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수상한 피드백들
아내와 나의 목표는 분명했다. 아이가 걷게 하는 거였다. 일단 자기 스스로 일어나 걸을 줄만 알면 다음 갈 곳을 정할 때 선택의 폭이 크게 넓어지기 때문이었다. 특히 어린이집과 같은 공동체 생활을 아이가 경험해 보게 하려면 걷는 게 사실상 필수였다. 선생님의 수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돌보아야 하는 아이들은 한둘이 아닐 텐데, 걷지 못하는 아이까지 데리고 있어야 한다? 어린이집 수지타산은 둘째 치고, 보호가 필요한 다른 아이들까지 덩달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거라 ‘걸어야만 들어올 수 있다’는 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도 이 점은 기꺼이 수긍했다.
그렇다고 어린이집이 목표였던 건 아니다. 하지만 여러 장애아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느 순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문제에 봉착하던데, 그게 여간 머리 아픈 고민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쁨과 설렘 속에 첫 학부모가 될 때는 뭔가를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막내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 기쁨과 설렘을 고민과 염려가 대체할 거라는 걸 다른 부모들을 통한 간접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다가올 미래였고, 그날을 위해 미리미리 해두어야 할 것이 많았다. 아이의 직립보행은, 해두어야 하는 그 많은 일 중 중요한 첫 단추였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소식이 없었다. 아내는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나서야 진짜 재활이 시작된다’는 의지를 가지고 입원 병동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를 부지런히 운동시켰다. 낮 운동 시간에 했던 것을 병실 매트에서 똑같이 따라 해 보고, 걸을 줄 아는 형과 누나들을 모방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아이는 격렬히 반항하며 쉬고 싶음을 주장하거나, 시범을 보이는 엄마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엄마 운동했으니 자기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듯.
모든 일과를 끝내고 돌아온 입원 병동의 풍경은 대체로 ‘장터’를 방불케 한다. 30분마다 아이들을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치료실로 입장시킨 보호자들의 지친 하루가 마무리되는 곳이기에, 부모들끼리 할 이야기도 많고 쉬어야 하기도 한다. 저녁 식사를 아이들에게 먹이는 소리, 잘 먹지 않는 아이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해 틀어놓은 각종 유튜브 혹은 장난감 소리, 보호자들 보라고 틀어둔 TV 소리, 엄마들끼리 얘기하는 소리, 멀리 있는 식구들과 영상통화 하는 소리가 모두 섞여 있다.
그 소란 속에서 아내는 ‘여기가 진짜 재활실’이라며 막내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배밀이 조금 하는 실력으로 입원했던 막내는, 이제 조금씩 몸을 들고 ‘네발 기기’를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무거운 녀석이 기어가는 속도마저 점점 빨라져 아내는 관절 고통이 심해진다고 호소했을 정도였지만, 거기서 멈춘 듯 발전이 없었다. 열심히 하던 아내도 점점 힘을 잃었다. 성과가 나타나질 않으니 동기부여가 안 됐을 것이다. 아예 손을 놓은 건 아니지만, 어떤 날은 아이를 일찍 재우고 자기가 할 운동을 스스로 찾아서 하거나 다른 보호자들과 계속 수다를 떠는 등 자기 일과를 소화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선생님들이 수상한 피드백을 주기 시작했다. 원래 각 재활 수업이 끝나서 교실로 데리러 가면 선생님들이 부모에게 오늘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구성했고 아이의 반응이 어땠는지 등을 짧게 나누는데, 여기서 예상밖의 소리가 전달되는 경우가 증가한 것이다. “느낌일 뿐이긴 하지만, 아이가 할 수 있는데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거 같아요.” “아이가 힘도 세고, 움직임도 빠른 게, 분명 걸을 수 있을 거 같은데 너무 오래 소식이 없네요.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같기도 하고요.” “막내, 오늘 수업에서는 하기 싫다는 표시를 분명하게 했어요. 싫고 좋고가 분명한 거 같아요.”
