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너는 우리가 불편했을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위대한 질문이면서 난제이기도 하다. 너무 위대하고 너무 어려워 모두가 각자의 답을 찾아 정착하는, 그런 류의 질문이다. 몸을 뒤집거나 기는 것, 심지어 물건을 집는 것조차 스스로 힘으로 익힐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 우리 막내를 보며 이 질문은 우리에게 각별히 더 어려워졌다.
아이의 남다른 상태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난 샤워를 하며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 아이보다 딱 하루만 더 살게 해 주세요.”
그리고 곧바로 내 입을 때리고 다시 기도했다.
“하나님, 방금 기도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말실수했습니다.”
내가 저 아이 평생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첫 기도 속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모로서 마음은 요람부터 무덤까지 부족함 없이 채워주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건 마음일 뿐이고, 내가 그럴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아이 옆에 평생을 붙어 아이보다 더 길게 산다면, 아이에게는 오히려 저주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 역시 사실임을 나는 잘 안다.
부모가 자식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사람마다 다르더라도 딱 하나 겹치는 게 있는데, 바로 ‘Not all’ 즉 ‘모두는 아니다’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건 모두일 수 없다. 애초부터 부모가 가진 능력이 유한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사람의 성장에 모든 영양이 고르게 필요한데, 그 영양 중에 ‘결핍’도 있기 때문이다. 난 이걸 우리 동네 재활 선생님을 통해 거듭 배웠다.
아내가 잠복근무까지 해가며 뚫어낸(상세 이야기는 지난 이야기 중에 있다) 그 재활센터의 담당 선생님은 확신이 가득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자신감이 넘치고, 어떤 질문을 받든 자동판매기처럼 대답할 수 있었다. 난 아직도 그분이 뭔가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교만하다거나 남의 의견을 묵살한다거나 하는 분은 전혀 아니었다. 아이의 재활에 관해서는 스스로가 하고 있는 일과 자신의 실력에 흔들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 태도가 장애 아이를 처음 키우는 우리 같은 부모에게는 든든함이 되어주기도 했다.
처음 우리 아이를 본 선생님은 요동이 없었다. 아이고, 아이가 많이 어렵군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수고 많으셨어요, 와 같은 예상 가능한 반응은 한 톨도 없었다. 그 선생님의 첫 문장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저한테 잘 오셨어요. 제가 6개월 안에 걷게 할게요.”
어떤 아이든 나는 걷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뉘앙스에 잔뜩 있었던 건지, 정말로 저 첫 문장에 이어 그렇게 말했던 건지는 지금에 와서 헷갈리지만, 우리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매일처럼 30분씩 차를 몰아 30분짜리 수업을 받았다. 아이가 굴러서라도 이동할 수 있게 대근육이라는 걸 길러주는 동작들을 했다. 윗몸일으키기, 엎드려 두 팔로 버티기, 근육 스트레칭 정도였다. 물론 아이가 이런 것들을 직접 할 수는 없으니 선생님이 직접 아이를 잡고 일으켰다 눕혔다를 반복하고, 억지로 엎드려 버티게 하고, 부자연스러운 스트레칭 자세로 아이를 잡아당겼다. 아이보다 선생님이 더 가쁜 숨을 쉬고, 더 많이 땀을 흘렸다. 아이 입장에서는 30분 동안 울고불고하면 일이 끝나 있었다.
“이렇게 수동적으로 운동을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많은 운동을 한 거예요. 아마 오후에 푹 잘 거예요.” 오후까지 갈 것도 없이 아이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자기가 자기 근육을 직접 움직이지 않고도 운동이 된다는 말이 미심쩍었지만, 일단 아이가 곯아떨어지는 건 맞았기 때문에 의문이 의심으로 커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선생님의 수업은 아이만을 위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의심할 새가 없었다. 동작을 할 때마다 선생님은 예의 그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우리 가족(그때는 막내 수업을 온 식구가 참관했다)에게 “잘 보고 배우세요”라고 강조했었다. 여기서 하는 걸 나중에 집에 가서도 똑같이 해줘야 아이가 빨리 좋아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분은 우리 식구 모두가 재활 선생님이 되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30분뿐이지만, 가족들은 나머지 시간 내내 같이 계시니까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팁이 있었는데, 아이를 불편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아이 입장에서 무엇이든 자동으로 이뤄지면, 그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고 했다. 아쉬워서 움직이고, 움직여서 머리를 쓰도록 해야 한다는 게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아무도 지목하지 않았는데 둘째가 이 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 막내가 보기만 해도 방긋방긋 웃던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막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9살 위 자기 형이다.
