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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11/17 14: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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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800px-thumbnail.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17세기 초,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스페인 기사도 소설에 심취한 돈키호테를 창조해냈다. 이로 인해 문학을 즐기게 될 사람들은 계속해서 몇가지 질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Don_Quixote_16.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가장 처음에 오는 질문은 "겨우 누군가에 의해 고루하게 창작된 틀 따위에 목숨을 거는 인물은 얼마나 한심한가?" 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 또한 본인의 이러한 의도를 작품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돈키호테는 분명, 틀에 박힌 기사도 문학의 풍자로서 탄생했다. 

 그러나 이전의 기사도 소설을 풍자하며 그것을 부정하는 성격을 지닌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박제된 관습의 세계에 액자를 대어 봄으로써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버렸다. 이제, 그 액자라는 것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 되었다. 


Don_Quijote_and_Sancho_Panza.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그렇게 근대적 소설의 기틀이 된 이 작품에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레 따라붙는다. "그러한 한심한 사람들을 구태여 조롱하는 인간들은 얼마나 더 한심한가?" 즉, '무언가에 의해 규정되어있는 그 어떤 액자라도 전부 부수고, 자신만의 낭만과 관습의 세계에 자신 스스로를 박제하려는 자'를, '늘상 의미의 고통에 시달리기에 언제나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는 근대적 인간'들이 함부로 까내릴 수 있느냐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그들의 맹목성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작물 속의 돈키호테에 대해서는 애정을 갖지만 현실의 몽상가에게는 혐오감을 느낀다. 그가 지닌 관습의 세계에서 비인간성을 느끼고, 그에게 달라붙어있는 가난과 죽음의 기운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를 '정신병자'로 낙인 찍는다.


Don_Quixote_2.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오늘 다룰 인간 또한 그렇게 '정신병자' 낙인이 찍혀버린 또 하나의 돈키호테다. 그러나 그는 창작물 속의 인간이 아니라 현실 역사 속의 인물인데, 스페인 기사도 문학에 심취했던 자이자 19세기에 재림한 현세의 편력기사였으며, 한 때 마푸체족의 여러 전쟁 지도자들에 의해 추대된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 왕국의 정당한 임금이었다. 



Orélie_Antoine_de_Tounens.jpe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오늘의 주인공, 앙투안 투낭(Orélie-Antoine de Tounens)이란 자는 본래 프랑스의 전직 법률 전문가(avoué)였다. 1858년의 어느 날, 그는 스페인의 정복자이자 문학가 알론소 데 에르실라의 서사시 '라 아라우카나(La Araucana)'를 접하게 되었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았다. 



알론소 데 에르실라의 '라 아라우카나(La Araucana)'

220px-AlonsoDeErcilla.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1533년에 태어난 알론소 데 에르실라는 스페인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서 일찍이 어린 펠리페 2세(당시에는 왕자였다)의 시동으로 수행하며 경험을 쌓았고, 칠레의 아라우카니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대에 합류하였다. 이 아라우카니아인들은 오늘날 '마푸체'라고 부르는 원주민 집단이다. 


Batalla_ente_españoles_y_mapuches_-_por_Alonso_de_Ovalle.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아라우코 전쟁(Guerra de Arauco)의 양상은 참혹했다. 마푸체족은 주기적으로 스페인 정착지를 습격해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집단강간을 자행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은 사로잡은 마푸체족을 이 땅에 일찍이 전례가 없던 금광의 가혹한 노역에 강제동원했다. 예수회는 마푸체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 했으나, 마푸체 유력한 족장들은 그들의 일부다처제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La_Araucana.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알론소 데 에르실라는 칠레에서 17개월간 이러한 전역에 머물며 그 자신또한 직접 수 차례의 전투에 참전했고, 마푸체 전쟁지도자(Toqui) '푸른 석영(Caupolicán)'의 영웅적인 죽음을 목격했다. 그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서른 일곱의 장(cantos)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서사시를 집필했는데, 이 서사시는 문학적으로도 탁월할뿐만 아니라 엄밀한 역사적 고증또한 겸비한 걸작이었다. (쥘 베른의 '그란트 선장의 아이들'에 언급되기도 하였다.)

Caupolicán.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매사 진지한 표정에 유년기부터 애꾸였던 푸른 석영은 투카펠(Tucapel) 전투에서 정복자들의 고립된 지휘부를 요격했으며, 그 결과 적의 위대한 지도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를 직접 처형할 수 있었다. 


1024px-Últimos_momentos_Valdivia.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알론소 데 에르실라에 따르면 발디비아는 곤봉에 맞아 죽은 뒤 심장이 적출되었고, 마푸체족의 전쟁지도자들이 그 심장에 흐르는 피를 나누어 마셨으며, 그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발디비아는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겠노라 제안했지만, 그 제안은 거절되었고 산 채로 잡아먹혔다고도 한다. 

Pedro_de_Valdivia.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페드로 데 발디비아


 그러나 푸른 석영 또한 같은 운명을 면치 못했다. 그는 어느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반격을 준비하던 중 사로잡혔고, 날카롭고 기다란 못에 신체가 관통되어 전시되는 형벌을 받게되었다. 



나, 앙투안 드 투낭, 파타고니아의 왕


Lonko-Kilapan-2.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마푸체족 수장(Lonko) 칼리판(Quilapán)의 모습

 앙투안 투낭은 이러한 서사시 속 마푸체 원주민들의 영웅적인 저항담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아라우카니아에 직접 가서 마푸체족의 왕위에 즉위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칠레의 발파라이소와 산티아고에 2년여간 체류하며 스페인어를 익힌 그는 비오비오(Biobío) 지방의 유력한 마푸체 수장들(Lonko)을 여럿 접견했다. 