말도 못 하는 아이, 아직 인지도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아이를 취조실로 데려가 솔직히 말하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이 선생님들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다. 우리도 가끔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적 근거나 의학적 예시는 없다. 그냥 키워본 사람이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나와 아내도 가끔씩 ‘저 놈 수상하다’고 반진반농으로 말하곤 했었다. “우리, 사실은 이 녀석에게 크게 속은 건 아닐까? 막내는 그저 매우 게으른 아이였던 걸까? 극단적으로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성격인 건 아닐까?”
아이의 병이 무엇인지 밝혀지기 전, 우리가 아이를 자폐라고 생각했을 때, 센터에서 만난 한 물리치료 선생님의 피드백도 기억이 난다. 그 선생님과 대화를 하다가 문득 자폐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낸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눈에 띄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폐요?”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때 “네”라고만 답하고 넘어갔는데, 선생님은 그날 수업이 끝나고 다시 나에게 찾아와 질문했었다. “왜 자폐라고 생각하세요?” 자기는 자폐라고 전혀 보지 않고 있었는데, 보호자 입에서 너무나 의외의 단어가 나와 이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의 증상을 간단히 설명해 줬고, 선생님은 수긍하거나 반박하지 않고 “그렇군요.”하고 말았었다. 말을 아끼려고 그렇게 말했을 뿐, 동의할 수 없다는 뉘앙스가 분명했다. 그런 일이 있고서 한참 후, 우리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막내가 자폐보다 지능 부족에 더 가깝다는 걸 알게 됐다. 난 검사 결과를 들을 때 자폐라는 말을 의아해했던 그 물리치료 선생님이 생각났었다. 전문가가 보는 건 확실히 다르구나,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 ‘아이가 사실은 할 수 있는데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거 같다’는 선생님들의 피드백이 예사롭지 않게 들릴 수밖에. 어쩌면 그건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게으른 성격은 아주 따끔하게 교정시켜 줄 자신이 있기도 했다. 근거가 없지도 않았다. 일단 나부터도 지독히 게으르고, 하기 싫은 일은 때려죽여도 못하는 성격이다. 내가 첫 번째로 일했던 잡지사의 총무님은 십수 년 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그때의 나를 회상하며, “무척 게을렀잖아”라고 표현하셨을 정도였다. 옆에 아내가 있어서 상당히 순화한 게 그 정도였다. 그분이 말씀하셨던 게으름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내가 하고 싶을 때에 한다는 의미가 다분했다.
우리 첫째도 나의 그런 점을 빼다 박았다. 그래서 숨겨진 문제까지 창조적으로 찾아내 박멸시켜야 속이 풀리는 우리 아내에게 나와 첫째는 반복된 꾸지람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만 골라서 하고, 나머지 일을 남에게 미루면 어떻게 같이 사냐는 게 아내의 일관된 일갈이었다. 아내 앞에서 우리는 늘 작고 작고 작았고, 항상 위축돼 있었다. 셋째가 그런 피를 물려받았다면, 그리고 그 아이가 스스로 걷고 싶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생각보다 작은 문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류의 피를 전문적으로 제압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같은 집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도 가설일 뿐,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리테스트도 불가능하고, 전문 상담도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고 나 같이 게으른 남편에게 한이 맺혀 있던 아내 입장에서, ‘하기 싫어서 안 한다’는 피드백을 웃어넘길 수만도 없었다. 나쁜 싹은 미리 잘라야 하니까. 그래서 아내는 혹여 있을지 모르는 그 ‘하고 싶은 것만 한다’의 뿌리를 뽑기 위해 그렇게나 열심히 아이를 굴렸다. 그리고 잔소리 멘트 하나를 새로 늘렸다. “(일어나서 한 번만 더 해보자,라는 의미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없어.” 게으른 남편과 자식 변화시키는 아내의 주 무기는 잔소리였기에, 그 효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나는 자신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저 말을 도입해 쓰고 있다. 지금까지.