둘째는 열심이었다. 윗몸일으키기는 힘이 많이 들어가 아빠인 내가 맡았는데, 그 외에 기어가기나 매트 위에서 두 팔로 엎드려 버티게 하기 등은 둘째도 적극 참여했다. 아이가 버틸 수 있도록 옆에서 ‘조금만 더! 잘했어! 잘했어!’ 응원하기도 하고, 앞으로 전진하도록 아이 정면에서 목소리 높여 유인하기도 했다. 아이가 울면 ‘힘들지? 형이 안아줄까?’ 하기도 했다가 ‘울지 마! 지금 울 때가 아냐!’ 하기도 했다. 난 둘째가 나중에 재활 교사가 될 것만 같았다.
둘째 얘기만 하는 건, 둘째가 인간 성장에 필요한 ‘결핍’이라는 걸 줄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동생 훈련에 있어서는 ‘편리의 결핍’인 ‘불편’을 톡톡히 제공하는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장녀는 아무래도 누나라서 그런지 마음이 약했다. 지금도 큰딸이 세상에서 가장 흐뭇하고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는 막내를 볼 때뿐이다. 막내가 울면 같이 힘들어하고, 막내가 어떻게든 웃도록 만든다. 할머니 사랑을 이른 나이에 익혔기 때문에 재활 선생님으로서는 어울리지 않았다.
재활센터 선생님의 보이지 않는 지휘 아래 우리 집은 점점 재활센터로 변해갔다. 단지 큰 매트가 바닥에 잔뜩 깔리고, 짐볼이 생기고, 아이 유인할 물건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는 게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려면 양육자인 우리가 ‘불편함’을 일부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조금씩 이해하고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형 얼굴을 아주 조금 멀리에 위치시키고, 두 번 안아줄 걸 한 번만 안아줘 어떤 식으로든 요구하게 만들고, 누워있던 시간에 복근 운동을 하게 하고, 얌전히 있는 아이를 괜히 굴려서 울게 만들고, 즐기는 음식 공짜로 주지 않고...
그렇게 꾸준히 불편하게 했더니 어느 날 아이가 엎어진 채로 한두 뼘 전진했다. 첫 배밀이었다. 그날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에 월드컵 결승에서 한국이 우승한 줄 알았단다.
12. 넌 기쁨 확대경
아직도 그 효과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약을 한 달 먹으면서 재활도 병행하니 아이는 조금씩 좋아졌다. 뒤집기만 겨우 하던 아이가 몇 바퀴 더 구를 수 있게 됐고, 드디어는 배밀이 흉내도 내게 됐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잘 큰 경우, 부모들은 이러한 유아기 이동 방법의 변천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다. 12월에는 춥다가 4월에는 따듯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누워서 시간을 보낼 때 아이들은 부모와 천장이 세상의 전부다. 그러면서 소리를 통해 시야 밖에 뭔가 있다는 걸 알아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몸을 뒤집는다. 자세를 바꾸면서 시야가 넓어진다. 뭔가 신기한 것들이 감각 기관을 통해 아이에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이의 뇌는 이런 신호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며 학습한다.
뒤집던 아이는 몇 바퀴 더 돌기 시작한다. 활동 범위가 확장되는 것으로, 시야도 당연히 늘어나고, 그에 따라 뇌도 급히 성장한다. 하지만 구르기는 불편하고 방향 조정이 쉽지 않다. 기어야 할 차례인데, 기려면 두 팔과 두 발이 튼튼해져야 하고, 등과 배 근육이 상체를 공중에 유지시킬 정도로 자라야 한다. 그래서 먼저 하는 게 배밀이다. 배를 바닥에 붙인 채 팔 힘으로 몸을 끌고 발로 바닥을 밀면서 나아가는 이동법이다. 아이라, 몸이 아직 가벼우니 할 수 있다.
이렇게만 해도 아이는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굴러 다닐 때는 수평적으로 넓어졌던 시야가 처음 수직적 확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시야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시야각이 생기고, 이를 해석하느라 아이의 뇌는 다시 한번 발전의 계기를 갖게 된다. 그러다 몸이 자연스럽게 영글어 다리가 팔을 보조하게 되고, 드디어 네 발 기기, 즉 우리가 흔히 아는 무릎 기어 다니기를 하게 된다.
