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스포일러 없음, 게임 규칙과 공략, 진행에 대한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는 있습니다. 저는 닌텐도 스위치 버전으로 플레이했음을 밝힙니다.)
서론 - 게임 메커닉의 깊이와 대중성 사이의 딜레마
<디스가이아>시리즈, <아틀리에> 시리즈, <섬란 카구라>시리즈 같이 일본 중소규모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게임들은 나름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의 취향을 반영하여 카툰풍 그래픽을 선택하고, 투입되는 자본의 한계때문에 게임의 플레이시간이 줄어드는것을 커버하기 위해 크지 않은 볼륨에 나름의 메커닉적 파고들기 요소를 추가해 플레이타임을 확보합니다. 스테이터스들 사이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구축한다거나, 캐릭터를 무한에 가깝게 성장시킬 수 있다던가, 간단한 수집요소를 왕창 첨가한다던가, 수치적으로 단순반복작업을 통한 성장이 전제되지 않으면 게임 진행이 막힌다던가 하는 식이지요. 재밌는것은 이런 게임 디자인이 역으로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게이머들을 불러모으기도 한다는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걸 보면 도대체 이게 뭐지? 싶은 디스가이아 시리즈의 스탯창]
이런 게임들이 항상 가지고 있는 딜레마는 '매니아와 보편적 게이머의 취향 사이에서 어떠한 스탠스를 취할것인가'라고 할수있습니다. 코어팬들은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전작에 존재하는 요소를 그대로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파고들 거리를 요구합니다. 보편취향 게이머들은 접근하기 쉽고 다가가기 쉬운 디자인을 요구합니다. 코어팬들을 외면하면 시리즈의 존재이의가 흔들리며 프랜차이즈 자체가 무너질수 있고, 새로운 유저들을 외면하면 고이고 썩어 시리즈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이 되버리기도 합니다. 위에서 예를 든 시리즈들은 설계와 정돈이 비교적 제대로 이루어진 시리즈들이기때문에 롱런할수 있었지만, 많은 일본 중소규모 게임들은 코어 유저층의 압박과 대중성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정체성이 무너지고 제작이 중단되기도 합니다.
저는 확고한 방향성과 철학을 가지고 심도있는 규칙을 설계하는 게임 디렉터들의 존재가 게임시장을 더 가치있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며 시뮬레이션의 극한에 도전하는 <림월드>, 항상 장르성 강하고 코어 게이머들을 만족시킬줄 아는 게임 메커닉 디자인을 보여주는 캡콤의 액션게임들,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격투게임 매니아들을 열광시키는 아크 시스템 웍스의 격투게임이 제가 생각하는 '가치있는 게임'들의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게임디자인이 단순히 깊이있고 어렵기만 해서 코어 게이머들에게 사랑받는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팬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만한 강렬한 개성과 새로운 게이머들을 자연스럽게 팬으로 만드는 난이도 커브 디자인으로 언제든지 새로운 팬을 흡수할만한 요소들을 꼭 갖추고 있지요.
[킹룡+머검 조합에 가슴이 웅장해진다...]
본론 - 농사. 멀리서 보면 낭만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쟁
<천수의 사쿠나 히메>는 일본의 동인 게임제작서클에서 제작한 게임입니다.
10명 남짓한 제작인원이 4~5년정도의 기간에 걸쳐 제작한 게임이라고 합니다.
천계 곳간의 쌀을 홀랑 태워먹는 사고를 친 풍양신 사쿠나 히메가 오니가 점령한 히노에섬 정벌을 명받고 일어나는 일을 다룬 농사+액션 rpg입니다.
기본적인 게임은 벼농사를 지어 사쿠나를 성장시키고, 2D 액션이 기반이 되는 오니들과의 전투를 통해 스토리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사쿠나 히메 한국어판 공식 PV]
1. 농사, 아는것이 힘이다. 농사, 아는것이 재미다.
풍양신 답게 사쿠나의 힘의 원천은 [쌀]에서 옵니다. 따라서 벼농사를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사쿠나의 성장치가 결정이 됩니다.
게임이 시작되고 짓는 튜토리얼격의 첫 농사에서 플레이어에게 기초적인 지식 외에는 아무 정보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계절에 맞추어 시키는대로 봄에 모내기를 하고, 여름엔 잡초를 좀 뽑고, 가을엔 수확을 할 뿐입니다.
그렇게 단순한 첫해 벼농사를 끝내고 나면 그저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논이 그저 아릅답게 보일 뿐이지요.
해가 거듭되고,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고, 새로운 도구들을 만들면서 새로운 농사 지식과 농사법이 하나씩 소개되기 시작합니다.
벼농사의 결과를 조절하기위해서는 물조절이 중요하다는 지식을 배웁니다.
플레이어는 출수구와 입수구를 열고 닫아가며 물높이를 조절해봅니다.
분명히 발목까지 차게 물을 채워놨는데 전투를 다녀왔더니 물이 더 차있습니다. 첫해 농사에선 분명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하루종일 비가 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쿠나히메의 농사의 재미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전 농사에선 무심코 지나쳤던 요소가 농사 결과에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서요.