그 소리가 얼마나 주입됐을까? 어느 날 집에 있던 나에게 역사적인 동영상 하나가 도착한다.
27. 살아서도 주마등이 보이더라
난 내 첫걸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기억력이라는 면에서 특별한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자신의 첫 발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대신 우리에게는 다른 기억들이 있다. 처음 학교란 곳에 입학했을 때 낯선 분위기 속에서 줄을 서 있던 기억, 처음 부모님 집을 나섰던 기억, 처음 내 통장에 내 힘으로 번 돈이 입금됐을 때의 기억, 처음 몰았던 자동차, 그 옆에 처음 태웠던 사람에 대한 기억... 사람의 삶은 온갖 첫걸음들로 점철돼 있다. 새록히 기억할 수 있는 그 수많은 걸음들이 우리를 일으키고, 다시 걷게 하고, 앞으로 달리게 한다.
우리 막내도 자기의 첫걸음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우리 가족에겐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막내가 커서 자기 첫걸음을 기억한다는 건,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유전자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기억력을 선물했거나,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이 날 정도로 너무 늦게 걸음을 익혔다거나. 전자의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고, 후자의 가능성은 농후한 상황에서, 아이가 자기 걸음을 망각한다는 건 그만큼 일찍 걸었다는 뜻이 된다. 한 때 인생 최대 목표였던 걸음이라는 행위가 어느덧 아이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걸음으로부터 아이는 차곡차곡 자신의 첫걸음들을 쌓아갈 것이다. 병원 밖에서 처음 자기 또래들을 만나고, 친구 집에 처음으로 놀러 가고, 처음 우리 품에서 벗어나 자기의 꿈을 좇고, 막내 이름으로 판 도장으로 첫 통장을 개설하고, 어쩌면 내가 젊은 날 몰았던 차를 타고 처음 면허증도 따고, 그 옆에 누군가를 처음 태우고... 그 아이의 인생도 그렇게 평범한 기억들로 채워져 가기를 나는 바라고 또 바란다. 모든 부모가 그럴 것이다. 죽는 순간 주마등처럼 펼쳐진다는 기억들을, 부모는 희망이라는 형태로 살아있는 아이들 눈 속에서 매일, 이르게 본다.
아이가 먼 병원에 있어 그 눈을 매일 볼 수 없었던 나는 다른 곳에서 그 ‘이른 주마등’을 찾아야 했다. 시대가 좋아 동영상이나 영상 통화 따위로 제법 해결이 됐다. 병원 생활에 익숙해지고 그곳 보호자들과 친해진 아내가, 점점 영상을 드물게 보내고 영상통화마저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게 유일한 문제였다. 그래서 난 같은 영상을 보고 또 보며 질리지 않는 마음을 갖추게 됐다. 덩달아 막내 영상을 수도 없이 본 첫째와 둘째는, 영상에 녹음된 모든 소리들을 순서대로 외우기까지 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막내 영상을 옆에 틀어놓은 채 일하고 있었다. 갑자기 카톡이 울렸다. 모처럼 아내가 동영상을 보냈다는 걸 알고 부리나케 전화기 화면을 켰다. 순간 세상이 진공상태로 변했다. 숨이 턱 막혔다. 그러다 주변이 조용해졌고, 그 어떤 소리도 뚫을 수 없을 정도로 공기의 농도가 높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농도가 높아 책상에 앉은 채로 자맥질을 하면 내 몸이 떠오를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앞으로 영원히 질리지 않을 영상이 하나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막내가 첫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물론 오로지 자기 두 발의 힘으로만 걷는 건 아니었다. 아이용 걸음 보조기를 두 손으로 꼭 붙들고 있는 상태였고, 허리에 힘을 더 받으라고 복대 비슷한 띠가 팽팽히 조여져 있었다. 다리의 힘으로 서 있다기보다 보조기를 붙들고 있는 팔힘으로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 몸은 심하게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언제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각도였다. 하지만 고꾸라지지 않았다. 막내는 아주 힘겹게, 그리고 아주 느리게, 첫 발을 떼고 바로 앞을 짚었다. 보조기를 두 팔로 밀었다. 약간 기우뚱했지만 버텼다. 뒷발을 앞으로 옮겼다. 다시 기우뚱했지만, 또 버텼다. 동시에 보조기를 앞으로 밀었다. 그렇게 세 걸음만큼 이동했다.