네 발로 기어 다닐 수 있게 되면 시야는 더 높아지고 이동에 속도가 붙어 아이의 학습 과정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러다가 벽을 잡고 몸을 일으키고, 한 발 한 발 옆 걸음도 시도하게 되며, 결국 걸음마에 이른다. 단계별 뇌 발달이 당연하게 따라붙는데, 걸음마를 하며 두 손이 자유롭게 되면서부터 아이의 뇌는 폭발적으로 자란다.
일반 가족들의 경우 첫 걸음마나 첫 ‘엄마’ 소리에 기뻐 아우성을 치지 첫 구르기나 배밀이 같은 것에 환호하지는 않는다. 우리도 첫째나 둘째 때는 그랬다. 첫째가 처음으로 서서 책꽂이 아래 칸 내용물을 전부 방바닥에 펼쳐놓은 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을 때는 선명히 기억나지만, 그 아이의 첫 구르기나 첫 배밀이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십 년 만에 다시 시작한 육아에 얼마나 큰 인상을 남기려는지, 우리 막내는 이 모든 과정을 아주 느리게 지나갔다. 세상 모든 사물에 확대경을 가져다 대면 추상화가 나온다고 어떤 유명 디자이너가 말했다. 세상 모든 곳에 추상이 숨어 있다며, 자기는 그것을 따다가 쓸 뿐이라고 했었다. 천천히 가주는 아이 덕분에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육아 동안 놓쳤던 성장의 세밀한 과정들에 현미경을 가져다 댈 수 있게 됐다. 그 속에 숨어있던 기쁨들이 발굴됐다. 막내가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아직 아이가 가만히 누워서 가끔 뒤집기를 할까 말까 한 때였다. 이제 막 약 복용을 시작했었고, 재활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장난감을 눈앞에 가져다 대도 쳐다보지 않던 아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은 아이가 자기 위에 매달려 있는 인형에 손을 쓱 뻗쳤다. 그걸 아내가 봤다. 비명 같은 환호를 질렀다. 우연인가 싶어서 다시 장난감을 눈앞에서 흔들었다. 이번에는 영상도 촬영했다. 조금 기다리자 아이는 다시 한번 손을 천천히 뻗었다. 그 영상에는 아내의 “옳지!”가 생생하게 담겼다. 난 아직도 가끔 그 영상을 되돌려 보는데, 아이의 손 뻗음이 아니라 아내의 고음역대 감격 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기쁨을 주체 못 하는 그 소리는 들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뽑힌다. 좀처럼 질리지 않는 모성애의 현현이다.
겨우 손 뻗는 것 하나가 우리에게 콧등 시리게 하는 추억이 됐다. 그러니 그다음에 이어지는 날들이 어땠을까. 아이가 처음으로 두 바퀴 이상 굴렀을 때, 우리 넷은 아이를 둘러싸고 부둥켜안았다. 아이가 처음 두 팔로 지탱하여 앉아 있는 것에 성공했을 때 우리는 춤을 췄다.(스스로 앉은 것은 아니고, 앉혀줬을 때 넘어지지 않았다.) 내 컴퓨터 바탕화면은 아이가 처음 혼자 앉아 있을 때의 사진이다.
아이가 엎드린 자세에서부터 처음으로 앉는 자세로 몸을 스스로 일으켰을 때 그 자리에 둘째만 있었는데, 둘째는 너무 놀라서 불이라도 난 것처럼 온 가족을 소환했다. 그러더니 자기가 본 것을 허둥지둥 묘사했다. 우리는 믿지 않았다. 둘째가 아이를 채근하며 여러 번 재현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며칠 뒤 아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스스로 앉기에 성공했고, 둘째는 의기양양했다. 자기가 본 게 진짜였는데 왜 믿지 않았냐고, 뒤늦게 증명해 준 막내를 꼭 껴안고 불을 부비댔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 중 누군가 큰 소리로 모두를 부를 때 우리는 우당탕탕 모이는 게 습관이 됐다. “막내가!”라고 소리치면 우리는 이미 모여 있었다. 아이는 오늘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모두가 기대에 찬 눈으로 아이를 둘러쌌고, 그러면 소환자가 침을 튀겨가며 자기가 본 것을 얘기했다. 어쩌다 우연히 된 것도 있었고, 진짜 아이가 성장해서 되는 것도 있었다. 어느 것이든 우리에게는 끝나지 않는 클라이맥스였다. 매일이 블록버스터 같은 삶, 막내 아니었다면 알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험 같은 삶도 곧 중단될 것이었다. 재활의 맛을 본 아내가 진짜 재활을 시작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입원 재활’이었다. 물론 기쁨 자체가 멈춘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무대가 옮겨간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