1024px-Rey_de_la_Araucanía_y_Patagonia.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마푸체족을 만난 자리에서 그는 그들 종족의 독립을 위하여 각종 무기와, 본국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을 신신당부하였고, 설득이 먹힌 것인지 마푸체족의 회의에서 단번에 최고 전쟁 지도자(Toqui)로 선출되었다. 

Blason_du_Royaume_d'Araucanie_et_de_Patagonie.svg.pn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왕국의 국장

Flag_of_the_Kingdom_of_Araucanía_and_Patagonia.svg.pn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왕국의 깃발


 이러한 선출을 근거로 1860년, 그는 두개의 칙령을 선포하여 스스로를 아라우카니아와 파타고니아 왕국의 오렐리앙투안 1세(Orélie-Antoine I)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수도는 페르켕코(Perquenco)였으며, 자체적인 화폐도 주조하였다. 그가 '라 아라우카나'를 읽은지 2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초한 왕국 헌법의 사본을 칠레의 여러 신문사들에 송부하였고, 그 중의 한 신문사(El Mercurio)는 그 내용을 싣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파라이소에 몸소 나선 오렐리앙투안 1세의 행차에 대하여 칠레의 정치인들은 철저한 무관심과 무대응으로 반응했다. 


Change_of_Chile_frontier_border_in_the_Occupation_of_the_Araucanía_-_1870.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일국의 왕이거늘, 이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믿는 구석이었던 본국에 접촉을 시도했다. 마푸체 원주민들에 대한 프랑스 본국 지원의 약속을 지킬 때였다. 실제로 나폴레옹 3세가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이권 개입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종종 칠레 해안가에 정박하곤 했던 프랑스의 전함들은 앙투안의 기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렐리앙투안 1세를 알현한 프랑스 영사는 무엄하게도 "아무래도 미친 사람인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Fuerte_de_Purén_Chile.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본국의 지원이 좌절되었고, 칠레 정부는 자국의 영토를 불법으로 점거한 이들 '반역도당'을 쳐없앨 마음을 먹었다. 전쟁은 대대적인 것이었다. 실상 이 전쟁은 아주 오래전부터 칠레의 국책사업으로서, 예정돼있던 것이었다. 


Trails_of_Tears_en.pn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미국이 서부의 원주민들을 몰아냈듯, 칠레는 남부의 아라우키니아를 몰아냄으로써 저들만의 명백한 운명을 실현시킬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에, 우리의 오렐리앙투안 1세가 원주민들의 전쟁 지도자로서 불안하게 말안장 위에 올라타 있었다.

...체포 허가 명령이 떨어진 지 8개월만인 1862년 9월 2일, 앙투안 드 투낭은 법원 명령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심신미약'으로 판단되어 프랑스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마푸체족과 함께하는 기사도 문학적인 죽음은 없었다. 이후에도 앙투안 드 투낭은 계속해서 칠레로 돌아오고 추방되기를 반복했던 바, 대부분의 당대인들은 그의 부르주아적 몽상병을 조롱하며 딱하게 여겼다. 


Antoine_de_Tounens_vestido_de_Mapuche.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1869년, 그가 추방되기를 반복하다가 오랜만에 다시 아라우카니아로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이다. 마푸체족은 갑자기 돌아온 자신들의 임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칠레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Johann_Moritz_Rugendas-el_rapto.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그 때 앙투안은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해 다시금 원주민 조직을 재편하여 세를 떨쳤다. 그 때 칠레 당국은 그의 목에 상당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어떤 마푸체 원주민도 이 이상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방인, 자신들의 임금님을 고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단순한 미치광이일뿐 어떠한 덕망도 가지지 않은 범인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프랑스의 군함은 1870년까지 칠레 코랄(Corral) 해안에 정박해 있었으며, 187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당국이 적발하여 압수한 불법 무기 밀수품들이 앙투안의 비밀 지령에 의한 것이었단 기밀 보고가 존재한다. 앙투안은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왕국을 잊지 않고 있었고, 어쩌면 그는 정말로 뜻을 펼칠 기회를 잡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황은 그를 돕지 않았다. 돈이 다 떨어져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거나, 다시 오다가 칠레 농부들에게 잡혀서 추방되었다가, 위조 여권 가지고 왔다가 바로 들켜서 추방되었다가, 아파서 수술해야해서 돌아갔다가...등등 그 자신만의 모험을 이어나가야했기 때문이다.

 1878년, 앙투안 드 투낭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었다고 한다. 


Atlas_pittoresque_pl_037_(cropped).jpg 실제로 있었던 돈키호테

 그의 허깨비같은 명목상의 왕위 또한 비혈연관계의 지인들에게 내리 상속되며 식자들의 술안줏거리로 전락했다. 그러나 아라우카니아 파타고니아의 명목상 군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푸체족의 권리 신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고 한다.

 남미 끄트머리의 마푸체족과 서유럽의 프랑스인들 사이의 일백 오십여 년 넘는 인연은 어떤 미치광이가 어느 오백년된 어느 스페인 정복자의 기사도 문학을 읽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다. 

 현실은 기사도 문학같진 않았다. 돈 키호테가 알론소 키하노로 죽었듯, 오렐리앙투안 1세도 앙투안 투낭으로 죽었다. 그러나 '겨우 책 한 권에 의지한 채 편협한 낭만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연기'를 비웃는 속 편한 사람들도 산초의 진심어린 눈물과 그의 상속분에는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못할 터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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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다완
+ 24/11/17 15:09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마르코
+ 24/11/17 15:22
수정 아이콘
산초야, 나 좋은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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