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최선의 정치체제이다? 민주주의를 잘 하면 경제가 무조건 성장한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들이 무조건 더 행복하다? 이런 일반 명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2025년 동아시아에 있는 한국, 즉 우리만큼은 민주주의 잘 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하고 민주주의를 잘 하는 것이 우리 한테 최선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자꾸 이점을 망각하고, 자꾸 과거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전에 민주주의를 안 했던 시절에는 고도 성장을 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가면 다시 좋아지지 않을까? 이런 착각을 몰아 내야 합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는데, 우리나라는 민주주의를 잘 하는 게 최고의 선택입니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같이 가야 합니다. 미국과 보조를 잘 맞춰야 합니다. 서유견문에서도 청과 아라사를 경계하고 미국과 친교하라고 했습니다. 원래부터가 멀리 있는 나라와 동맹하고 이웃을 경계해야 합니다. 미국이 이제 상당히 비개입주의적 경향으로 바뀌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세계 최고의 군사 강국, 경제 대국입니다. 역사상 어느 제국보다 부강했고, 한동안 더욱 부강해질 겁니다. 미국이 비개입주의적 경향으로 바뀔 수록, 우리는 출발해 멀어져 가는 팍스 아메리카나 열차 막칸에라도 어떻게든 올라 타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걸 열심히 어필해야 합니다. 미국의 엘리트들은, 한국을, 우리가 이식한 자유민주주의를 잘 키워서 성공시킨 모범 사례라고 생각하고들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엘리트들이 그렇게 말하고들 다닙니다. 이번에 노벨상 수상한 애쓰모글루, 그런 분들의 주장은 포용적 제도가 성장을 만든다는 것인데, 그러면서 항상 드는 예가 남한과 북한의 야간 위성사진입니다. 남한은 포용적인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해서 밤에도 전깃불이 환하고, 북한은 억압적인 공산당 일당독재 통제경제를 해서 밤에 깜깜하다고. 남한은 소위 "미제"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미제국 주도의 세계 질서-팍스 아메리카나-의 성공 사례입니다. [미국 말 잘 듣고, 미국 열심히 모방하고,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잘 하면, 너희도 한국처럼 잘 살 수 있어!]
그런데 갑자기 우리가 급발진해서,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주의 없던 과거로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이름만 민주주의인 이상한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이 우리를 손절하고, 우리를 모른채하고, 대만과 일본 정도하고만 놀지 않을까요?
우리 경제는 제조업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제조업 이제 불안합니다. 중국이 훨씬 더 잘 합니다. 추격하는 정도를 넘어 이제 거의 다 추월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반도체 다 머지 않았습니다. 다른 먹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에서 살아보니, 다른 업종으로는 우리가 세계시장에서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국처럼 빅테크를 만들어서 시장 표준을 주도 하겠습니까? 우리가 무슨 영국, 홍콩, 싱가폴처럼 금융으로 승부를 볼까요? 우리가 잘하는 자영업, 서비스업, 전 세계적으로 팔아서 외화 벌어 올 수 있을까요? 그나마 우리가 찾아낸, 우리가 그나마 잘하는 업종이, 제가 보기에는 문화 연예 산업("한류")입니다. 우리는 이제 전세계적으로 "오징어 게임"의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브랜드를 가지고, 사람들이 우리 나라에 놀러 오게 만들고(관광), 우리 나라 연예인들이 외국 가서 외화 벌어오고(엔터테인먼트), 우리 콘텐츠 외국에 팔고, 이것도 이제 우리의 먹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러한 문화 역량은, 분명히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꽤 하니까, 이런 문화 콘텐츠 역량도 피워 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민주화가 되어서, 우리가 검열을, 보도지침을, 가위질을, 예전보다 훨씬 덜 두려워 하니, 우리의 문화 역량이 발산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민주주의를 포기하면요, 단언컨대 우리는 재미 없는 나라가 될 겁니다. 마치 80년대 홍콩 문화가 중국 반환과 함께 예전의 색을 잃었듯이요.
문화산업의 예를 들었지만, 문화산업만 문제가 아닙니다.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거의 모든 산업에 있어서, 우리의 차별점, 우리의 특징, 우리의 브랜드가 이제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해외 파트너들이, 중국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한국을 선택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 그건 더 이상 기술 우위나 상품 품질의 우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쟤네 우리처럼 자유 민주주의 국가잖아. 쟤네는 우리랑 그나마 코드가 통하잖아. 그나마 법이 작동하고, 관이, 군이, 당이, 정부가 자의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예측가능한 나라잖아. 그래 우리는 중국이 더 싸고 질이 좋더라도, 예측가능한 한국이랑 장사할래." 외국인들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우리의 시스템. 민주주의. 이제는 이것이 우리의 중요한 차별 요소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미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질서 내에서 한 축을 담당하면서, 열심히 물건 만들어 팔고, 또 열심히 우리 브랜드로 콘텐츠 만들어서 팔고, 그렇게 먹고 살아 가야 합니다. 미국이 폐쇄적으로 가면 갈 수록, 우리는 그 갈수록 좁아지는 서클에서도 우리 자리 찾아서 그 자리 단단히 차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민주주의 더 잘 해야 합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잘 하면 잘 할 수록, 우리한테 유리합니다. 다른 시대, 다른 나라는 모르겠습니다. 뭐 동남아나 남미의 어느 국가는 군사독재를 해야 더 잘 성장할 수도 있을지도요. 그건 그 나라 사정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닙니다. 세계에서 한국의 포지션이 있고, 한국의 이미지가 있고, 한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기대가 있습니다. 그걸 내던지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미국을 사랑하고 경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생각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더 이상 [국익]이 아니라, [자기 이익]만 중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