후한서·풍연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경시 조정의 통치를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약탈을 일삼아, 천륜을 거스르고 도리를 끊었습니다. 아비와 자식을 죽이고, 아내와 딸을 범하며,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굶주린 자는 입에 댈 것조차 없고, 추운 자는 벌거벗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원통함과 절망이 쌓여도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는 《유현전》보다 현장의 참상을 더 구체적으로 전하는 증언이다. 유현전이 범엽이 유현을 편향적으로 기록한 것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요약하면, 경시정권은 수도와 지방 간의 유기적인 관계가 끊어져 있었다. 수도에서는 경시제가 정권을 맡긴 이송과 조맹의 월권과 횡포에 의존·가담하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이일·주유·왕광·장앙 등이 관료 임명과 처벌을 무질서하게 실시하고 있었다. 그 틈에 경시정권의 여러 장수들은 노략과 폭력을 일삼고 있어, 민생 파탄과 민심 이반이 심각했다.
찢어지는 한나라
경시제의 제후왕 책봉과 당시의 독립 세력의 분포도. 24년에는 양왕 유영이 독립하고, 왕랑의 세력은 유수에게 병합됨.그럼에도 경시정권의 지방 통치 시도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24년 가을, 장충(張忠)을 익주자사로 임명하고 녹림 출신 공신인 주공후 이보(李寶)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익주를 진무하도록 했다. 당시 익주는 신나라의 촉군태수 출신인 공손술이 한나라의 권위를 사칭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큰 저항 없이 익주 최대의 도시 성도 근처인 면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공손술은 순순히 경시제의 지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공손술은 아우 공손회에게 군대를 주어 면죽에서 이보·장충을 대파했고, 이보 등은 도주했다. 기세등등해진 공손술은 촉나라 왕을 일컬었고, 25년에는 성(成)나라 황제로 자립하기에 이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한중왕 유가가 건재해 성나라를 견제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유가는 경시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26년까지 더 세력을 유지하고 버틸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24년 5월 27일(음력 5월 갑진일)에는 드디어 하북에서 한 성제의 아들 유자여를 자칭하며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왕랑 정권의 수도 한단을 함락해 왕랑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경시제는 유수를 소왕(蕭王)에 봉했다. 왕위를 받으러 하북 원정군을 해산하고 돌아오라는 조치도 동반되었다. 누가 봐도 유수를 무장해제하고 ‘안전한 존재’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유수는 ‘아직 하북이 평정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귀환을 거절했다. 범엽은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때부터 경시제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유수가 독립을 선언하려면 더 지나야 하지만, 실제로는 이때 이미 경시제와 유수는 돌이킬 수 없는 파탄을 맞이한 것이다. 그렇게 포영이 진무하는 병주 일대를 제외한 하북 전체가 경시정권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유수뿐만이 아니었다. 경시제를 찾아와 왕으로 임명된 양나라 왕 유영 역시 경시제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자립했으며, 주변 군국을 공격해 28성을 장악했다. 위에서 언급한 성 황제 공손술과, 이미 회남에서 왕을 일컫고 있던 이헌도 빼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경시정권 하의 한나라는 조각조각 분해되어,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면 장안의 경시정권은 안전한가?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경시정권의 한나라 질서 아래에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던 녹림의 선배 농민 반란군, 적미(赤眉)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시정권이 적미의 두령들에게 봉토를 약속하고 항복을 받아냈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연표
24년, 상서복야 포영을 병주 진무 목적으로 파견함.
24년 5월 27일, 유수가 한단을 함락하고 왕랑을 참수함.
24년, 유수를 소왕으로 봉하고 군을 해산하도록 명령했으나 듣지 않음.
24년, 양왕 유영이 자립해 28성을 점령함.
24년 가을, 경시제가 파견한 주공후 이보·익주자사 장충이 면죽에서 공손술에게 격퇴됨.
24년, 공손술이 촉왕을 일컬음.
24년 음력 12월, 적미가 함곡관을 넘어옴.
요약
경시제는 정무를 돌보지 않고 이송과 장인 조맹에게 조정의 전권을 맡겼으며, 조맹의 횡포에 의존·가담했다.
지방 행정을 맡은 이일·주유·왕광·장앙 등의 통치는 어지러웠고, 각지의 장군들은 약탈과 폭력을 일삼아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이 틈을 타, 하북을 평정한 유수, 경시정권의 관리를 내쫓은 공손술 등 각지의 군웅들이 자립했고, 농민 반란군 세력인 적미가 장안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림 출처
그림 1. 马学曾, 古都洛阳 pg.74, 위키미디어 커먼즈,
그림 2. ChatGPT 생성 이미지.
그림 3. GhatGPT 생성 이미지.
그림 4. 中央研究院,《中華文明之時空基礎架構系統》第一版,(台北,2002年9月)。경시정권 제후왕·독립 세력 현황은 글쓴이 편집/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