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은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탕거 전투 : 장비 일생일대의 대승
-한중 전투 : 유비의 비상
-형주 공방전 : 불멸로 남은 이름
-이릉 전투 : 파국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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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년 여름, 촉한의 초대 황제 유비는 백제성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뒤를 이어 태자 유선이 즉위했지요. 유비는 승상 제갈량에게 탁고하고, 상서령 이엄이 보조하도록 함으로써 뒷일에 대비했습니다. 이로써 제갈량은 촉한의 명실상부한 제 이인자이자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촉한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선제 유비가 이릉에서 패한 이후로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한가태수 황원이 군사를 일으켜 촉군을 침범해 왔고, 원래부터 동오와 내통하고 있던 익주군의 호족 옹개 역시 반란을 일으켜 군을 점거했습니다. 게다가 옹개는 동향 출신인 또다른 호족 맹획을 시켜 이민족들을 충동질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지요. 유비 살아생전에 이미 모반했던 적이 있는 월수군의 이민족 왕 고정 또한 재차 반기를 들었습니다. 또 장가태수 주포도 뒤이어 반란을 일으켰었습니다.
이중 황원의 반란은 수도인 성도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생하였기에 자칫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촉군태수 양홍이 적절히 대처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황원을 사로잡았지요. 반면 익주 남부, 이른바 남중(南中)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워낙 멀리 떨어진 곳이라 촉한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고 옹개나 고정 등의 세력 또한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세력은 남중 네 개 군 중 셋을 호령했으며 오직 영창군만이 오관연공조(五官掾功曹) 여개와 부승(府丞) 왕항의 지휘하에 저항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유선이 즉위한 시점에서 촉한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익주 지역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걸쳐 익주는 본래 한족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사천 분지에 있었던 파(巴)나라와 촉(蜀)나라는 모두 이민족의 국가였습니다. 그러다 전국시대 말엽, 대략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진(秦)이 이곳을 점령하면서부터 익주 북부 일대가 한족의 지배 강역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원래 살던 이민족들은 점차 익주 남부의 오지로 밀려났는데 그곳이 바로 남중 지역입니다. 물론 이곳에도 전(滇)나라라는 이민족 국가가 있었지만 전한 무제 시절인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복속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지역에는 지금도 수십에 달하는 다양한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해서 남중의 이민족들이 그저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유비는 익주를 차지한 후에 내항도독(庲降都督)이라는 지위를 두어 남중 4군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도독(都督)이란 일정한 지역의 군사 지휘권을 지닌 자리입니다. 각 군의 군사 지휘권은 본래 태수에게 있는데도 굳이 상설직으로 통합 군사지휘관을 둔 것은 그만큼 군사를 동원할 일이 많았다는 의미입니다. 반란이 빈발했다는 거죠.
물론 이민족들만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닙니다. 남중 지역에 자리 잡고 오래도록 부와 권력을 축적해 온 호족들 역시 불만이 많았습니다. 후한시대 말엽에 이르러 천하가 혼란에 빠지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자, 이들은 반쯤 독립세력화 했습니다. 중앙에서 부임해 본 관리를 내쫓거나 심지어 죽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백성들에게서 세를 거두어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재산으로 축적했습니다. 촉한이 건국되고 남중 지역에 행정력을 투사하려 하자 이들은 당연히 극렬하게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촉한의 상징이자 기둥이었던 황제 유비가 세상을 떠난 시점이야말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에 최적의 시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갈량은 과연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답은 대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제갈량은 거의 2년 동안 관문을 굳게 닫고 농사에 힘쓰도록 했습니다. 농사란 곧 국가의 경제와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먼저 국력을 키우면서 내실을 다졌다는 뜻입니다. 촉한이라는 국가의 상징과도 같은 유비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나라를 안정시키는 게 가장 시급하다는 판단이었을 테지요. 물론 이릉에서의 대패로 인해 국력이 대폭 소모된 상황에서 군사를 동원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제갈량이 그저 가만히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우선 동오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다시 우호를 맺었습니다. 이로써 옹개가 멋대로 활개 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던 동오의 지원을 끊어 버렸지요. 또 소금과 비단을 비롯한 여러 산업들을 진흥하여 국고 수입을 크게 증대시켰습니다. 그 결과 촉한은 이릉의 대패로부터 불과 삼 년 만에 다시 한 번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국력을 비축하게 됩니다.
이렇게 쌓아 올린 국력을 바탕으로 제갈량은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습니다. 225년 봄, 제갈량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섭니다. 칼끝을 겨눈 곳은 이른바 남중으로 일컬어지는 네 개 군, 즉 익주군/장가군/월수군/영창군이었습니다. 이때 자신이 깊이 신임했던 왕련이 친정(親征)을 극구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결국 직접 군사를 지휘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만큼 남중 평정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킨 제갈량은 남하하여 월수군으로 진격했습니다. 아울러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서 내보냈지요. 내항도독(庲降都督) 이회는 남쪽 익주군으로 향하도록 하고, 문하독(門下督) 마충은 동남쪽 장가군으로 파견했습니다. 이들의 역할은 각기 맡은 방면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사태를 수습한 후 다시 제갈량의 본대와 합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처 제갈량이 당도하기도 전에 적진에서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놀랍게도 고정의 사병들이 옹개를 죽인 겁니다.
사서에는 이유가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앞뒤 정황으로 짐작해볼 때 내분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옹개는 한족이고 고정은 이민족인 수(叟)족이었지요. 서로의 이해관계가 달랐을 겁니다. 또 옹개는 애당초 이민족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옹개와 고정 간의 내분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간에 옹개의 죽음은 촉한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마충은 주포를 물리치고 무난히 장가군을 평정했습니다. 이회는 한때 두 배나 많은 적군에 포위당해 위기에 빠졌지만, 그들을 속여 방심하게 한 후에 기습하여 승리하고 익주군을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제갈량은 고정을 사로잡아 참수합니다. 그야말로 연전연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옹개와 협력하고 있었던 맹획이 잔당을 규합하여 제갈량에게 저항해 온 겁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