이 게임의 농사가 다른 게임과 가장 차별되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흔히 이런 경영시뮬레이션의 생산작업은 일정 궤도 이상에 오르기 시작하면 배움은 끝나고 단순 반복작업이 되기 마련입니다.
많은 모바일 경영시뮬레이션 게임, 스타듀밸리나 파밍시뮬레이터와 같은 귀농 시뮬레이터 게임들도 대부분 이런 단순반복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요즘 나오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경영시뮬레이션 게임들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이유가 이런 지루한 반복성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쿠나 히메에서는 1) 농사에 사용되는 아이템이나 요소 하나하나가 변수가 되며, 2) 그 변수들 사이의 상호작용 또한 자연법칙에 직관적이며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있어 시작부터 엔딩을 볼때까지 끊임없이 몰랐던 사실을 실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직관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이 자연스러운 배움이라는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무런 합당한 이유없이 물높이가 출렁거리거나 수온이 떨어지면 게임이 굉장히 억지스럽고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플레이어에게 심어줄 수 있지만, 이 게임에서의 모든 상호작용은 직관과 일치합니다. 비가 오니까 물높이가 올라가는거고, 밤새 차가운 기온과 맞닿은 수온은 떨어지는게 당연하니까요. 직관과 합치되는 배움은 쉬우면서 즐겁기 마련입니다.
이는 마치 <젤다의 전설 - 야생의 숨결에서> 자연요소들의 상호작용방식에 대해 배웠을때를 대응해볼 수 있겠습니다.
플레이어는 직관을 통해 즐겁게 배움으로써 그 지식을 농사에 적용하고, 적용한 방법론의 결과를 검토하며 내가 미처 알지못한 변수가 있었는지 다시한번 확인합니다.
배움->실험->결과분석을 통해 내가 세운 가설이 적중하고 풍작을 이루어냈을때의 성취감에 흥분하게 되지요.
갈수록 단순화되는 경영시뮬게임이 범람하는 요즘 예전 <심시티> 구작 시리즈같은 깊이감을 느꼈을때의 감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쿠나 히메가 화제가 된건 주로 이런 농사파트의 설계와 심도였지만, 게임의 절반을 차지하는 전투의 설계또한 심도있습니다.
전투에서 캐쥬얼한 재미를 느낄만한 요소들은 당연히 충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레벨업을 할수록 효과가 눈에 띄게 성장하는 무기술들, 훌륭한 타격감, 플랫포밍과 액션을 섞어가며 진행하는 재미 등 가벼운 마음으로 액션을 즐겨도 충분히 엄청나게 재밌게 즐길 수 있을만하게 기초가 탄탄합니다.
사쿠나 히메는 거기에 흔치않은 전투에서의 깊이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흔히 캐쥬얼 액션게임에서는 물리적 상호작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만 공중콤보지 사실상 묶여있는 적에 연출만 휘적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대충 공격해도 좌표나 히트박스가 척척 보정되서 공격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죠.
공중콤보 도중 다시 넉백을 유도한다거나 적의 위치를 다시한번 제어할 수 있는 액션게임이 얼마나 되나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사실, 이런 지나치게 단순화된 전투설계는 가볍게 즐기기 좋지만 직관과는 위배되는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쿠나히메가 다른 캐쥬얼 액션게임과 구별되는점이 무기술과 날개옷을 활용한 물리적 상호적용입니다.
날개옷 덕분에 사쿠나의 기동은 스파이더맨을 연상시키듯 매우 자유로우며, 충돌과 공중 넉백 등 적당히 단순화되었지만 많은 변수가 존재하는 물리적 상호작용 덕분에 여러 플레이를 시험해보는 재미까지 갖추게 됩니다.
콤보를 시도해보다보면 이게 보기보다 호락호락한 게임이 아니구나 하는걸 깨달으실 수 있을겁니다.
[사쿠나 메이 크'라이스']
여기에 더불어, 일종의 무한모드에 가까운 던전도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난 복잡한거 싫고 사쿠나가 언제까지 강해지는지 키워보고 실험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한 컨텐츠도 준비되어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맛있는 쌀로는 뭘 해먹어도 맛있다. 캐쥬얼함을 잃지않은 설계와 부드러운 러닝커브의 미학 하지만 제가 서론에서 언급한것처럼, 단순히 게임메커닉에 깊이가 있다고만 해서 게임이 재미를 주지는 않습니다.
게이머들이 이런 게임의 심도있는 메커닉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파고들기로 부드럽게 연착륙할수 있게 디자인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사쿠나 히메는 게임 설계의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도 충분히 클리어 가능하게 난이도가 구성되어있습니다.
사실 농사를 망쳐도, 전투를 못하는 똥손이여도 클리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충분히 내 템포대로 즐겨도 충분히 클리어할수 있지요.