아내의 ‘우와!’하는 소리가 영상 배경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아내다웠다. 반면 나는 혼자 책상 앞에서 ‘억’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숨을 급히 들이키니 나는 소리였다. 나다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억’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것으로 바뀌었다. 영상을 세 번 정도 본 후에야 내 뇌가 정보를 처리하기 시작하면서 상황 파악이 된 것이다. 아이가 처음 걸었다는, 그 믿기지 않는 일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나는 둔하기 짝이 없었다. 나답지 않은 소리에 첫째와 둘째가 놀라 달려왔다. 시대가 좋아져 자초지종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버튼 한 번 눌렀을 뿐인데, 아이들도 복제한 듯 나와 똑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날 우리 셋은 틈만 나면 그 영상을 돌려봤다. 잠이 들 때까지 그랬다.
아이들과 흥분해서 영상을 본 뒤, 아내와 어렵게 통화가 연결됐다. 그런데 아내는 의외로 차분했다.
“걸은 거야? 드디어?”
“에이... 그 정도 가지고 아직 걸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아니, 뭐야 이 냉담한 반응은.”
“보조기 쓰고도 몇 걸음 못 걸어. 갈 길이 멀어.”
“그래도 이게 어디야!”
“맞아. 너무 좋아. 그래도 아직 걸은 건 아니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내도 신이 난 게 분명했다. 뜸했던 영상 보내기를 그다음 날부터 이어갔기 때문이다. 전부 아이가 서툴게 걷는, 각도만 달랐지 거의 비슷한 영상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영상들이 우리 눈에는 충격적으로 다른 모습이었고, 폭발적인 성장의 기록이었다. 영상이 거듭되면서 아이가 사용하던 걸음 보조기가 스리슬쩍 사라졌다. 대신 선생님들이 아이의 허리만 받친 채 걷는 걸 도왔다. 아이가 잘 걸으라고 발 앞에 축구공 같은 걸 놓고 차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앞으로 기울어져 기우뚱 걷던 막내는, 허리를 점점 꼿꼿이 세우고, 발을 까불어 공도 차더니, 무릎을 폈다 접었다 들썩거리기까지 했다.
난 그 영상들을 시간 순서로 모아 목록으로 만들어 재생시켜 두었다. 시간에 따라 아이의 걸음걸이가 굳건해지는 게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내 말대로 아직 걷는 건 아니지만, 그날이 가까워지고 있었음을 의심할 수 없었다. 여성분이 ‘저기요..’ 말만 걸었는데 남자는 이미 상상 속에서 그 여자와 손자를 보고 이름까지 짓고 있다는 농담이 있다. 막내를 보는 내가 그랬다. 아이는 보조기 붙잡고 섰을 뿐인데, 나는 이미 그 아이의 미래까지 보고 있었다. 영상을 틀어놓은 화면 위로, 나와 같이 뛰고, 캐치볼을 하고, 내 품으로 곧장 달려드는 막내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지나갔다.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도무지 일을 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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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음 편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아, 저희 가정에 끝이 온 건 아니라.. 써둔 분량이 끝났습니다 흐흐
그 동안 즐거운 게시판에 우울한 이야기 남긴 것 못내 죄송했었고... 잘 참아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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