다만 이 게임의 러닝커브 설계가 부드럽게 느껴지는건 게임의 코어 컨텐츠를 자연스럽게 소개하면서, 플레이어의 직관을 통해 하나하나씩 발견해나가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농사 파트는 깊고 넓지만 그 변수간의 상호작용이 직관적이고 자연법칙을 따라가기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으며, 전투요소는 성장치에 따라 더 강력하게 변해가는 무기술이나 여러 무기 진가를 발견하고 시험해보는 재미, 각종 전투 상호작용을 찾아가고 시도해보는 재미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코어 컨텐츠까지 연착륙하도록 게임이 유도하기 때문이지요.
4. 양립의 미학
결국, 이 게임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양립'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농사와 전투는 서로 상호작용하며 서로의 플레이동기가 됩니다.
더 좋은 쌀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투에서 구할수 있는 여러 아이템들이 필요하며, 또 반대로 더 강한 적과 효율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쌀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이렇게 메인컨텐츠가 두가지 이상인 경우, 컨텐츠간의 균형을 잡지 못하는 타이틀들이 굉장히 많은데 사쿠나 히메에서는 많은분들이 농사와 전투를 50:5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두 컨텐츠 간의 균형이 잘 짜여져있고 유기적으로 양립한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이 게임에서는 깊이와 캐쥬얼함 또한 양립합니다.
캐쥬얼하게 즐겨도 아무런 부담없이 편안하고 힐링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게임이 소개하는대로 플레이하다 보면 게임의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가정을 시험해보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게임디자인에서의 양립은 중용과는 살짝 다릅니다.
중용은 타협을 위해 절충하는 것이지만, 양립은 개성강한 양쪽의 공존을 위해 다리를 연결하는 것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사쿠나히메에서의 이 다리는 굉장히 탄탄한 지반위에 세워져있다고 보입니다.
결론 -쌀은 힘이다. 극동지방 사람들이 '벼농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공유하며
재밌게도, 개인적인 감상입니다만 제가 이게임에서 양립이란 키워드를 느꼈던건 단지 게임 디자인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이 게임 전반에는 '일본인이 생각하는 쌀과 벼농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녹아있습니다.
'쌀은 힘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더불어, 게임에서 쌀은 천계의 가장 고위 신에게만 봉납되는 것으로 매우 귀하면서 소중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한국에서도 인삿말에 '밥'이 빠지는 법이 별로 없을정도로 중요합니다.
'식사하셨습니까' '다음에 밥한번 같이 먹자' '밥은 먹고 다니냐?'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굉장히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전형적인 일본 전통양식의 아트 디렉팅을 고수하고 있는 게임이고 그면에선 이질감이 드는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쌀은 힘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 모내기를 하며 노동요를 부르는 모습, 식구들이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이야기하는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은 마치 틈만나면 밭일을 하시던 제 할머니가 떠오르는, 한국인으로서도 굉장히 친숙하면서도 편안한 것이었거든요.
<기생충>에서 나오는 소고기 넣은 짜파구리나 제시카송이 주는 묘한 뉘앙스는 한국인이 아니면 알아채기 어렵고,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에서 왜 굳이 게임의 배경이 디트로이트이며 왜 안드로이드들이 'Hold on just a little while longer'라는 곡을 합창했는지 미국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채기 힘들것입니다.
[흑인들의 행진가로 사용되던 가스펠 Hold on (just a little while longer)는 디트로이트 : 비컴 휴먼에서 안드로이드들의 행진가로 사용됩니다.]
그런 면에서 사쿠나 히메를 플레이하면서 느낀 이 알듯말듯 오묘한 감정은 어지간해선 느껴보지 못한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일본스러워 이질적이지만 또한 극동지방이라는 동질감으로 묶여있는 공감대가 공존하는 느낌. 이런 토속적인 소재로도 게임을 만드는 일본 게임시장의 다양성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심. 과연 일본인들은, 중국인들은 이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이까, 또 서양인들은 어떨까 하는 잡생각. 혹시나 내가 서양인의 입장에서 스타듀밸리 같은 게임을 플레이하면 내가 몰랐던 미묘한 디테일을 캐치할 수 있을까. 뭐 이런 복잡미묘한 생각들이요.
캐쥬얼함과 깊이가 양립하는 게임들은 많았지만, 심정적으로도 동질감과 이질감이 함께 드는 이런 소재로 감정적인 양립을 게임이 안겨준것은 또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게임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얕기만한 게임도 아닙니다. 개인적으론 10명남짓한 동인제작서클에서 이런 게임을 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면서 놀라웠습니다. 왠만한 메이저 게임제작사들도 보고 배워야 할 정도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탄탄한 일본 인디게임 토양에서 훌륭한 쌀알이 영글었다고 단언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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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동인서클의 핵심 멤버는 사실상 두 명이라고 하더군요. 쌀농사 관련해서는 예전 사료를 찾아서 검증하면서 만들었다고 하고요.
여기에 한글 폰트까지 직접 제작한 걸 보면 장인정신이 대단하다 싶습니다.
그리고 제작할 때 유통사의 자금 지원은 없었다고 합니다. 5년 동안 저금 깨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 들으니 꼭 성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행히 일본에서도 패키지는 거의 동이 났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게 되팔이의 힘도 컸다는 것입니다만....